아가도스와 칼로스





아가도스 & 칼로스 

* 아가도스는 절대적 선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아가도스로 존재합니다.
칼로스는 상대적 선으로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비교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때 그와 같은 삶을 상대적 선이라고 합니다.

선한(18) 아가도스(agathŏs) ἀγαθός, ἡ, όν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agathŏs ]


선한(2570) 칼로스(kalŏs) καλός, ἡ, όν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kalŏs ]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도스'와 '칼로스'입니다.
두 단어가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선'을 가리킬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요한 10:11. 나는 선한(칼로스 G2530-가치있는)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립보서 1: 6. 너희 속에 착한(아가도스 G18)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그 두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입니다.

성도의 착한 일, 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금과 빛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은 이 세상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금과 빛의 삶, 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 순종의 착한 행실, 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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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선함>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아가도스-ά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입니다.
두 단어가 혼용하여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아가도스-άγαθός>는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선>의 개념입니다.
“도덕적으로 선한, 올바른, 유익한”의 뜻입니다.
<칼로스-καλός>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을 의미합니다.
<아가도스-άγαθός>가 윤리, 도덕적인 <선>을 의미한다면, <칼로스-καλός>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모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아름다움은 <아가도스>와 <칼로스>에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내면의 깊은 아름다움과 성품, 인격이 흘러 넘칩니다.
<아가도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모든 마음을 드리는 인생이 <칼로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곳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칼로스>의 삶, 그 착한 행실이 모든 사람에게 <아가도스>가 되어서 나타나는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흘러 넘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영혼은 <아가도스-ά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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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브 (히 2896, טוֹב : good 562회)
아가도스 (헬 18, ἀγαθός : good 101회)

"Ἀγαπητέ, μὴ μιμοῦ τὸ κακὸν, ἀλλὰ τὸ ἀγαθόν.

 ὁ ἀγαθοποιῶν, ἐκ τοῦ Θεοῦ ἐστιν; ὁ κακοποιῶν, οὐχ ἑώρακεν τὸν Θεόν."

 (Ἰωάννου γ 1:11 Greek)

"아가파테, 메 미무 토 카콘, 알라 토 아가돈.

 호 아가도포이온, 에크 투 데우 에스틴; 호 카코포이온, 우크 헤오라켄 톤 데온."

 (이오안누 감마 1:11 한글음독)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삼서 1:11 개역개정)

                                           I
※ '선한 또는 선'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형용사 또는 명사

   '토브' (2896, טוֹב : good)와 '선함, 좋은 것'이라 번역된 남성 명사

   '투브' (2898, טוּב : goodness 32회)는 '선하다, 보기에 좋다'라는 동사

   '토브' (2895, טוֹב : to be good 25회)에서 유래한다.

※ '선'이라 번역된 헬라어 여성 명사

   '아가도쉬네' (19, ἀγαθωσύνη : goodness 4회)는 '선한'이라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아가도스' (18, ἀγαθός : good)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선을 행하다'라 번역된 동사

   '아가도포이에오' (15, ἀγαθοποιέω : to do good 10회)가 있다.

   동의어로 '선한'이라 번역된 형용사 기본어

   '칼로스' (2570, καλός : good 101회)와 '선을 행하다'라 번역된 동사

   '칼로포이에오' (2569, καλοποιέω : to do good 1회)가 있다.

                                            II
아래에서는 히브리어 '토브'그리고 헬라어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용례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이들 원어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상고해 본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896, 토브)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세기 1:4 개역개정)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2896, 토브)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사무엘하 2:6 개역개정)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2896, 토브)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역대상 16:34 개역개정)

"또 주의 '선한'(2896, 토브)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느헤미야 9:20 개역개정)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2896, 토브)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2896, 토브)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편 14:1-3 개역개정)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2898, 투브)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2896, 토브)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편 25:7-8 개역개정)

"주는 '선'(2896, 토브)하사 '선을 행하시오니'(2895, 토브)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2896, 토브)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8, 71 개역개정)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2896, 토브)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개역개정)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4190, 포네로스)하니

 어떻게 '선한'(18, 아가도스)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18, 아가도스) 사람은 그 쌓은 '선'(18, 아가도스)에서

 '선한 것'(18, 아가도스)을 내고 '악한'(4190, 포네로스) 사람은

 그 쌓은 '악'(4190, 포네로스)에서 '악한 것'(4190, 포네로스)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34-35 개역개정)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18, 아가도스)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18, 아가도스)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 19:16-17 개역개정)

"나는 '선한'(2570, 칼로스) 목자라 '선한'(2570, 칼로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한복음 10:11 개역개정)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18, 아가도스)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2570, 칼로스)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18, 아가도스)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2556, 카코스)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18-19 개역개정)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선'(19, 아가도쉬네)과 '의'(1343, 디카이오쉬네)와

 '진리'(225, 알레데이아) 안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8-9 원문직역)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2569, 칼로포이에오) 낙심하지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개역개정)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18, 아가도스)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5-17 개역개정)

"'선을 행함'(15, 아가도포이에오)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2554, 카코포이에오)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베드로전서 3:17 개역개정)

                                         
위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히브리어 '토브'와 '투브' 그리고 헬라어 '아가도스'와 '칼로스'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선이요아는 것이 선이요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선이다.
이는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영적 예배요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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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표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세메이온(sēmĕiŏn)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12:12).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세메이아(semeia)
세메이아는 표시(sign)라는 뜻의 희랍어 세메이온(semeion)의 복수형이다.
이러한 표적은 단지 사람을 놀라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능력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인간에게 유익하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예를 들면 원자탄은 그 자체만으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오직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 하나님의 능력만을 보는 것으로 멈추지 말고 그의 사랑까지도 보아야 한다.



기적(다우마. thauma) θαῦμα, ατος, τό 

1. 놀랄 만한 일,  2. 놀라운 일,  3. 기적
발음 / 다우마(thauma)
어원 / 2300의 한 형태에서 유래한 뜻
관련 성경 / 놀랍게 여김(계 17:6)
신약 성경 / 2회 사용

데살로니가후서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기적이란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miracle)이라는 말은 놀라다(to wonder)라는 뜻의 라틴어 미라리(mirari)에서 유래하였다.

첫째는 우리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사(wonder)

성경의 기적들은 자주 두나메이스(dunameis)라고 한다.
이것은 능력(power)이라는 희랍어 두나미스(dunamis)의 복수형으로 다이나마이트(dynamite)라는 말에서 파생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기적 속에는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적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속에 특별하게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기적(테라스, tĕras) τέρας, ατος, τό 

1. 경이,  2. 전조, 3. 징조
발음 / 테라스(tĕra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사(奇事)(마 24:24, 행 2:19, 고후 12:12), 기적(奇蹟)(살후 2:9)
신약 성경 / 16회 사용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세메이온(sēmĕiŏn)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12:12).

마가복음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누가복음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이적, 기적, 기사, 표적에 대한 이해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적과 기사를 Wonder,
기적을 Miracle,
표적은 sign 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기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은 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2.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7.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이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

첫째는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는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는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 12:39~40)(누가복음 11:29)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와 같은 성경의 단어들

기적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근본적으로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기적의 종결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는 반면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 등 각종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이런 기적의 개념에 대해 세속 학문은 역사적으로(Renan), 과학적으로(J. Huxley), 신학적으로(Sabatier), 철학적으로(D. Hume) 많은 반론을 제기해왔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흄(David Hume)은 기적을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유명한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성경적 창조주 하나님이라기 보다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흄이 영국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은 정통 교리에 반하는 바로 이같은 그의 사상이 원인이었다.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개혁주의 보수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즉 성경에 계시된 기적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기적은 성경이 완성되면서 종결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계통뿐 아니라 보수장로교 안에서도 기적 종결에 대한 반론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여기서 기적은 종결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신학적 논쟁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결점 찾기가 결코 쉽지않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이해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즉 성경을 과학의 틀 속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틀 속에 과학을 넣을 것인가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초월과 내재의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적은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연의 통상적인 일상 진행 과정을 자연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이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실 때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contra Faustum ⅩⅩⅥ)고도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항하는 행위를 하시는 분이 아니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자기들의 틀 속에서 오해를 가지고 살 뿐인 것이다. 그럼 이제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성경적으로 어떤 늬앙스를 가지는 말인지 살펴보자.

1. 기적

성경에 기적으로 번역된 단어는 시편 40:5(paia), 이사야 20:3(mowpheth), 데살로니가후서 2:9(teras) 등이 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시 40: 5)가 바로 초자연적 사건으로서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적(奇蹟, wonder, miracle)의 의미는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적은 하나님의 어떤 목적성을 가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적을 너무 단순하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질서나 시간에 초자연적으로 친히 개입하시는 역사를 말한다’고 말하면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였으나 하나님이 가끔은 세상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늬앙스를 주거나 창조의 섭리와 보존은 덜 직접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기적이라는 말의 본 뜻은 잘 분별하여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이라는 말을 이신론적 사고나 이원론적 의미로 무심코 사용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웨인 그루뎀은 기적에 대한 성경적 의미에 대해 ‘이 세상에서 흔치 않은 방법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좀 더 구체성을 가지고 성경에서 이적(異蹟, sign, miracle), 표적(表蹟, sign), 기사(奇事, miraculous sign), 이적의 표징(表徵, miraculous sign, 출 4:8) 등의 말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2. 이적

이적은 자연의 일반적 법칙이나 추이와 다르게 나타나는 사건을 말하는 데 구약에서는 주로 출애굽, 광야 생활, 약속 땅 가나안으로의 입성(시편 105-106편)과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의 활동 기간(왕상 17장-왕하 8장) 때 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병고침(마 8:14-17; 요 4:46-54 등)과 귀신 추방(마 8:28-34; 막 1: 23-28 등), 자연 이적(요 2:1-11; 마 14:22-33; 마 8:23-27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3. 표적

표적은 구약의 경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관계나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oth= 출 12:13; 신 22:14, 17, 20)되며 신약에서는 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그에 대한 반응에 표적(semeion=마 12:38)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4. 기사

기사(oth= 시 105:27, mowpheth=출 11:9,10; 신 4:34; 6:22; 느 9:10; 시 78:43 등 , paia= 시 9:1, teras=마 24:24)는 놀랍고 경탄할만한 사건에 주로 쓰였는데 어원적으로 이적(oth=출 4:8,9; 민 14:11,22; 신 4:34= 헬라어 semeion에 대응; 느 9:10, mowpheth= 출 4:21= 헬라어 teras에 대응, paia= 출 3:20, semeion=마 12: 38, 39)과 거의 같은 말이므로, 이적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잘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과 언약의 신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표적을 주시고 기사(wonders= mowpheth,히)를 행하신다.
기사는 종말론적인 우주적 징조들(욥 2:30)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고 있다.




표적(Sign), 이적(Wonder), 기적(Miracle)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의미의 용어들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같은 상황에서 등장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하게 다루시는 방법과 연관되어 있다.

이적이나 기적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 보통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 등을 가리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여호수아의 전쟁 때 태양을 멈추신 일,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일,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등등,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 성경은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
이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그 분의 신성, 놀라우심,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표적은 이적보다 좀 더 넓은 범위를 갖는데, 표적 안에는 이적도 포함되어 있으나, 전혀 이적이 아닌 표적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6:16 이하에 묘사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든지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든지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시킨다든지 하는 것들은 이적이자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불려지기는 했어도 그것은 전혀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다(겔 20:20).

표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표적”이란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징조” 등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시고자 할 때 한 표적을 보이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말씀이나 언약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민족적으로 탄생할 때부터 “표적”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이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시려 할 때 모세는 “그러나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한다(출 4:1). 즉 “주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또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주께서 모세를 보내신다는 “표”로 제시하신 것이다. 이때 이후로 “치유”라는 것은 하나님의 표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표적” 가운데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40년동안 표적으로 인도하셨고, 기드온에게는 미디안 백성들을 물리칠 지도자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셨고(판 6:17), 히스키야가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것도 “표적”으로 알려 주셨으며(사 38:7),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것도(사 7:14),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다는 것도(사 8:18),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것에 있어서도(사 19:20; 55:13) 모두 표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다(고전 1:22).

이러한 모든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 그 분이 바로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백성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으로 봄으로써이다. 구약에는 메시야가 오실 때 치유를 통해서 온다는 예언이 있다(겔 34:16, 사 33:24; 35:6). 『그 거민은 “나는 병들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리니, 거기에 거하는 백성은 죄악이 사해지리라』(사 33:24).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 34:16). 이 모든 예언들은 예수님께서 그 분의 왕국을 회복하실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렇게도 많은 치유를 행하셨으며, 특히 자신이 왕이심을 직접적으로 증거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이후에 즉시로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신 듯 병고침의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아쉽게도 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자기들의 왕을 거부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표적으로 이끄신다. 이 표적은 사도들에게도 이어지는데 이것이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고후 12:12)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임을 알고 믿으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때에도(대환란 때) 천국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적을 행하는 것이 표적으로 제시된다(막 16:16-18).

그러므로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특별한 방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표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는 구절이다. 표적은 유대인의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이방인들이 “이적”을 구하는 것 같으나 그러한 “이적”들은 결코 “표적”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적들은 가짜이거나 마귀에 의한 이적이다.) 이방인들이 어떠한 이적을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적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코넬료가 성령받은 증거로 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22에 따라서 방언은 표적인데, 그렇다면 이방인 가운데서 표적이 행해졌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코넬료가 행한 방언은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한 사실을 깨닫게 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다. 물론 이 사건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방인 가운데에 표적이 일어났다는 것에 있어서는 베드로와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당시 베드로는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 번씩이나 환상을 통해서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고 하셨음에도 베드로는 율법에 의해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의 모습을 재현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코넬료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만들어 유대인인 베드로로 하여금 그 사실, 즉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한 표적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이다. 결국 이방인이 행한 표적도 믿지 않는 유대인을 위해서 행해진 표적일 뿐이다.

공관복음, 특히 마태복음에서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에서의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누군가가 표적을 행할 필요가 없다.
이 표적은 기본적으로 왕국복음 아래에서 유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행하시던 초림 당시에 이 표적이 행해져서 유대인으로 하여금 그 분이 왕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했다면, 다시 이 천국복음이 전파되는 대환란 때에 이 표적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유효하게 제시될 것이다. 그 사이에 있는 교회시대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이 있고, 또 우리는 유대인도 아니므로 어떠한 표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가복음 8:11 / 힐난하며 시험하여




마가복음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The Pharisees came and began to question Jesus. To test him, they asked him for a sign from heaven.

힐난하며(4802) 수제테토(süzētĕō)  συζητέω 
1. 토의하다,  2. 논쟁하다, 3. 반영하다
발음 / 수제테토(süzētĕō)
어원 / 미완료 συνεζήτουν, 4862와 221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묻다(막 1:27, 눅 22:23), 시험하다(막 8:11), 문의하다(막 9:10, 눅 24:15), 변론하다(막 9:14, 12:28, 행 6:9).
신약 성경 / 10회 사용


시험하여(3985) 페이라조(pĕirazō) πειράζω 
1. 시도하다,  2. 시험하다,  3. 고후13:5
발음 / 페이라조(pĕirazō)
어원 / 미완료 ἐπείραζον, 미래 πειράσω, 제1부정과거 ἐπείρα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2인칭단수 ἐπειράσω, 수동태, 제1부정과거 ἐπειράσθην, 완료분사 πεπειρασμένος, 39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험받다(마 4:1, 약 1:13, 히 4:15), 시험하다(마 4:3, 눅 11:16, 고전 7:5), 애쓰다(행 16:7), 시험 당하다(고전 10:13, 히 11:37, 계 3:1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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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수비학이란 무엇인가요?

성경 수비학이란 성경에 나온 숫자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숫자는 7과 40입니다.

7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완벽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7:2-4, 요한계시록 1:20).
7이 자주 “하나님의 숫자”로 불려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4:5, 5:1, 5-6).
숫자 3 또한 거룩한 완전성,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생각나게 합니다.

숫자 40은 종종 “근신이나 시험의 숫자”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신명기 8:2-5),
모세는 40일 동안 산에 있었으며(출애굽기 24:1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 이후에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경고했고(요나 3:4),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시험 당하셨으며(마태복음 4:2),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3).

성경 속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숫자는 4인데, 이는 동, 서, 남, 북과 4계절을 가리키는 창조의 수입니다.
숫자 6은 인간의 수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6일째에 창조되었고, 오직 6일만 일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성경이 숫자를 사용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정말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패턴을 가지고, 또는 영적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수비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성경에 나온 모든 숫자들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종종 성경 속의 숫자는 단순히 숫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 암호를 찾아내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에 충분한 숨김없는 진리들이 더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디모데후서 3:16).
 

수비학 숫자와 그 의미

오늘날 수비학은 갑자기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세계에서 우승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바꾸는 수많은 영화 스타들의 이름에 행운이 찾아옵니다. 이제 제대로 작동합니까? 우리는 역사의 다른 문화에서 숫자가 가진 중요성과 중요성을 볼 때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숫자에는 모든 차이를 만드는 특정 진동이 있으며 수비학자가 이 숫자를 분석할 때 진동이 개인에게 미칠 영향을 평가합니다. 숫자와 의미를 하나씩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수비학 제로 (0)

0은 아무 의미도 없고, 무효이고, 공허하지만 강력한 숫자이며 신중하게 만들어진 상징적인 변경 사항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도교와 불교와 같은 믿음은 영적 공허함과 공허함을 나타내고, 이슬람과 카발리즘과 같은 믿음에서 0은 무한한 빛의 힘과 무한한 에너지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0은 본질적인 공허함, 모든 것의 기원, 생명의 알이 기원하는 완전한 원, 그리고 모든 존재의 전체성을 취합니다. 그것은 라틴어 nulla figura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실제 인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수비학 원 (1)

하나는 0 다음에 오고 2보다 앞에 오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남근을 상징하는 표시이며 신과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며 남성적 힘의 우월성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화합의 본질과 삶의 주기의 시작에 대한 궁극적인 상징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과 모든 존재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이중성을 제거하는 숫자이며 모든 다양성이 숫자 1에 수렴한다고 믿어집니다. 그것은 완전한 완성과 히브리어와 같은 종교 질서를 볼 수 있으며 잠재 지능과 가장 높으신 분의 자리이며 아도나이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이슬람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숫자로 간주되며 피타고라스 학파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중국인은 가장 중요한 남성성을 유지합니다. 그것은 양, 천상의 그리고 상서로운 힘이라고 믿어집니다.

수비학 2(2)

이중성의 두 여신과 자연적으로 하나의 반대인 하나는 남성을 의미하고 둘은 반드시 여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양성, 변경 및 갈등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한 쪽에서 균형과 안정성을 예시합니다.
2는 화합의 반대와 일시적이고 파괴 가능한 것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향이 있으며, 야망이 없고 불안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속성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데 좋고 협조적이고 선량한 성격을 좋아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가 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힌두교 신앙에서 두 가지는 힘의 이중성을 나타내고 히브리인들은 그것이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음양의 강력한 부분을 나타내고 두 개는 음의 약한 부분을 나타냅니다.


수비학 3(3)

3은 삼위일체, 우주의 3단계, 삶의 3단계, 간단히 말해서 성장, 절정 및 죽음을 포함하는 3단계를 나타냅니다. 숫자는 성장, 에너지, 이중성 및 표현 및 합성을 향한 움직임을 예시합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 영혼 및 정신의 삼중 요소; 땅, 천국과 지옥과 탄생, 삶과 죽음은 모두 3으로 상징됩니다. 이 숫자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매력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외향적이고 활동적입니다. 자연적인 욕망은 돈과 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Three аlѕо는 thе 3명의 마녀와 3개의 소원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과 강한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제자들이 따르도록 요청한 믿음 또는 삼보(三寶)의 세 가지 보석이 있습니다. 중국 신화 3에 나오는 긍정적인 힘을 가진 상서로운 숫자입니다. 도교는 세 가지가 평형의 중심점이라고 믿습니다.


수비학 4(4)

4개는 3개를 성공하고 5개는 모든 단단한 물체의 기초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네 번째 차원, 즉 시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건설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안절부절, 순환성 및 역동성에 반대되는 안정적입니다. 그것은 전체성, 완성 및 견고성을 예시합니다. 수비학적 숫자가 4인 사람들은 현명하고 침착하며 꾸준합니다. 4는 지구, 물, 불, 공기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나타냅니다. 북쪽, 남쪽, 동쪽 및 서쪽의 4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낙원에는 4개의 강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4는 헤르메스의 신성한 숫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네 가지가 선행과 지성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Four аlѕо는 Kabbalah의 4가지 세계를 나타냅니다. 힌두교의 경우 4개는 완벽을 나타내며 힌두교의 삼위일체 중 하나인 브라흐마는 4면을 나타냅니다. 도교는 탑, 칼, 스파이크 곤봉을 들고 있는 4명의 천상의 수호자가 있다고 믿습니다. 튜튼 사람들은 세상을 지지하는 네 명의 난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우주의 본질, 창조자, 우주 영, 우주 영혼, 태초 물질의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많은 긍정적인 특성이 명시되어 있지만 네 가지와 같은 부정적인 특성은 사람들을 느리고 폭력적이며 의심스럽고 매우 보수적으로 만듭니다.

수비학 5 (5)

우리는 오감(五感)과 오감(五感), 그리고 다섯 개의 꽃잎이 있는 예수나 연꽃의 다섯 상처를 인지합니다. 5는 새로운 것, 탐험되지 않은 것, 그리고 변경 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우주를 상징합니다. 여러 번 오각형은 두 손과 두 발을 가진 인간을 상징합니다. 오각형은 하늘, 땅, 네 가지 기본 점 및 중심점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주인 신회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명상, 종교 및 다재다능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남성 섹슈얼리티의 상징이며, еvеrуthіng에게 끌리지만 іѕ аnуthіng에 의해 개최되지는 않습니다. 충동적이고 대담하며 참을성이 없습니다. 5번인 사람들의 특징적인 특성은 미개척이고 매우 외향적인 것을 아는 데 매우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재다능하고 수완이 있습니다. 그들은 규칙과 법률을 조작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지만 때때로 이것은 그들이 모든 거래의 잭이 되지만 아무도 마스터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섯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후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Graeco-Roman 문화에서 5는 사랑과 연합의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금성을 의미합니다. 힌두 신화에서 5개는 필수 조합을 만들고 5개는 가혹함, 힘 및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이슬람교는 다섯 가지 기본 교리와 이슬람교도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다섯 가지 기둥을 믿습니다.

수비학 6 (6)

6은 완벽한 숫자로 간주되며 David와 결혼의 별과 관련된 숫자입니다. 여섯 аlѕ®는 조화, 안정성 및 균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를 완성하는 데 6일이 걸렸습니다. 6개의 аlѕ®는 행운, 건강, 아름다움 및 기회를 나타냅니다. 주사위는 6면이 있으며 가장 높은 숫자는 6입니다. 힌두 신화에서 인기 있는 태양 바퀴에는 6개의 광선이 있습니다. 6번을 가진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따라서 평화를 즐깁니다. 가치를 존중하고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즐깁니다. Kabbalism 6은 아름다움과 창조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숫자가 완성과 창조의 상징이며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더 밝은 특성의 여섯 가지 특성은 더 어두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완고하고, 비논리적이며, 편협하고 과도한 불안으로 고통받습니다.


수비학 7 (7)

Seven은 일곱째 날, 휴식과 예배의 날, 하나님의 미덕을 기억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하는 날을 생각나게 합니다. 일곱 가지 성사, 일곱 가지 덕, 일곱 가지 죄, 일곱 가지 영의 선물과 같은 다양한 참조가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에는 7개의 가지가 있고 모든 가지에는 7개의 잎이 있습니다. 태양의 일곱 번째 광선은 인간이 죽은 후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불교에서 일곱은 상승의 숫자이고 일곱 단계는 하나가 시간성을 초월하기 위해 취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7은 Fate의 7명의 여사제와 7명의 현자처럼 중요한 숫자입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여섯 마리의 소와 황소가 있습니다. 7은 달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반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아폴로의 악기에는 7개의 현이 있고 판에는 7개의 파이프가 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7은 신비로운 지능을 의미하며 유대 달력에서는 7일의 성일을 의미합니다. 이슬람에서는 7개의 하늘과 7개의 색과 7개의 땅과 바다가 있습니다. 일곱 개의 숫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사적인 사람들이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민감하지만 공개적이지는 않습니다.

수비학 8 (8)

여덟은 부활의 상징이며 낙원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연대와 안정성을 유지하며 첫 번째 큐브이며 루트 구조에서 완벽함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영원, 무한 및 불멸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변환이 시작될 때 반대의 쌍과 비슷합니다. 팔각형은 원형이 되기 위한 정사각형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Fоr ѕоmе іt аlѕо는 리드미컬한 주기를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일의 금식과 엄격한 참회 후에 인간은 8일째에 포만과 만족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불교도들은 8이 완성을 의미한다고 믿고 중국인들은 8이 전체를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여덟은 중생과 중생의 숫자입니다. 이슬람은 하늘과 땅의 고삐를 쥐고 있는 여덟 명의 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일본인은 여덟이 풍요와 풍요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플라톤은 천국의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색상의 8개의 구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8순위를 가진 사람들은 권력, 돈, 성공에 대한 야심 찬 야망을 품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성공이나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권력에 대한 갈증은 그들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만듭니다.

수비학 나인 (9)

9번은 완벽함과 총체성의 숫자입니다. 그것은 지구에 새로운 인간을 데려오기 위해 취해진 기간입니다. 그것은 완료, 성취 및 성취의 삼중 삼중화를 의미합니다. 3과 같은 숫자는 초자연적 인 의미가 있습니다. 0부터 시작하는 숫자 시리즈를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불, 산 및 여성 그룹으로 그룹화 된 남성의 상징과 물 및 동굴과 같은 여성적 인 것을 그룹화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히브리 신앙 아홉은 지능의 상징이며 순수하고 신비롭지 않습니다. Kabbalism에서는 9개가 기초라고 믿습니다.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아홉은 불의 숫자이며, 아그니입니다. 9번의 특징적인 특성은 동료 인간을 섬기고 사회적 대의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입니다. 9번의 연인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관대하지만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성격이 급한 사람들. 그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정서적 안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금 민감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수비학 10 (10)

10은 중생과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운명과 운명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을 향한 영혼의 귀환과 하나가 되는 것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모든 계산의 기초이며 힌두교 우주론과 중국인의 기초 역할을 합니다. 중국어의 경우 셀 수 없는 것, 모든 것의 표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창조의 본보기입니다. 중국 문화에는 십계명이 있고 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에 대한 Aссоrdіng tо 요드의 숫자, 10은 영원한 단어, 신성의 첫 글자입니다. 10가지의 성격 특성은 매우 강력하고 때로는 가려집니다. 그들은 종종 지도자와 개척자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길을 거의 막지 않습니다. 숫자의 부정적인 특성은 완고함, 완고함 및 완고함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비관적이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각 숫자가 제공하는 특성과 기능입니다. 이 정보가 기본 아이디어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지식 상태와 경험의 폭이 기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결정해 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막에 거주하던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수 앞에 서면 그는 분명히 이것은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100년 전에 살던 사람이 오늘의 시대를 바라본다면 이것도 기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초음속 비행기와 거대한 화물선이 바다에 둥둥 떠 다닌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에서 설교하는 것을 한국에서 즉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보다 - 블레포, 호라오, 데오레오, 에이도, 옵타노마이



언어는 그 민족의 독특한 사유의 표현이며, 언어에는 응결된 철학이 들어 있다

우리는 흔히 서양문명과 기독교의 문화 및 사상이 그리스적(헬레니즘)인 것과 히브리적(헤브라이즘)인 것의 역사적 복합산물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스적이고 무엇이 히브리적인가의 정확한 분석은 하지 못합니다.

그리스 사유와 히브리 사유가 하나의 복합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들이 각각의 특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공통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특이성을 찾는 문제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기 전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년 ~ B.C 323년)이 지중해 동부 지역의 여러 나라를 정치·군사적으로 정복함에 따라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리스·로마 사상과 셈족과 고대 근동 중심의 동방사상이 갈등·충돌·융합하면서 약 B.C 320년 ~ A.D 150년 사이에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초기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팔레스타인(Palestine) 유대교의 작은 한 종파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세계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이지만 그들의 생활 기반은 헬레니즘의 세계였습니다.
그 단적인 증거는 신약성서가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언어로 써진 것이 아니라 헬라 세계의 언어인 헬라어로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 15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아람어로써,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토라’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기원전 6세기경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면서 점차 사라져가고, 구약성경을 기록한 고전어로만 존재했고 일상에서는 근동지역의 공동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회당에서 토라를 읽을 때는 같은 구절을 세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랍비는 이미 사어가 된 히브리어로 토라를 한번 낭송하고, 그 후에 유대인들의 구어인 아람어로 번역해서 두 번 낭송합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팔레스타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가 팔레스타인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A.D. 33(30)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 20년이 못 되어서 대략 50년 혹은 51년 사도 바울이 헬라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헬라어로 편지를 씁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 교회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20년 안에, 또는 기독교가 형성된 지 20년 안에 신속한 발전을 거쳐서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적으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그리스어로 무게중심이 바뀌며, 지리적으로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문화적으로는 유대세계에서 헬라세계로 무게중심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오는 신약성서에 담긴 예수님이 어록들은 아람어를 당시 학자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변화는 신학적 사상에 변화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약성서의 세계는 헬레니즘의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히브리적 사유를 모태로 하고 있으며 또한 헬레니즘 세계로 옮겨지면서 그리스적 사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헬라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여러 학자에 의해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특별한 관계가 논의되었는데, 그중에서 노르웨이의 토를라이프 보만(Thorleif Boman)이 쓴『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Hebrew Thought Compared with Greek, 허혁 번역)라는 책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는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를 단순히 외형적인 대립이 아닌 하나의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그리스 사상과 히브리 사상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상과 그리스 사상을 비교하면 매우 대칭적인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평가되어 온 것을 살펴보면 히브리적 사유는 동적으로 정열적이고 힘차며, 때로는 거의 폭발(폭력)적이라 평가합니다.

반면에 그리스적 사유는 정적으로 평온한 것, 조화적인 것을 말함으로써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킵니다.
그러나 동적-정적이란 이 두 형태의 차이를 하나의 완성된 통일성 가운데 파악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히브리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듣는 것을 통해서 진리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적 경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부르는 음성을 경청하는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다’라는 히브리어 ‘샤먀’(shama)와 헬라어 ‘아쿠오’(akouo)는 둘 다 ‘순종’의 의미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하나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 4절의 “들으라 이스라엘”(쉐마 이스라엘)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청종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또한 바로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왜 듣지 않습니까?’는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히브리인들의 사고 유형의 특징은 태생적으로 청자적입니다. 때문에 히브리적 사유는 들음을 통한 철저한 이해의 사유입니다.

반면에 브루노 스넬(Bruno Snell)이 그리스인들을 “눈(eye)의 사람들”이라 불렀을 정도로 그들의 사유는 가시적인 존재에서 출발하는 눈의 사유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고 듣고 순종하는 결단의 실존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파악하는 논리의 실존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실체(현실)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주로 감각기관들, 특히 시각을 통해 수행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이야기하고 서술합니다.
때문에, 그리스 철학의 원리들과 상징들은 시각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헬라 문명의 예술작품들 특히 조각 작품과 건축 문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시각의 의미는 좀 더 깊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감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직관(直觀)이고 관조(觀照)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만물의 원리와 원인으로 말하는 물, 불, 공기, 수, 원자 개념들과 플라톤적 이데아 이념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스어의 진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로 ‘a’는 ‘제거하다’, ‘드러내다’는 뜻이고, ‘letheia’는 숨겨진, 은폐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인들에게 참된 것은 숨겨지지 않은 것, 또는 숨겨진 것,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일을 뜻합니다. 즉 명백하게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처럼 그리스적 사유는 가시적인 눈의 사유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철학자들의 삶은 이론적인 삶이고, 관조적인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 깊이를 꿰뚫고 사물들의 내면성과 그것들의 참 내용 및 핵심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그 사실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헬라 문화에서 ‘본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그저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본질을 본다, 또는 진심을 안다는 의미까지 확장됩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상태, 온전히 연결된 순간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안(肉眼), 심안(心眼), 영안(靈眼)

때문에 헬라어 중에 ‘보다’라는 단어들을 보면, 단순히 ‘보다’라는 뜻을 포함하면서 어떤 것들은 더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 다음의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에이도(εìδω) :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

에이돈// 우리게 보여주어서 보게 되는 것, 누가보여주시나?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보여주신게 있다. 그게성전이다. 그게 시청각교재다. 이역사에서 하나님이 "에이돈"해주신교보재이다. 문자가 보편화되기전 즉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이 성전을 주셨다. 사람은 그 성전을 "옵타노마이"로 본다. 이걸 즉 성전을 자기식으로보니 그게 우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옵타노마이"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이단계의 사람들중에는 대표적인 사람이 종교적 수준의 사람이다.

옵타노마이로 본 그대로 판단하는 것을 [에이도].

옵타노(óπτάνω) : 눈에 보이는 대상을 내 관점, 내 시각으로 해석해서 보는 것.

옵타노마이//내 마음대로, 내 시각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본다. 옵타노마이 중심은 사람이다. 안목의 정욕, 인간의 성정으로 보는

그냥 응시하는 단계를 [옵타노마이],

데오레오(θεωρέω)
: 본질과 목적에 대한 바람 봄, 뚫어지게 보다 매우 자세히 관찰한다 할 때 사용.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는 것을 [데아오마이],

블레포(βλέπω)
:
주의 깊게 살피거나 생각하고 끌어오다.
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한 대상만 보다.
경험 등을 통해 보는 능력.
알아차리는 것.
주의하여 보는 것을 의미.

블레포 : 내가 경험하여 아는 것(만져보고, 먹어본 후에)
경험과 마음으로 알게 된 것을 [블레포].

호라오(óράω)
: 진리의 눈으로 사물 너머의 것을 보는 것을 의미.
상황을 통해 실체를 아는 것,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는 것, 예언적으로 보는 것, 영적으로 깨닫는 것에 쓰임.

호라오// 마지막 단계의 봄. "호라오"는사람의 마음으로 눈으로 귀로 듣고 보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을 "호라오"한다.라고 한다. 이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진리의 눈으로 너머의 것을 보는 것을 "호라오"라고 한다.

그 의미까지를 깨달아 완전하게 알게 되는 것을 [호라오]라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으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것임이요."

물론 히브리어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의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보다’라는 표현 중에는 ‘라아’는 보다, 바라보다, 알다, 인식하다, 이해하다, 배우다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며, 동일하게 ‘감찰하다’(보살피다) 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이 ‘보다’라는 의미는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표상에 결부시킵니다.


רָאָה 스트롱번호 7200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발음 [ râʼâh ]
구약 성경  / 1299회 사용

가시적인 사물들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의 소유자 혹은 제작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고, 이 표지를 발견한 사람은 그 사물을 똑바로 본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었을 뿐 아니라 ‘보기도’했다(왕상10:4)는 것과 욥이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고백은 바로 그러한 표현입니다.

그런 점에서 작년 12월에 개봉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보는 것을 통해 실재를 체험하는 듯한 3D 기술의 영상 효과와 HFR(High Frame Rate)를 통해 시각효과를 극대화한 것과, 1편에서와 같이 “I see you”라는 대사를 만나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시각에 대한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구 문화의 한 단편을 영화로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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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블레포 데오레오 호라오, 에이도, 옵타노마이

βλέπω 스트롱번호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발음 [ blĕpō ]
관련 성경 / 
보다(마5:28, 눅6:41, 요1:29), 보게 되다 (마12:22), 뵙다(마18:10), 주의하다(마24:4, 막8:15, 눅21:18), 삼가다(막4:24, 눅8:18), 보이다(막8:23), 조심하다(막13:9, 고전8:9), 돌아보다(눅9:62), (눈이)밝아지다(요9:7).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1. 구경하다.  2. 깨닫다.  3. 요 14:17,19
발음 [ thĕōrĕō ]
관련 성경 /
바라보다(마 27:55, 막 15:40), 보다(막 3:11, 눅 10:18), 구경하다(눅 23:35, 계 11:12), 생각하다(히 7:4).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1:22
발음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관련 성경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행 1:3.
발음 [ ŏptanŏmai ]
관련 성경 /
보다(마 5:8, 눅 13:28, 행 2:17), 보이다(마 17:3, 행 7:30, 고전 15:5), 나타나다(막 9:4, 눅 1:11, 행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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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블레포. 991)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한은 무덤‘보다’라는 헬라 단어는 ‘블레포’라고 합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데오레오. 2234) 세마포가 놓였고.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된 헬라 단어는 ‘데오레오(2234)’입니다.
데오레오는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게 보는 것을 ‘데오레오’라고 한다.

요한복음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호라오. 3708) 믿더라.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호라오’이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호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봄’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봄’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호라오. 3708)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호라오. 3708)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

에이도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

데아오마이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

블레포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요1:18).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이고(갈 2:20),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인 것이다(요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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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인식)과 ‘지식’과 관련된 신약의 헬라어 단어 정리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두 언어에 담긴 특징을 알면 성경을 보다 깊이 인식할 수 있는데,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호흡으로 기록된 것이며(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given by inspiration of God/ θεόπνευστος 데오프뉴토스 ; 하나님의 숨, 호흡), 또한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기록이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한 증거의 두 판을 받은 것으로 상징되듯이,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준 말씀이다.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주어졌고 또한 권위를 나타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후대에 읽기를 위해 모음을 붙이고 띄어쓰기와 장 절을 나누었다.

반면 신약의 헬라어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생으로 오시고 과정을 거치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을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글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달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의 마지막이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인 것이다.

주의 다 이루심은 인자로서 자신 안에 우리와 온 우주와 그 모든 변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기록한 헬라어 역시 그 어떤 언어보다 가장 정교하고, 예수의 그 이루심을 다 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보는 것(인지)과 지식에 관련되는 단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유는 단어 해석에 있어 인지와 지식을 혼동해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또 같은 부류에 속더라도 단어에 따라 그 영적 의미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욥기 42:4-6
4.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Ⅰ. 보는 것(인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헬라어

➀ ὀπτάνομαι(3700) 옵타노마이

◾ 보다, 나타나다 등, 이 단어는 어떤 대상이 시각적으로 나타나거나, 인식되는 것을 나타내며, 시각적으로 평가되는 상황이나 대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행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being seen)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➁ θεάομαι(2300) 데아오마이

◾ 데아오마이는 눈여겨보고 주의를 기울이며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7: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➂ βλέπω(991) 브레포

◾ 눈으로 보다, 식별하다, 살피다, 관찰하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➃ ὁράω(3708) 호라오

◾ 눈으로 보아서 깨달아 알다(to see with the eyes i.e. become acquainted with by experience),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의미를 분별하다(gives prominence to the discerning mind)

◾ ‘호라오’는 눈으로 보고, 그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에 속하지만 지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경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타인과 공유가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No man hath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 성경은 본래부터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다로스 καθαρός)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으로만 깨끗해질 수 있다(요 15:3).

우리는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 자가 되어야 한다.

Ⅱ. 앎(knowledge)과 관련된 헬라어 단어

➀ εἴδω(1492) 에이도

◾ 보다(to see), 알다(to know)

이 단어는 새로운 정보나 인식을 가지는 것을 나타내며, 지식이나 인식을 가진 상태로 이해함을 의미한다.

◾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에이돌론 εἴδωλον’(우상)이다. 곧 표피적으로 나타나고 느끼는 것을 보고 그것을 그대로 실체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을 우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을 만들어 섬겨야만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붙잡는 모든 관념도 우상에 속한다.

요한일서 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➁ ἐπίσταμαι 에피스타마이

◾ 이해하다. 어떤 알려진 것에 근접하여 얻게 된 지식을 의미한다.(a knowledge obtained by proximity to the thing known, cf. our understanding)

사도행전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➂ συνίημι(4920) 수니에미

◾ 이해하다. 이 단어는 지성적인 처리와 깊은 이해를 통해 특히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이해를 강조하며, 지식을 습득하거나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로마서 3:10, 11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➃ γινώσκω(1097) 기노스코

◾ 알다. 이 단어는 개인적 경험에 기초를 둔 지식을 의미한다(a knowledge grounded on personal experience). 따라서 ‘기노스코’의 지식은 공유가 되지 않는다. 이 단어와 대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야다 יָדַע’이며 성경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구절은 창 3:5이다.

누가복음 3: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히브리서 10:26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걷는 길은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길이 아니다.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가는 길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헛되게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값을 치르고 카이로스의 날을 구속해야 한다.
‘호라오’로 보는 것과 ‘기노스코’의 지식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공유할 수 없다.
오직 어린 양이, 기름 부음이 열어주고 또 부어줄 때 가질 수 있다.
가난한 마음으로 주께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깨끗하지 못하면 보지 못한다.
종교가 아닌 생명과 진리의 코이노니아는 같은 것을 가진 사람끼리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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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이라고 번역이 되는 [에피두미아]​ 라는 단어는

ἐπιθυμ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939

1. 욕망
2. αἱ περὶ τὰ λοιτὰ ἐ. : 다른 것에 대한 욕망
3. ἐ
발음 [ ĕpithümia ]
어원 / 1939에서 유래
 ἐπί 스트롱번호 1909

1.㉠ ~을 다스리는
발음 [ ĕpi ]

 θύω
스트롱번호 2380

1. 희생하다.  2. 잡다. 3. 마 22:4
발음 [ thüō ]


[두메오]라는 단어는 '희생제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고,
​그 단어의 명사형이 [뚜미아], 희생제사예요.
거기서 나온 단어가 [두모스], 탐심, 욕망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열심히 희생제사를 반복하여 드리고자 하는 게 선악과 따 먹은 아담들의 탐심이요 욕망이라는 거예요.
그게 정욕이라고 합니다.


ἐπιθυμητής, οῦ, ὁ 스트롱번호 1938

1. 바라는 사람.  2. 욕심내는 사람. 3. 고전 10:6.
발음 [ ĕpithümē- tēs ]
어원  / 1937에서 유래

1. 바라는 사람, 욕심내는 사람, 고전 10:6.
관련 성경 /
즐겨하는 자(고전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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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πάτη, ης, ἡ 539 [apatē]
  • 1.

    쾌락, 육욕, 정욕[특히 죄가 수반되는], 막4:19, 벧후2:13.

  • 2.

    속임, 현혹, 사기, 기만, 허위, 마13:22, 막4:19, 엡4:22, 골2:8, 살후2:10, 히3: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정욕, 롬7:5.

  • 2.

    고난, 고생, 불행, 롬8:18, 고후1:6, 딤후3:11, 벧전5:9.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ιθυμία, ας, ἡ 1939 [ĕpithümia]

  • 1.

    [나쁜 뜻으로] 욕심, 욕정, 롬7:7이하, 골3:5, 약1:14이하, 벧후1:4.

  • 2.

    욕망, 동경, 사모함.

  • 3.

    [중성의 뜻으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이리들의 탐욕하는, 굶주려 있는, 욕심 많은, 마7:15.

  • 2.

    [명사] ὁ ἅ..: 강도, 사기꾼, 탈취자, 눅 18:11, 고전5:10, 6:10.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ιθυμέω 1937 [ĕpithümĕō]
  • 바라다, 동경하다, 행20:33, 딤전3:1, 욕심을 품다, 마5:28, 13:17, 눅15:16, 16:21, 17:22, 롬7:7, 13:9, 고전10: 6, 약4:2, 벧전1:12, 계9:6, [주] ἐπιθυμίᾳ ἐπιθυμεῖν: 간절히 열망하다, 눅 22:15, 갈5:1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φιλάργυρος, ον 5366 [philargurŏs]
  • 돈을 좋아하는, 돈을 사랑하는, 욕심 많은, 눅16:14, 딤후3: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πλεονέκτης, ου, ὁ 4123 [plĕŏnĕktēs]
  • 욕심꾸러기, 탐심 많은 사람, 고전5:10, 6:10, 엡5: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περί 4012 [pĕri]
  • 1.

    ~에 대한, ~에 관한. αἱ. π. τὰ λοιπὰ ἐπιθυμίαι: 재물에 대한 욕심, 막4:19, 빌2:23, 딤전6:21, 딤후2:18, 딛2:7.

  • 2.

    [속격지배, 어떤 행동과 사물이나 사람의 관련됨을 표시]

  • 3.

    [어떤 말이나 글로 된 표현과 그 평가를 나타내는 정신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 뒤에서] ~에 대하여. δοκεῖ περὶ τοῦ Χριστοῦ τί ὑ- μῖν: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22:42, 18:19, 요7:1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θυμός, οῦ , ὁ 2372 [thümŏs]
  • 1.

    열정, 욕정, 열망, 계14:8, 16:19, 18:3.

  • 2.

    분노, 진노, 계12:12, 14:10.

  • 3.

    [하나님에 대하여] 롬2: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욕정, 롬1:26, 골3:5, 살전4:5.

  • 2.

    수난, 고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나쁜 뜻으로] 욕심, 욕정, 롬7:7이하, 골3:5, 약1:14이하, 벧후1:4.

  • 2.

    성적 욕정, 살전4:5, [παθήματα와 함께] 갈5:24, 벧전4:3.

  • 3.

    욕망, 동경, 사모함.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διά 1223 [dia]
  • 1.

    율법으로 말미암은 욕정, 롬7:5. 믿음의 법으로, 롬3:27, 갈2:19. 기타, 롬1:12, 3:22, 7:8,11, 고전1:21, 4:15, 히7:11, 갈2:16.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롬15:32. 하나님의...

  • 2.

    ~을 통하여.

  • 3.

    [속격지배]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사도행전 3:1-10






에이도(εἴδω. 1492)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에이도)  구걸하거늘.

블레포(βλέπω. 991)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아테니조. 816) 가로되 우리를 보라(블레포. 991) 하니.

블레포는 육적인 눈으로 본다는 의미로 쓰이고,
호라오는 물리적으로 보는 이외에도 이해, 인식, 통찰, 그리고 영적인식이나 지적시각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됩니다.


에페코(ἐπέχω. 1907)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프로스도카오. 4328) 보거늘(에페코. 1907)

호라오(ὁράω. 3708)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호라오. 3708)

성경을 보면 특별한 기사와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평범한 일상 중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닌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 갑자기 일어난 것입니다.
목사의 모든 일과와 숙제는 거의 주일에 맞추어집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말씀을 구하는 이유도 주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소원하는 바는 그 주일이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전 주에도, 그리고 그 전주에도 그래도 오늘 만큼은 평범한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설령 오늘 특별한 만남과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분명히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 날 것입니다.
이왕이면 오늘이 그날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인생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는 그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읽은 본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거지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일어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4장 22절에 보면 나이를 40여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말해주는 그가 지난 40 여 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그 곳에 앉아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고 또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도 그것뿐이라는 절망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성전에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문 앞이었습니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길 미문은 황동으로 겉 문을 하고 금과 은으로 덧씌운 2 중문의 구조였다고 합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이토록 화려한 성전 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거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극과 극을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몸가짐과 깨끗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큰 복을 기대하며 그 문을 통과해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죄 사함의 기쁨과 응답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미문의 화려함과 함께 그 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생명의 활기와 기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앉은뱅이는 40 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40 년 동안 가장 아름답고 복된 장소에 있으면서도 그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미문을 들어 가본적이 없습니다.
병자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유대의 율법에 따라 그는 그 자리에 고개를 쳐박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운 미문은 결코 아름다운 미문이 아닌 고통의 문이요 저주의 문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활력과 생명의 장소지만 그는 그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40 여 년 동안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날도 별 다를 것이 없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시간부터 누구가가 던져 줄 돈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날이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습니다.
3시와 9시 기도가 지나고 해가 중천을 넘긴 오후 제 9 시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9시면 오후 3시입니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3절을 봅시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에이도)  구걸하거늘.

거지가 먼저 봤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원어로 에이도입니다.
에이도는 see 그냥 보다는 뜻입니다.
그냥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의미없이 목적없이 본 것입니다.
흐리멍텅한 눈을 뜨고 늘 하던 대로 “ 불쌍한 사람에게 한푼 주십쇼 ” 하고 구걸하기 위해 본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 거지의 요청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도 그에게 시선을 줍니다.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아테니조. 816) 가로되 우리를 보라(블레포. 991) 하니.

보라 - 블레포(look straight).  집중하라, 경험하여 알라
주목하여 - 아테니조

ἀτενίζω 스트롱번호 816

1. 주목하여 보다.  2. 눈 여겨 주시하다. 3. 유심히 보다
발음 [ atĕniz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ἠτένισα, 1[연합불변사]과 τείνω ‘내뻗치다’의 합성어에서 유래
  • 1.  주목하여 보다, 눈 여겨 주시하다, 유심히 보다, 눅4:20,22:56, 행1:10, 3:4,12, 6:15, 7:55, 10:4, 11:6, 13:9, 14:9, 23:1, 고후3:7,13.
  • 관련 성경
    주목하다(눅4:20, 행3:4, 고후3:7), 자세히 쳐다보다(행 1:10).


 
거지는 베드로를 건성으로 봤지만 베드로는 거지를 응시했습니다.
에이도는 보지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상태요 블레포는 대상을 확실히 보고 그것을 틀림없이 경험하여 알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블레포 할 때에 드디어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사람의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눈 앞의 것만 보는 육신의 눈(肉眼)
또 하나는 마음의 눈(心眼)
그리고 영적인 눈인 영안(靈眼)
그냥 씨하면 마음의 눈은 열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블레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 look at)말합니다.

이것도 블레포 하라는 말입니다.
블레포의 또 다른 뜻은 ‘마음의 눈으로 보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신들을 보라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눈을 보라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을 뜨라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불행하게 되는 것은 좋은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마음의 문제요, 바라봄의 문제에서 영향을 받는다 합니다.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라는 곡은 두시간 짜리의 대작입니다.
그 엄청난 곡을 헨델은 병상에서 죽어가며 열흘 만에 썼습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병석에서 하나님께 블레포했을 때 음악사에 길이 남는 대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역사 드라마 왕건에서 보면 궁예가 애꾸눈이었습니다.
영국의 해군 제독 닐슨도 애꾸였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하니발도 애꾸눈이었습니다.
이들은 애꾸눈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명장들이었습니다.
세계 3 대 서사시를 쓴 호메로스와 밀턴과 단테, 이 세 사람은 모두 맹인들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잘 보이거나 조건이 좋아 이른 업적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과 상관없이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블레포하면 소중한 것이 보입니다. 블레포하면 사랑이 보입니다. 부모를 향해 블레포하면 부모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부부가 블레포하면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삶의 위기는 환경보다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짜 위기는 영적 침체요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어느 시대보다 번쩍 거리며 발전하고 삶은 윤택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멀어졌습니다. 아름다운 황금 빛 문에 소중한 것들이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늙은 부모들이 버려지고 소중한 가정들이 깨지고 있습니다. 결국 원망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부모와 자괴감으로 고통받는 이혼부부와 비관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영적 앉은뱅이요 거지가 널려 있습니다. 육신의 배부름 속에 사랑의 배고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거지 앉은뱅이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신의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감동과 소망이 꺼져버린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기대가 없습니다. 기대라고 한다면 오직 한푼 얻어 목구녁에 빵 몇 조각 밀어 넣는 창자가 채워지는 것 뿐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이런 마음의 장님인 그를 블레포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블레포 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 엔진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엔진은 잘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엔진이 어디입니까 ? 마음입니다. 마음의 엔진이 잘 돌면 뜨겁습니다. 마음이 식어진 예배는 곤욕입니다. 마음이 식어진 기도는 미신입니다. 마음이 은혜로 뜨거워졌을 때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은 마음의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블레포 마음의 눈을 뜨라, 나를 쳐다보라 , 마음으로 기대하라!

그러자 5절을 봅시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프로스도카오. 4328) 보거늘(에페코. 1907)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돈밖에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소경 사이에는 굉장한 간격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쳐다보라는 것은 돈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지 앉은뱅이는 돈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서로의 요구와 필요가 다릅니다. 이것도 극과 극입니다.

베드로가 보라 그랬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요 ? 베드로 자신의 행색일까요 ? 그도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베드로가 요구하는 블레포는 자신 안에 계신 어마 어마한 분이셨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세요, 어마 어마한 분이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대하세요, 하나님 주실 은혜를 기대하세요,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속상한 모든 것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요. 엄청난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도 못한 굉장한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가 블레포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고 눈을 들었습니다. 어째든 두 사람의 시선이 블레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기대하고 눈을 들었던 거지에게 베드로는 돈부터 없답니다. 기대하고 쳐다봤는데 “ 나 돈 없다 ” 약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딴게 있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니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무조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돈은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은 얼마 전에 죽은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으로 걸으라 명령하고는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고 걷고 뛰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시선이 블레포하고 짧은 말이 선포된 것뿐인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앉은뱅이였던 그가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났다는 사실 뿐입니다.
20 년 전 군에 입대했을 당시 훈련소에서 친척중에 군대나 정부기관에 고위직이 있으면 적어 내라고 합니다.
고위직의 줄이 있는 사람들은 좋은 곳으로 자대 배치받고 비교적 군 생활이 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날 동기 하나가 적어 내지 않고 머뭇거리며 소대장에게 ‘이런 분의 이름도 적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하고는 상관없지만 소대장님이 아실만한 분이라서 적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소대장이“ 누군데 ”그랬더니 저희 큰 아버지 성함이 “ 최규하 쓰십니다. ”
그 날부터 훈련도 안시킵니다.
얼 차례도 다 빼주고 훈련병 때는 면회도 안 되는데 가족 면회까지 시켜 줍니다.
그리고 더 기막힌 것은 제가 대대 선임이어서 훈련 마치면 받기로 되어 있던 29 연대 연대장 상을 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상 받으면 자대 배치 받고 2박 3일 포상휴가거든요.
전직 대통령의 이름은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은 비교할 수 없는 파워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생사를 가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실력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절대적인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먹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이름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가 복종하며 영적 세계도 굴복하는 위대한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중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냉냉한 심령으로 이 곳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십니까? 사업이 어려우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업아 일어날지어다. 몸이 병들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의 고통에서 일어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살아나고 우리 가정들과 사업이 이 일을 위해 일어날지어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5절을 보면 앉은뱅이가 바라보았습니다.

보라 해서 본 것입니다. 블레포 하라 했으면 블레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 바라보거늘 ” 이 단어는 불레포가 아닙니다. 룩 엩이 아닙니다. 블레포가 아닌 다른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원어로 에페코라는 단어가 쓰여졌고, 영문으로 보면 give attention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에페코라는 단어의 의미는 못 떠나게 굳게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용어를 확실하게 정리를 해 보십시다.
헬라어에서 본다라는 단어가 3가지가 있는데
그냥본다는 에이도가 있고
집중해서 본다는 블레포,
그리고 마음안에 꽉 붙잡아 둘 정도로 본다는 에페코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블레포하라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거지는 돈을 얻을까하여 블레포했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짧은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시선 속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시선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거지 앉은뱅이에게 마음의 눈이 열린 정도가 아니라 또 다른 눈인 영안이 열려 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시선을 발견한 앉은뱅이는 그 짧은 순간 예수님의 시선을 블레포한 것이 아니라 에페코 한 것입니다.

주목한 정도가 아니라 굳게 붙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못 떠나게 굳게 붙잡다’는 에페코를 써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 보거늘’ 예수님의 시선을 절대로 놓칠 수 없도록 자기의 마음에 꽉 붙들어 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잡힌 오른 손도 더 이상 베드로의 손일 수 없었습니다. 그 손은 앉은뱅이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손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과 그 분의 피 묻은 손에 잡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한없이 따뜻한 생명의 시선을 주지 않았던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선행된 시선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시선이 떠나지 않도록 꽉 붙잡는 것입니다.

따스한 햇볕같이 쏟아지는 주님의 시선에 인간이 에페코 할 때 평범한 일상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 때 마다 저를 블레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 만큼이나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를 블레포 하지 마시고 저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평범한 예배가 여러분 각자에게 놀라운 체험과 기적을 만드는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복잡한 인생길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해결의 열쇠를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능키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께 에페코하면 그것으로 인생은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즘 다 차를 몰고 다니는데요. 차를 다 아는 사람만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도 운전 잘합니다.

저희 아내는 자동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동키면 가는 줄 알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줄만 압니다.

자동차의 원리나 구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을 잘 모릅니다. 인간관계도 잘 하지 못합니다. 말 주변도 없습니다. 소심합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대속이 뭐고 삼위일체가 뭐고 은혜 언약이 뭔지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수님께 에페코 하면 받드시 복을 받는다. 믿음 생활 잘하면 복을 받는다.’ 이것만 붙들면 됩니다.

대구 서부 교회에 아멘 교수로 불리는 조동식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답니다.
그 분의 어머니께서 큰 며느리를 보시던 해가 마흔 다섯 이었답니다.
구역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께서 며느리에게 축복하기를 “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아들 낳기를 축원합니다. ”하더랍니다.
그럼 아멘해야 잖아요.
그런데 이 며느리가 아멘을 안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꾸 눈짓을 하는데도 안하는 겁니다.
그러자 다급한 시어머니께서 대신“아멘“해 주었는데 그만 시어머니가 임신을 해 가지고 늦동이를 나았답니다.
그 목사님이 축복한데로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머리를 가진 교수 조동식 집사가 태어난 겁니다.

신앙을 머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에페코 하면 그대로 되는 줄 믿습니다. 

앉은뱅이가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

8절을 보세요.
성전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호라오. 3708)

하나님을 찬미하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에게도 드디어 미문이 아름다운 문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건축물인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 주께서 이곳에 계신 여러분을 뜨거운 사랑과 생명의 눈으로 응시하고 계십니다.
자기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며 마음의 눈이 먼채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블레포 할 것을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밀려나 영적 앉은뱅이로 주저앉은 그 다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려고 피 묻은 손으로 우리 손을 잡으려 하십니다.
그 분을 향해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그 분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까 ?
활짝 열린 축복의 성전을 향해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찬양하며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
참된 생명도 , 참된 사랑도, 참된 능력도, 참된 위로도, 참된 소망도, 참된 성공도 오직 그 분께만 있습니다.
이 시간 나를 위해 피흘려 주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시선에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저를 블레포 하십시오.
look at me , 믿음의 눈을 열어 저를 보십시오.
그리고 저를 통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십시오.
굳게 잡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잡으셨습니까 ?
이제 선포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정과 사업이 불 같이 일어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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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블레포 데오레오 호라오

5절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의 수의를 보았다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블레포’입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로 밑의 6절에 보면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는 ‘데오레오’입니다. 그 말은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데오레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오라오’입니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호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 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봄’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봄’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요4:48)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확인 도장을 찍고 가지요.

(요11:40)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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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요 5:39. 딤후 3:16-17.


설교는 "성경에서 예수가 걸어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Preaching is about making Jesus walk out of the Bible.

우리는 예수만 보기를 원합니다!
We want to see only Jesu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에서 영생을(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요한복음 5:37-38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And the Father who sent me has himself testified concerning me. You have never heard his voice nor seen his form,
nor does his word dwell in you, for you do not believe the one he sent.

성경(1124)

γραφή, ῆς, ἡ 스트롱번호1124

1. 기록된 것
2. ἡ γ
3. 성경전체.
발음 [ graphĕ ]
어원 / 112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경(마21:42, 요2:22, 고전15:3, 약2:8, 벧전2:6, 벧후1:20), 글(마26:56, 행8:35, 롬16:26), 말씀(약4:5).



상고(2045)

ἐρευνάω 스트롱번호2045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찾다
2. 추적하다
3. 조사하다
발음 [ ĕrĕunaō ]

뜻풀이부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 살피다, 요5:39, 7:52, 롬8:27.

관련 성경 /
생각하다(요5:39), 상고하다(벧전1:11), 살 피다(롬8:27), 통달하다(고전2:10).



증거(3140)

μαρτυρέω 스트롱번호3140

1. 증언하다.  2. 입증하다. 3. 유리하게 증언하다
발음 [ martürĕō ]

뜻풀이부

  • 1. [능동태]
    • a. 증언하다, 증인이 되다, 요15:27, 행26:5, 히11:4.
    • b. 입증하다, 언명하다, 선언하다, 확증하다, 요3:11, 19:35, 행23:11, 계1:2.

    • c. 유리하게 증언하다, 눅4:22, 요3:26, 행13:22, 14:3.
  • 2. [수동태]
    • a. 증거를 받다, 입증되다, 롬3:21, 히7: 8,17.
    • b. 인정되다, 칭찬받다, 행6:3, 딤전5:10, 히11:4.
  • 관련 성경 / 
    증명하다(마 23:31), 증언하다(눅 4:22, 요일 1:2), 경계하다(살전 2:12), 칭찬하다(행 10:22).


얻는 줄

ἔχω 스트롱번호2192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
발음 [ ĕchō ]
관련 성경 / 
잉태되다(마1:18), 잉태하다(마1:23), 입다(마3:4), 얻다(막3:29), 들리다(마11:18), 생기다(마13:27), 차지하다(마14:4, 눅19:17), 가지다(마18:8,9), 여기다(마21:26), 알다 (마21:46, 몬1:17), 요구하다(마26:65), 지피다(막3:22), 배다(막13:17), 다하다(막14:8), 쓰다(요13:29), 기다리다(요16:30), 부리다 (계18:19). [명] 소유(마13:44,46).




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
2. '그라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2) '그레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every)을 의미한다(Bernard, Simpson, Guthrie).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 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 교육하기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는 '모든 삶 가운데 어린아이를 올바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교훈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5:17).

󰃨 책망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그몬'(*)은 '유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Lenski)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시사한다(엡 5:18;딛 2:15).

󰃨 바르게 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노르도신'(*)은 '추를 바로 세우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잡고 그들이그 길로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시사한다(단 12:3;요 21:15-17).

󰃨 의-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법률적인 용어로 '엄격한 정의'(正義)를 뜻한다.


본절은 접속사 '히나'(*, '...하기위해')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의 4개의 항목으로 교육한 결과임을 시사한다(Lenski).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Hendriksen).
2.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교사들을 가리킨다(딤전 6:11, Guthri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선지자에게 적용되었다.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사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선포해야 한다(Scott).
한편 '온전케 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오스'(*)는 '아로'(*, '적합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완전히 적합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사는 성경 즉 말씀을 통해서 그 사역에 완전히 적합한 일꾼으로 변화된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한 또 다른 결과이다.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엑세르티스메노스'(*)는 '완전히 구비된', '완전히 공급된'이란 의미로 '아르티오스'와 어원은 같으나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을 받아서 '모든 선한 일'(2:21;딤전 5:10;딛 3:1)을 행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변화됨을 시사한다.







βίβλος, ου, ἡ 스트롱번호 976

1. 책.   2. ‘성경’  3. 생명의 책
발음 [ biblŏs ]
어원  / 본래 의미는 파피루스 식물의 내부 ‘껍질’[즉, 종이 또는 책의 두루마리를 가리킴]

뜻풀이부
1. 책.
2. ‘성경’, 마 1:1, 막 12:26, 눅 3:4, 20:42, 행 1:20, 7:42.
3.  생명의 책, 빌 4:3, 계 3:5, 13:8, 20:1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계보(마 1:1), 책(막 12:26, 행 7:42, 계 20:15), 시편(눅 20:42, 행 1:20).



















대한민국을 낳은 국제회의 - 1948년 제3차 파리 유엔 총회 南北 격전 속…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48개국의 찬성표


대한민국을 낳은 국제회의 - 1948년 제3차 파리 유엔 총회
南北 격전 속…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48개국의 찬성표

이승만, 파견대표단에 장면 등 임명… 로마교황청도 지원

"북조선에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명했다.
1946년 2월 북한에 실질적 정부인 북조선 임시위원회가 들어섰다.
남북 통일정부 수립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분단 고착화의 주범은 소련이었다.
넉 달 뒤인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과도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撤退)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말한 '세계 공론'은 유엔을 통한 한국 문제 해결을 뜻했다.
그해 12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지론을 알리는 데 온 힘을 다했다.

1948        3
1948년 대한민국 승인을 얻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대표단.
아래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진구. (운석장면기념사업회 제공)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 냈다.
미국이 소련과의 협의가 아니라 유엔을 통한 한국 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때는 1947년 9월이었다.
두 달 뒤인 11월 14일 제2차 유엔총회는 남북한 동시 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소련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방북을 막았다.
북한에서는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군이,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되는 등 단독정부 수립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남한만의 총선 실시를 결의했다.
7월 20일 5·10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8월 11일 장면이 이끄는 제3차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을 임명했다.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되기 4일 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유엔 승인 획득 전략은 치밀했다.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하는 우방을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가톨릭 교단을 대표해 정계에 진출한 장면을 수석대표로 보내 세계 외교가의 ‘보이지 않는 손’ 로마 교황청의 지원을 얻게 했다.
각국 대표를 설득하는 데 여성의 역할이 크다고 판단해 모윤숙·김활란 두 여성 대표도 포함했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은 중대한 과제였다.
1948년 8월 23일 한 미국 신문(US뉴스&월드리포트)은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과 북한의 정당성을 가르는 격전장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박사와 그의 정부는 8월 15일 미국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으며,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8월 25일 ‘선거’를 치를 예정이다.
한반도 문제는 9월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회부된다.
유엔이 이 박사의 정부를 인정하고, 소련에 대해 그들이 통치하는 북한이 남한과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할 때 결말이 날 것이다.’

1948 3
1948년 제3차 유엔총회가 열린 프랑스 파리 샤요궁.
에펠탑 맞은편에 있다.

1948년 9월 21일 오후 3시 30분 프랑스 파리 샤요궁(Palais de Chaillot)에서 유엔총회는 개막됐다.
샤요궁은 파리 중심부 센강 북쪽 강변에 에펠탑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름과 달리 군주가 살던 궁궐은 아니다.
1937년 세계박람회장으로 세워졌지만 거대 건축물을 궁(Palais)으로 칭하는 프랑스의 관례에 따라 궁으로 불린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제3차 유엔총회의 흔적은 없었다.

1948년 12월 12일 총회서 '48대 6' 대한민국 승인 가결

한국 문제 안건은 제3차 유엔총회 회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2월에 들어서도 상정될 기미가 없었다.
장면 등 우리 대표단은 각국 대표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원을 호소했다.
12월 6일 회기 종료 6일을 앞두고 총회 상정을 위해 넘어야 하는 관문인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되기 시작했고 한국 대표 초청 동의안도 채택되었다.
다음 날 대표단원들은 옵서버석(席)에서 내려와 1층에서 대한민국 승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수석대표 장면의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12월 8일 제1위원회는 한국독립승인안의 총회 상정을 결정했다.
마침내 12일 12일 일요일 오후 5시 15분 대한민국 승인과 신(新)유엔한국위원단을 파송해 통일을 도모할 것을 결의하는 미국·중화민국·호주의 공동 동의안이 48대6(기권1)으로 가결됐다.
반면 이에 대항해 소련이 상정한 5·10 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의 해체 동의안은 46대 6(기권3)으로 부결됐다.

    12 12      48  6  1  3
장면 수석대표의 수첩 메모.
12월 12일 기록에 ‘한국 문제 표결.
찬성 48, 반대 6, 기권 1(스웨덴), 결석 3’이라고 썼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거둔 승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물론 1919년 파리강화회의 회의장에 우리 대표는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당시 우리 손을 잡아 준 우방은 없었다.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1943년 카이로회담, 이를 재확인한 1945년 포츠담회담에도 우리의 의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그러나 67년 전 그때는 달랐다.
미국과 로마 교황청은 물론 프랑스, 중화민국, 필리핀 등 자유 진영의 전폭적 지지와 후원을 이끌어 냈다.
1948년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은 1905년 이래 이승만이 꾸준히 전개한 외교 독립운동의 최종 승리였다.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한 세기 전 서구 열강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 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결정에 비춰볼 때,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다. 이때 얻은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킨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었다. 오늘 우리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커졌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가 우리의 명운을 갈랐던 건국과 호국(護國)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강대국의 이익이 충돌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은 우리에게 야누스의 두 얼굴로 다가온다.
해방의 기쁨도 주었지만 분단의 고통도 준 까닭이다.
그러나 3년 뒤 탄생한 대한민국은 역설의 역사를 썼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해 기적을 일군 혁명적 변화의 싹은 그때 움트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인구 5000만 이상 나라 중 국민소득 3 만달러가 넘는 일곱째 국가로 ‘5030클럽’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67년 전 유엔 총회는 남북통일을 이룰 책무도 결의했다.
북녘에도 자유와 풍요의 빛이 깃드는 날이 ‘완전한 광복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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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할 민족의 영웅 안중근 - 미주 한국일보

가끔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포로 생활때에 바빌론 강가에서 망국의 한과 귀환을 기다리며 부른 원곡을 1972년 자메이카 그룹인 부르다가, 1978년 독일 그룹인 보니 엠이 리메이크하여 경쾌하게 불렀다는 ‘River of Babylon’과 바빌론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된 이스라엘 민족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예들의 처참한 모습을 담은 오페라[나부코]를 들으면서, 미국 땅에 디아스포라나 글로벌 노마드로 살면서 나에게 민족과 국가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구한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전개되었던 지각 변동에 대하여 보자. 서양의 개화문명과 수구문화 사이에 문호개방과 위정척사라는 국가의 외교적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에,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 1882년 임오군란과 제물포 조약,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4년 동학혁명, 1894-5년 청일전쟁, 1897년 대한제국, 1905년 일본제국주의 조선통감부 설치와 외교권 박탈, 1910년 한일 강제 합방 등... 당시 조선 반도는 강화도 조약이후에 조선 정부의 무능함과 내부분열, 호시탐탐 노리는 외세에 의해 30여년 만에 굴욕적인 국권 침탈을 당하는 한일합방이 되어버렸다.

당시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서양의 근대화의 길에서 산업장려와 국부를 쌓아가며 주위 나라에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북간도 지역을 진출하려는 때에 장애가 된 조선을 복속하는 일이 급선무이었다.

그 주역을 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그는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여세를 몰아 조선반도에서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대한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1905년 을사늑약 조인을 고종에게 강요하고, 임금을 강제 폐위시켰으며 한일합방을 서서히 진행시키기 위하여 최고 통치기관인 조선통감부의 수장을 맡아 무단정치를 펴면서 한국의 주권을 빼앗는 한일합방의 원흉이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 본국으로 돌아간 이토는 추밀원(국회)의장이 되고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 북동부를 포함한 동양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시찰 계획 중 일본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의 동청철도의 환승역인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 의사는 무사히 거사를 마치도록 기도하고 애국동지 우덕순과 조도선을 대동하였다.

1909년 10월26일 오전9시30분경 탕! 탕! 탕! 브로우닝식 권총 3발이 이토의 가슴과 흉복부에 명중하였다. 또 다시 3발로 하얼빈 총영사 가와가미,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 이사 다나까가 차례로 쓰러졌다. 거사는 완벽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의해 집압되었으나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라 외치고 체포되었다.

한국과 만주를 삼키려는 일제의 하수인 이토가 이렇게 피살되자 이 정보가 일본정부에 타전, 일간 신문들은 호외를 발간하였고, 해외에 망명,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일제히 환호를 외쳤으나 조정내부에서 사죄단을 파견하여야 한다는 등 법석을 떨었고 오히려 중국은 내심 좋아했다고 한다. 몇 년전 방문한 중국 뤼순에 안중근 의사를 투옥하고 순국한 감옥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비단 한 사람의 저격으로 그들의 만행이 멈출리야 있겠냐만은 국제법상 불법하에 한민족의 의연한 분노를 보여 줄 수 있었으며 이후에 일제의 더 혹독한 감시속에서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받칠 애국 충정의 도와선이 된 것도 사실이다.

역사학자 E. 카는 역사란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으며,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 되며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며,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노재화 / 전 성결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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