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 블레포, 호라오, 데오레오, 에이도, 옵타노마이



언어는 그 민족의 독특한 사유의 표현이며, 언어에는 응결된 철학이 들어 있다

우리는 흔히 서양문명과 기독교의 문화 및 사상이 그리스적(헬레니즘)인 것과 히브리적(헤브라이즘)인 것의 역사적 복합산물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스적이고 무엇이 히브리적인가의 정확한 분석은 하지 못합니다.

그리스 사유와 히브리 사유가 하나의 복합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들이 각각의 특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공통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특이성을 찾는 문제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기 전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년 ~ B.C 323년)이 지중해 동부 지역의 여러 나라를 정치·군사적으로 정복함에 따라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리스·로마 사상과 셈족과 고대 근동 중심의 동방사상이 갈등·충돌·융합하면서 약 B.C 320년 ~ A.D 150년 사이에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초기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팔레스타인(Palestine) 유대교의 작은 한 종파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세계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이지만 그들의 생활 기반은 헬레니즘의 세계였습니다.
그 단적인 증거는 신약성서가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언어로 써진 것이 아니라 헬라 세계의 언어인 헬라어로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 15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아람어로써,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토라’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기원전 6세기경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면서 점차 사라져가고, 구약성경을 기록한 고전어로만 존재했고 일상에서는 근동지역의 공동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회당에서 토라를 읽을 때는 같은 구절을 세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랍비는 이미 사어가 된 히브리어로 토라를 한번 낭송하고, 그 후에 유대인들의 구어인 아람어로 번역해서 두 번 낭송합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팔레스타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가 팔레스타인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A.D. 33(30)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 20년이 못 되어서 대략 50년 혹은 51년 사도 바울이 헬라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헬라어로 편지를 씁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 교회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20년 안에, 또는 기독교가 형성된 지 20년 안에 신속한 발전을 거쳐서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적으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그리스어로 무게중심이 바뀌며, 지리적으로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문화적으로는 유대세계에서 헬라세계로 무게중심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오는 신약성서에 담긴 예수님이 어록들은 아람어를 당시 학자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변화는 신학적 사상에 변화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약성서의 세계는 헬레니즘의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히브리적 사유를 모태로 하고 있으며 또한 헬레니즘 세계로 옮겨지면서 그리스적 사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헬라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여러 학자에 의해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특별한 관계가 논의되었는데, 그중에서 노르웨이의 토를라이프 보만(Thorleif Boman)이 쓴『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Hebrew Thought Compared with Greek, 허혁 번역)라는 책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는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를 단순히 외형적인 대립이 아닌 하나의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그리스 사상과 히브리 사상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상과 그리스 사상을 비교하면 매우 대칭적인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평가되어 온 것을 살펴보면 히브리적 사유는 동적으로 정열적이고 힘차며, 때로는 거의 폭발(폭력)적이라 평가합니다.

반면에 그리스적 사유는 정적으로 평온한 것, 조화적인 것을 말함으로써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킵니다.
그러나 동적-정적이란 이 두 형태의 차이를 하나의 완성된 통일성 가운데 파악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히브리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듣는 것을 통해서 진리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적 경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부르는 음성을 경청하는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다’라는 히브리어 ‘샤먀’(shama)와 헬라어 ‘아쿠오’(akouo)는 둘 다 ‘순종’의 의미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하나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 4절의 “들으라 이스라엘”(쉐마 이스라엘)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청종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또한 바로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왜 듣지 않습니까?’는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히브리인들의 사고 유형의 특징은 태생적으로 청자적입니다. 때문에 히브리적 사유는 들음을 통한 철저한 이해의 사유입니다.

반면에 브루노 스넬(Bruno Snell)이 그리스인들을 “눈(eye)의 사람들”이라 불렀을 정도로 그들의 사유는 가시적인 존재에서 출발하는 눈의 사유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고 듣고 순종하는 결단의 실존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파악하는 논리의 실존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실체(현실)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주로 감각기관들, 특히 시각을 통해 수행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이야기하고 서술합니다.
때문에, 그리스 철학의 원리들과 상징들은 시각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헬라 문명의 예술작품들 특히 조각 작품과 건축 문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시각의 의미는 좀 더 깊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감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직관(直觀)이고 관조(觀照)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만물의 원리와 원인으로 말하는 물, 불, 공기, 수, 원자 개념들과 플라톤적 이데아 이념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스어의 진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로 ‘a’는 ‘제거하다’, ‘드러내다’는 뜻이고, ‘letheia’는 숨겨진, 은폐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인들에게 참된 것은 숨겨지지 않은 것, 또는 숨겨진 것,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일을 뜻합니다. 즉 명백하게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처럼 그리스적 사유는 가시적인 눈의 사유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철학자들의 삶은 이론적인 삶이고, 관조적인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 깊이를 꿰뚫고 사물들의 내면성과 그것들의 참 내용 및 핵심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그 사실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헬라 문화에서 ‘본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그저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본질을 본다, 또는 진심을 안다는 의미까지 확장됩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상태, 온전히 연결된 순간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안(肉眼), 심안(心眼), 영안(靈眼)

때문에 헬라어 중에 ‘보다’라는 단어들을 보면, 단순히 ‘보다’라는 뜻을 포함하면서 어떤 것들은 더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 다음의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에이도(εìδω) :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

에이돈// 우리게 보여주어서 보게 되는 것, 누가보여주시나?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보여주신게 있다. 그게성전이다. 그게 시청각교재다. 이역사에서 하나님이 "에이돈"해주신교보재이다. 문자가 보편화되기전 즉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이 성전을 주셨다. 사람은 그 성전을 "옵타노마이"로 본다. 이걸 즉 성전을 자기식으로보니 그게 우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옵타노마이"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이단계의 사람들중에는 대표적인 사람이 종교적 수준의 사람이다.

옵타노마이로 본 그대로 판단하는 것을 [에이도].

옵타노(óπτάνω) : 눈에 보이는 대상을 내 관점, 내 시각으로 해석해서 보는 것.

옵타노마이//내 마음대로, 내 시각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본다. 옵타노마이 중심은 사람이다. 안목의 정욕, 인간의 성정으로 보는

그냥 응시하는 단계를 [옵타노마이],

데오레오(θεωρέω)
: 본질과 목적에 대한 바람 봄, 뚫어지게 보다 매우 자세히 관찰한다 할 때 사용.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는 것을 [데아오마이],

블레포(βλέπω)
:
주의 깊게 살피거나 생각하고 끌어오다.
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한 대상만 보다.
경험 등을 통해 보는 능력.
알아차리는 것.
주의하여 보는 것을 의미.

블레포 : 내가 경험하여 아는 것(만져보고, 먹어본 후에)
경험과 마음으로 알게 된 것을 [블레포].

호라오(óράω)
: 진리의 눈으로 사물 너머의 것을 보는 것을 의미.
상황을 통해 실체를 아는 것,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는 것, 예언적으로 보는 것, 영적으로 깨닫는 것에 쓰임.

호라오// 마지막 단계의 봄. "호라오"는사람의 마음으로 눈으로 귀로 듣고 보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을 "호라오"한다.라고 한다. 이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진리의 눈으로 너머의 것을 보는 것을 "호라오"라고 한다.

그 의미까지를 깨달아 완전하게 알게 되는 것을 [호라오]라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으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것임이요."

물론 히브리어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의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보다’라는 표현 중에는 ‘라아’는 보다, 바라보다, 알다, 인식하다, 이해하다, 배우다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며, 동일하게 ‘감찰하다’(보살피다) 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이 ‘보다’라는 의미는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표상에 결부시킵니다.


רָאָה 스트롱번호 7200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발음 [ râʼâh ]
구약 성경  / 1299회 사용

가시적인 사물들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의 소유자 혹은 제작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고, 이 표지를 발견한 사람은 그 사물을 똑바로 본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었을 뿐 아니라 ‘보기도’했다(왕상10:4)는 것과 욥이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고백은 바로 그러한 표현입니다.

그런 점에서 작년 12월에 개봉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보는 것을 통해 실재를 체험하는 듯한 3D 기술의 영상 효과와 HFR(High Frame Rate)를 통해 시각효과를 극대화한 것과, 1편에서와 같이 “I see you”라는 대사를 만나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시각에 대한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구 문화의 한 단편을 영화로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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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블레포 데오레오 호라오, 에이도, 옵타노마이

βλέπω 스트롱번호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발음 [ blĕpō ]
관련 성경 / 
보다(마5:28, 눅6:41, 요1:29), 보게 되다 (마12:22), 뵙다(마18:10), 주의하다(마24:4, 막8:15, 눅21:18), 삼가다(막4:24, 눅8:18), 보이다(막8:23), 조심하다(막13:9, 고전8:9), 돌아보다(눅9:62), (눈이)밝아지다(요9:7).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1. 구경하다.  2. 깨닫다.  3. 요 14:17,19
발음 [ thĕōrĕō ]
관련 성경 /
바라보다(마 27:55, 막 15:40), 보다(막 3:11, 눅 10:18), 구경하다(눅 23:35, 계 11:12), 생각하다(히 7:4).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1:22
발음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관련 성경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행 1:3.
발음 [ ŏptanŏmai ]
관련 성경 /
보다(마 5:8, 눅 13:28, 행 2:17), 보이다(마 17:3, 행 7:30, 고전 15:5), 나타나다(막 9:4, 눅 1:11, 행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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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블레포. 991)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한은 무덤‘보다’라는 헬라 단어는 ‘블레포’라고 합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데오레오. 2234) 세마포가 놓였고.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된 헬라 단어는 ‘데오레오(2234)’입니다.
데오레오는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게 보는 것을 ‘데오레오’라고 한다.

요한복음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호라오. 3708) 믿더라.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호라오’이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호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봄’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봄’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호라오. 3708)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호라오. 3708)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

에이도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

데아오마이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

블레포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요1:18).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이고(갈 2:20),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인 것이다(요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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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인식)과 ‘지식’과 관련된 신약의 헬라어 단어 정리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두 언어에 담긴 특징을 알면 성경을 보다 깊이 인식할 수 있는데,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호흡으로 기록된 것이며(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given by inspiration of God/ θεόπνευστος 데오프뉴토스 ; 하나님의 숨, 호흡), 또한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기록이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한 증거의 두 판을 받은 것으로 상징되듯이,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준 말씀이다.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주어졌고 또한 권위를 나타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후대에 읽기를 위해 모음을 붙이고 띄어쓰기와 장 절을 나누었다.

반면 신약의 헬라어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생으로 오시고 과정을 거치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을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글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달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의 마지막이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인 것이다.

주의 다 이루심은 인자로서 자신 안에 우리와 온 우주와 그 모든 변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기록한 헬라어 역시 그 어떤 언어보다 가장 정교하고, 예수의 그 이루심을 다 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보는 것(인지)과 지식에 관련되는 단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유는 단어 해석에 있어 인지와 지식을 혼동해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또 같은 부류에 속더라도 단어에 따라 그 영적 의미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욥기 42:4-6
4.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Ⅰ. 보는 것(인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헬라어

➀ ὀπτάνομαι(3700) 옵타노마이

◾ 보다, 나타나다 등, 이 단어는 어떤 대상이 시각적으로 나타나거나, 인식되는 것을 나타내며, 시각적으로 평가되는 상황이나 대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행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being seen)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➁ θεάομαι(2300) 데아오마이

◾ 데아오마이는 눈여겨보고 주의를 기울이며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7: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➂ βλέπω(991) 브레포

◾ 눈으로 보다, 식별하다, 살피다, 관찰하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➃ ὁράω(3708) 호라오

◾ 눈으로 보아서 깨달아 알다(to see with the eyes i.e. become acquainted with by experience),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의미를 분별하다(gives prominence to the discerning mind)

◾ ‘호라오’는 눈으로 보고, 그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에 속하지만 지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경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타인과 공유가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No man hath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 성경은 본래부터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다로스 καθαρός)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으로만 깨끗해질 수 있다(요 15:3).

우리는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 자가 되어야 한다.

Ⅱ. 앎(knowledge)과 관련된 헬라어 단어

➀ εἴδω(1492) 에이도

◾ 보다(to see), 알다(to know)

이 단어는 새로운 정보나 인식을 가지는 것을 나타내며, 지식이나 인식을 가진 상태로 이해함을 의미한다.

◾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에이돌론 εἴδωλον’(우상)이다. 곧 표피적으로 나타나고 느끼는 것을 보고 그것을 그대로 실체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을 우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을 만들어 섬겨야만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붙잡는 모든 관념도 우상에 속한다.

요한일서 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➁ ἐπίσταμαι 에피스타마이

◾ 이해하다. 어떤 알려진 것에 근접하여 얻게 된 지식을 의미한다.(a knowledge obtained by proximity to the thing known, cf. our understanding)

사도행전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➂ συνίημι(4920) 수니에미

◾ 이해하다. 이 단어는 지성적인 처리와 깊은 이해를 통해 특히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이해를 강조하며, 지식을 습득하거나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로마서 3:10, 11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➃ γινώσκω(1097) 기노스코

◾ 알다. 이 단어는 개인적 경험에 기초를 둔 지식을 의미한다(a knowledge grounded on personal experience). 따라서 ‘기노스코’의 지식은 공유가 되지 않는다. 이 단어와 대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야다 יָדַע’이며 성경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구절은 창 3:5이다.

누가복음 3: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히브리서 10:26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걷는 길은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길이 아니다.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가는 길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헛되게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값을 치르고 카이로스의 날을 구속해야 한다.
‘호라오’로 보는 것과 ‘기노스코’의 지식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공유할 수 없다.
오직 어린 양이, 기름 부음이 열어주고 또 부어줄 때 가질 수 있다.
가난한 마음으로 주께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깨끗하지 못하면 보지 못한다.
종교가 아닌 생명과 진리의 코이노니아는 같은 것을 가진 사람끼리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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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이라고 번역이 되는 [에피두미아]​ 라는 단어는

ἐπιθυμ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939

1. 욕망
2. αἱ περὶ τὰ λοιτὰ ἐ. : 다른 것에 대한 욕망
3. ἐ
발음 [ ĕpithümia ]
어원 / 1939에서 유래
 ἐπί 스트롱번호 1909

1.㉠ ~을 다스리는
발음 [ ĕpi ]

 θύω
스트롱번호 2380

1. 희생하다.  2. 잡다. 3. 마 22:4
발음 [ thüō ]


[두메오]라는 단어는 '희생제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고,
​그 단어의 명사형이 [뚜미아], 희생제사예요.
거기서 나온 단어가 [두모스], 탐심, 욕망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열심히 희생제사를 반복하여 드리고자 하는 게 선악과 따 먹은 아담들의 탐심이요 욕망이라는 거예요.
그게 정욕이라고 합니다.


ἐπιθυμητής, οῦ, ὁ 스트롱번호 1938

1. 바라는 사람.  2. 욕심내는 사람. 3. 고전 10:6.
발음 [ ĕpithümē- tēs ]
어원  / 1937에서 유래

1. 바라는 사람, 욕심내는 사람, 고전 10:6.
관련 성경 /
즐겨하는 자(고전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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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πάτη, ης, ἡ 539 [apatē]
  • 1.

    쾌락, 육욕, 정욕[특히 죄가 수반되는], 막4:19, 벧후2:13.

  • 2.

    속임, 현혹, 사기, 기만, 허위, 마13:22, 막4:19, 엡4:22, 골2:8, 살후2:10, 히3: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정욕, 롬7:5.

  • 2.

    고난, 고생, 불행, 롬8:18, 고후1:6, 딤후3:11, 벧전5:9.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ιθυμία, ας, ἡ 1939 [ĕpithümia]

  • 1.

    [나쁜 뜻으로] 욕심, 욕정, 롬7:7이하, 골3:5, 약1:14이하, 벧후1:4.

  • 2.

    욕망, 동경, 사모함.

  • 3.

    [중성의 뜻으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이리들의 탐욕하는, 굶주려 있는, 욕심 많은, 마7:15.

  • 2.

    [명사] ὁ ἅ..: 강도, 사기꾼, 탈취자, 눅 18:11, 고전5:10, 6:10.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ιθυμέω 1937 [ĕpithümĕō]
  • 바라다, 동경하다, 행20:33, 딤전3:1, 욕심을 품다, 마5:28, 13:17, 눅15:16, 16:21, 17:22, 롬7:7, 13:9, 고전10: 6, 약4:2, 벧전1:12, 계9:6, [주] ἐπιθυμίᾳ ἐπιθυμεῖν: 간절히 열망하다, 눅 22:15, 갈5:1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φιλάργυρος, ον 5366 [philargurŏs]
  • 돈을 좋아하는, 돈을 사랑하는, 욕심 많은, 눅16:14, 딤후3: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πλεονέκτης, ου, ὁ 4123 [plĕŏnĕktēs]
  • 욕심꾸러기, 탐심 많은 사람, 고전5:10, 6:10, 엡5: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περί 4012 [pĕri]
  • 1.

    ~에 대한, ~에 관한. αἱ. π. τὰ λοιπὰ ἐπιθυμίαι: 재물에 대한 욕심, 막4:19, 빌2:23, 딤전6:21, 딤후2:18, 딛2:7.

  • 2.

    [속격지배, 어떤 행동과 사물이나 사람의 관련됨을 표시]

  • 3.

    [어떤 말이나 글로 된 표현과 그 평가를 나타내는 정신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 뒤에서] ~에 대하여. δοκεῖ περὶ τοῦ Χριστοῦ τί ὑ- μῖν: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22:42, 18:19, 요7:1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θυμός, οῦ , ὁ 2372 [thümŏs]
  • 1.

    열정, 욕정, 열망, 계14:8, 16:19, 18:3.

  • 2.

    분노, 진노, 계12:12, 14:10.

  • 3.

    [하나님에 대하여] 롬2: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욕정, 롬1:26, 골3:5, 살전4:5.

  • 2.

    수난, 고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나쁜 뜻으로] 욕심, 욕정, 롬7:7이하, 골3:5, 약1:14이하, 벧후1:4.

  • 2.

    성적 욕정, 살전4:5, [παθήματα와 함께] 갈5:24, 벧전4:3.

  • 3.

    욕망, 동경, 사모함.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διά 1223 [dia]
  • 1.

    율법으로 말미암은 욕정, 롬7:5. 믿음의 법으로, 롬3:27, 갈2:19. 기타, 롬1:12, 3:22, 7:8,11, 고전1:21, 4:15, 히7:11, 갈2:16.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롬15:32. 하나님의...

  • 2.

    ~을 통하여.

  • 3.

    [속격지배]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사도행전 3:1-10






에이도(εἴδω. 1492)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에이도)  구걸하거늘.

블레포(βλέπω. 991)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아테니조. 816) 가로되 우리를 보라(블레포. 991) 하니.

블레포는 육적인 눈으로 본다는 의미로 쓰이고,
호라오는 물리적으로 보는 이외에도 이해, 인식, 통찰, 그리고 영적인식이나 지적시각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됩니다.


에페코(ἐπέχω. 1907)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프로스도카오. 4328) 보거늘(에페코. 1907)

호라오(ὁράω. 3708)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호라오. 3708)

성경을 보면 특별한 기사와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평범한 일상 중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닌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 갑자기 일어난 것입니다.
목사의 모든 일과와 숙제는 거의 주일에 맞추어집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말씀을 구하는 이유도 주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소원하는 바는 그 주일이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전 주에도, 그리고 그 전주에도 그래도 오늘 만큼은 평범한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설령 오늘 특별한 만남과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분명히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 날 것입니다.
이왕이면 오늘이 그날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인생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는 그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읽은 본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거지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일어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4장 22절에 보면 나이를 40여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말해주는 그가 지난 40 여 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그 곳에 앉아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고 또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도 그것뿐이라는 절망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성전에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문 앞이었습니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길 미문은 황동으로 겉 문을 하고 금과 은으로 덧씌운 2 중문의 구조였다고 합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이토록 화려한 성전 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거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극과 극을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몸가짐과 깨끗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큰 복을 기대하며 그 문을 통과해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죄 사함의 기쁨과 응답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미문의 화려함과 함께 그 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생명의 활기와 기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앉은뱅이는 40 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40 년 동안 가장 아름답고 복된 장소에 있으면서도 그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미문을 들어 가본적이 없습니다.
병자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유대의 율법에 따라 그는 그 자리에 고개를 쳐박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운 미문은 결코 아름다운 미문이 아닌 고통의 문이요 저주의 문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활력과 생명의 장소지만 그는 그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40 여 년 동안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날도 별 다를 것이 없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시간부터 누구가가 던져 줄 돈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날이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습니다.
3시와 9시 기도가 지나고 해가 중천을 넘긴 오후 제 9 시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9시면 오후 3시입니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3절을 봅시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에이도)  구걸하거늘.

거지가 먼저 봤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원어로 에이도입니다.
에이도는 see 그냥 보다는 뜻입니다.
그냥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의미없이 목적없이 본 것입니다.
흐리멍텅한 눈을 뜨고 늘 하던 대로 “ 불쌍한 사람에게 한푼 주십쇼 ” 하고 구걸하기 위해 본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 거지의 요청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도 그에게 시선을 줍니다.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아테니조. 816) 가로되 우리를 보라(블레포. 991) 하니.

보라 - 블레포(look straight).  집중하라, 경험하여 알라
주목하여 - 아테니조

ἀτενίζω 스트롱번호 816

1. 주목하여 보다.  2. 눈 여겨 주시하다. 3. 유심히 보다
발음 [ atĕniz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ἠτένισα, 1[연합불변사]과 τείνω ‘내뻗치다’의 합성어에서 유래
  • 1.  주목하여 보다, 눈 여겨 주시하다, 유심히 보다, 눅4:20,22:56, 행1:10, 3:4,12, 6:15, 7:55, 10:4, 11:6, 13:9, 14:9, 23:1, 고후3:7,13.
  • 관련 성경
    주목하다(눅4:20, 행3:4, 고후3:7), 자세히 쳐다보다(행 1:10).


 
거지는 베드로를 건성으로 봤지만 베드로는 거지를 응시했습니다.
에이도는 보지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상태요 블레포는 대상을 확실히 보고 그것을 틀림없이 경험하여 알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블레포 할 때에 드디어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사람의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눈 앞의 것만 보는 육신의 눈(肉眼)
또 하나는 마음의 눈(心眼)
그리고 영적인 눈인 영안(靈眼)
그냥 씨하면 마음의 눈은 열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블레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 look at)말합니다.

이것도 블레포 하라는 말입니다.
블레포의 또 다른 뜻은 ‘마음의 눈으로 보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신들을 보라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눈을 보라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을 뜨라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불행하게 되는 것은 좋은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마음의 문제요, 바라봄의 문제에서 영향을 받는다 합니다.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라는 곡은 두시간 짜리의 대작입니다.
그 엄청난 곡을 헨델은 병상에서 죽어가며 열흘 만에 썼습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병석에서 하나님께 블레포했을 때 음악사에 길이 남는 대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역사 드라마 왕건에서 보면 궁예가 애꾸눈이었습니다.
영국의 해군 제독 닐슨도 애꾸였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하니발도 애꾸눈이었습니다.
이들은 애꾸눈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명장들이었습니다.
세계 3 대 서사시를 쓴 호메로스와 밀턴과 단테, 이 세 사람은 모두 맹인들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잘 보이거나 조건이 좋아 이른 업적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과 상관없이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블레포하면 소중한 것이 보입니다. 블레포하면 사랑이 보입니다. 부모를 향해 블레포하면 부모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부부가 블레포하면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삶의 위기는 환경보다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짜 위기는 영적 침체요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어느 시대보다 번쩍 거리며 발전하고 삶은 윤택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멀어졌습니다. 아름다운 황금 빛 문에 소중한 것들이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늙은 부모들이 버려지고 소중한 가정들이 깨지고 있습니다. 결국 원망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부모와 자괴감으로 고통받는 이혼부부와 비관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영적 앉은뱅이요 거지가 널려 있습니다. 육신의 배부름 속에 사랑의 배고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거지 앉은뱅이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신의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감동과 소망이 꺼져버린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기대가 없습니다. 기대라고 한다면 오직 한푼 얻어 목구녁에 빵 몇 조각 밀어 넣는 창자가 채워지는 것 뿐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이런 마음의 장님인 그를 블레포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블레포 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 엔진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엔진은 잘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엔진이 어디입니까 ? 마음입니다. 마음의 엔진이 잘 돌면 뜨겁습니다. 마음이 식어진 예배는 곤욕입니다. 마음이 식어진 기도는 미신입니다. 마음이 은혜로 뜨거워졌을 때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은 마음의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블레포 마음의 눈을 뜨라, 나를 쳐다보라 , 마음으로 기대하라!

그러자 5절을 봅시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프로스도카오. 4328) 보거늘(에페코. 1907)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돈밖에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소경 사이에는 굉장한 간격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쳐다보라는 것은 돈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지 앉은뱅이는 돈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서로의 요구와 필요가 다릅니다. 이것도 극과 극입니다.

베드로가 보라 그랬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요 ? 베드로 자신의 행색일까요 ? 그도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베드로가 요구하는 블레포는 자신 안에 계신 어마 어마한 분이셨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세요, 어마 어마한 분이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대하세요, 하나님 주실 은혜를 기대하세요,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속상한 모든 것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요. 엄청난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도 못한 굉장한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가 블레포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고 눈을 들었습니다. 어째든 두 사람의 시선이 블레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기대하고 눈을 들었던 거지에게 베드로는 돈부터 없답니다. 기대하고 쳐다봤는데 “ 나 돈 없다 ” 약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딴게 있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니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무조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돈은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은 얼마 전에 죽은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으로 걸으라 명령하고는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고 걷고 뛰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시선이 블레포하고 짧은 말이 선포된 것뿐인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앉은뱅이였던 그가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났다는 사실 뿐입니다.
20 년 전 군에 입대했을 당시 훈련소에서 친척중에 군대나 정부기관에 고위직이 있으면 적어 내라고 합니다.
고위직의 줄이 있는 사람들은 좋은 곳으로 자대 배치받고 비교적 군 생활이 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날 동기 하나가 적어 내지 않고 머뭇거리며 소대장에게 ‘이런 분의 이름도 적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하고는 상관없지만 소대장님이 아실만한 분이라서 적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소대장이“ 누군데 ”그랬더니 저희 큰 아버지 성함이 “ 최규하 쓰십니다. ”
그 날부터 훈련도 안시킵니다.
얼 차례도 다 빼주고 훈련병 때는 면회도 안 되는데 가족 면회까지 시켜 줍니다.
그리고 더 기막힌 것은 제가 대대 선임이어서 훈련 마치면 받기로 되어 있던 29 연대 연대장 상을 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상 받으면 자대 배치 받고 2박 3일 포상휴가거든요.
전직 대통령의 이름은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은 비교할 수 없는 파워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생사를 가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실력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절대적인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먹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이름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가 복종하며 영적 세계도 굴복하는 위대한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중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냉냉한 심령으로 이 곳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십니까? 사업이 어려우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업아 일어날지어다. 몸이 병들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의 고통에서 일어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살아나고 우리 가정들과 사업이 이 일을 위해 일어날지어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5절을 보면 앉은뱅이가 바라보았습니다.

보라 해서 본 것입니다. 블레포 하라 했으면 블레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 바라보거늘 ” 이 단어는 불레포가 아닙니다. 룩 엩이 아닙니다. 블레포가 아닌 다른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원어로 에페코라는 단어가 쓰여졌고, 영문으로 보면 give attention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에페코라는 단어의 의미는 못 떠나게 굳게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용어를 확실하게 정리를 해 보십시다.
헬라어에서 본다라는 단어가 3가지가 있는데
그냥본다는 에이도가 있고
집중해서 본다는 블레포,
그리고 마음안에 꽉 붙잡아 둘 정도로 본다는 에페코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블레포하라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거지는 돈을 얻을까하여 블레포했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짧은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시선 속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시선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거지 앉은뱅이에게 마음의 눈이 열린 정도가 아니라 또 다른 눈인 영안이 열려 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시선을 발견한 앉은뱅이는 그 짧은 순간 예수님의 시선을 블레포한 것이 아니라 에페코 한 것입니다.

주목한 정도가 아니라 굳게 붙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못 떠나게 굳게 붙잡다’는 에페코를 써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 보거늘’ 예수님의 시선을 절대로 놓칠 수 없도록 자기의 마음에 꽉 붙들어 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잡힌 오른 손도 더 이상 베드로의 손일 수 없었습니다. 그 손은 앉은뱅이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손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과 그 분의 피 묻은 손에 잡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한없이 따뜻한 생명의 시선을 주지 않았던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선행된 시선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시선이 떠나지 않도록 꽉 붙잡는 것입니다.

따스한 햇볕같이 쏟아지는 주님의 시선에 인간이 에페코 할 때 평범한 일상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 때 마다 저를 블레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 만큼이나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를 블레포 하지 마시고 저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평범한 예배가 여러분 각자에게 놀라운 체험과 기적을 만드는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복잡한 인생길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해결의 열쇠를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능키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께 에페코하면 그것으로 인생은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즘 다 차를 몰고 다니는데요. 차를 다 아는 사람만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도 운전 잘합니다.

저희 아내는 자동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동키면 가는 줄 알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줄만 압니다.

자동차의 원리나 구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을 잘 모릅니다. 인간관계도 잘 하지 못합니다. 말 주변도 없습니다. 소심합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대속이 뭐고 삼위일체가 뭐고 은혜 언약이 뭔지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수님께 에페코 하면 받드시 복을 받는다. 믿음 생활 잘하면 복을 받는다.’ 이것만 붙들면 됩니다.

대구 서부 교회에 아멘 교수로 불리는 조동식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답니다.
그 분의 어머니께서 큰 며느리를 보시던 해가 마흔 다섯 이었답니다.
구역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께서 며느리에게 축복하기를 “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아들 낳기를 축원합니다. ”하더랍니다.
그럼 아멘해야 잖아요.
그런데 이 며느리가 아멘을 안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꾸 눈짓을 하는데도 안하는 겁니다.
그러자 다급한 시어머니께서 대신“아멘“해 주었는데 그만 시어머니가 임신을 해 가지고 늦동이를 나았답니다.
그 목사님이 축복한데로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머리를 가진 교수 조동식 집사가 태어난 겁니다.

신앙을 머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에페코 하면 그대로 되는 줄 믿습니다. 

앉은뱅이가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

8절을 보세요.
성전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호라오. 3708)

하나님을 찬미하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에게도 드디어 미문이 아름다운 문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건축물인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 주께서 이곳에 계신 여러분을 뜨거운 사랑과 생명의 눈으로 응시하고 계십니다.
자기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며 마음의 눈이 먼채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블레포 할 것을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밀려나 영적 앉은뱅이로 주저앉은 그 다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려고 피 묻은 손으로 우리 손을 잡으려 하십니다.
그 분을 향해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그 분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까 ?
활짝 열린 축복의 성전을 향해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찬양하며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
참된 생명도 , 참된 사랑도, 참된 능력도, 참된 위로도, 참된 소망도, 참된 성공도 오직 그 분께만 있습니다.
이 시간 나를 위해 피흘려 주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시선에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저를 블레포 하십시오.
look at me , 믿음의 눈을 열어 저를 보십시오.
그리고 저를 통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십시오.
굳게 잡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잡으셨습니까 ?
이제 선포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정과 사업이 불 같이 일어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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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블레포 데오레오 호라오

5절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의 수의를 보았다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블레포’입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로 밑의 6절에 보면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는 ‘데오레오’입니다. 그 말은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데오레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오라오’입니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호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 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봄’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봄’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요4:48)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확인 도장을 찍고 가지요.

(요11:40)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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