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네 명의 마리아(Four Mary in New Testament)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네 명의 마리아(Four Mary in New Testament)

1.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일찍이 창세로부터 계시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구원의 정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 육신 하는 데에는 한 여인의 희생적인 순종이 있었다. 한 때는 세상을 풍미하던 다윗 가문 출신으로 벽촌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순박한 처녀로써 수 천년 동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망하며 기다리던 메시야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인 것이다.

남자와 장래를 약속하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는 마리아에게 있어 임신이란 모진 수모와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는 율법의 시대에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여야 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마리아는 자신의 잉태 사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마리아의 겸손한 태도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확고한 신앙의 결단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리아는 무사히 약혼자 요셉과 결혼하고 아기 예수님을 낳아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알고 있었던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인간적인 요구를 하는 조급함을 보인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염려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불신앙의 모습도 보인다. 육신에 속한 자로서의 본능적인 모성과 메시아에 대한 신앙이 교차하고 있는 마리아의 마음에 갈등과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세상 만민을 구원할 메시아를 낳았지만 마리아 역시 율법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일생 최대의 사건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사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삶의 한 기둥이었던 아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그 시간은 마리아에게 가장 처절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최악의 상황은 최상의 축복의 문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는 마리아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구세주의 모습이 새겨진다. 그녀의 아들 예수의 육신은 처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녀의 심령 속에 영원한 메시아로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마리아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참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이어진다. 선한 것이라고는 날 것 같지 않던 나사렛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묻혀 있던 마리아가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생의 문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리아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랐듯이 오늘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할 때 생명책에 그 이름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2.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긴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물론 명단 속에서 그의 온 집안까지 구원으로 인도한 신앙인들이 있다.

그들의 명단 속에서 우리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마리아에 대하여 오직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행12:12).  그러나 우리는 단 한 군데에 농축되어 있는 마리아의 신실한 삶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마리아는 그녀의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장을 제공하고 아들 마가를 주님의 종으로 키움으로써 초대 교회의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한 여인이다.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누님이기도 한 마리아는 남편과 사별하고 예루살렘에서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 재산은 많았으나 과부로서 쓸쓸히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인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또한 마리아에게는 무엇보다도 주 안에서 신앙으로 양육하는 아들 마가가 있었기에 오히려 보람과 기대에 찬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경건한 마리아는 일찍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활용하여 드리기를 자원하였다. 집을 개방하고 손님 접대하기에 인색하지 않은 마리아의 [실천하는 신앙]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마리아의 집의 큰 다락방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는 장소가 되었다. 마리아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장소를 제공하고 후하게 대접하던 그녀의 행위가 주님의 성만찬을 예비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그 다락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 강림이 실현된 역사적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리아의 집은 모일 장소가 없던 성도들에게 예배처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믿음과 용기는 모든 이해타산과 생사를 초월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집에는 성도들은 물론 사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아들 마가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안 일을 돕는 하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접하게 함으로써 식구들 모두가 구원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생활 가운데 실천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린 마리아의 헌신은 믿음의 결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믿음에 축복하시어 마리아 자신은 물론 그 자녀와 온 집을 영화롭게 하셨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어 함께 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마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여 주신 모든 것을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 드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마리아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막달라(Magdalene)출신의 마리아를 일컫는다.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특히 다른 지역들보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마리아의 생활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당시 일곱 귀신에 들린 채 고향을 떠나 방랑하던 그녀의 처지를 통해 그녀의 생활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된다.

그녀를 방탕한 길로 몰아 넣던 일곱 귀신이 다 떠나가고 육신의 병은 물론 정신적인 이상까지 깨끗이 고침을 받아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하는 마리아의 헌신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큰 은혜를 받고 많은 용서받은 사람은 진실 한 사랑으로 보답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을 따르며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로서 기업이 있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반 동안 계속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직 마리아에게는 사랑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후 예수님의 묘를 지키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살아나시어서 자신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죄 중에 잉태되어 죄악 중에 출생한 한 죄인일 뿐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순간 “랍오니”(선생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육에 거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인 마리아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여인들 가운데 함께 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여인으로서의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좁고 험난한 생명의 길로 택한 마리아의 이름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번째로 언급된다. 마리아가 경험한 것처럼 오늘날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침을 받는 신유의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해지는 축복을 믿는 자들 모두가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 보어주듯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4. 베다니의 마리아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사는 강림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냉대받은 베다니 마을에서 마리아는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단촐하게 살고 있었다. 언니인 마르다는 실제적이고 활동적이었던 반면 사려깊고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마리아는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집안 일을 도우며 마음 속에 항상 메시야를 소망하던 마리아의 생활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급격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리아는 메마른 심령에 생명의 생수를 공급받게 된 것이다. 능력있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고 많은 이사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리아에게 인간의 격이 아닌 메시야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졌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영적인 제자로서 신앙을 성숙시켜 가고 있던 마리아에게 그 믿음을 흔들어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집안의 생계를 맡고 있는 오빠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 죽은 것이다.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죽음은 마리아에게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비탄에 잠긴 채 눈물을 토해내는 마리아의 호소는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다가가서 마침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낳았다.

이 사건을 통하여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마리아의 마음 깊이 뿌리 내린 믿음은 현실적인 행동으로 표출된다.

자신의 삶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 보여주시는 주님께 마리아는 가장 귀중한 소유를 아낌없이 드림으로 감사와 믿음을 나타내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께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부음으로써 신앙고백을 대신한 것이다.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할 향유를 부은 것은 곧 여자로서의 행복한 미래를 포기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헌신하겠다는 의지였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영적 통찰력이 개발된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마태복음 26:13)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소외받는 비천한 여인 마리아가 그 이름이 영원토록 기억되는 존귀한 신앙으로 남게 된 것은, 믿는 자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영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늘 대하고 이를 통하여 주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여야 함을 깨닫게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범사에 감사의 향기를 발하는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치는 성도를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기쁨으로 칭찬하며 맞아 주실 것이다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

원시 복음(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예언된 메시아(창 3:15)는 최초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메시아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마 1:18∼23, 2:11).
이제 남은 메시아 예언은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란 예언입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행 1:11, 계 1:7).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음으로
죄와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사망으로 망하게 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을 허시고 다시 낙원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원시 복음인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원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신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이 꼭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죄에서 해방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활기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었으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고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남자가 낳은 후손들의 대략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남자가 낳은 후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라 기록한 말씀이 단 한곳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눅1:25-3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있었으니
다윗의 후손 (마1:16) 야곱이 낳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로 그에게 (마 1:18)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리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덮으시다’라는 뜻은 감싸다라는 뜻으로
닭이 알을 품듯(창 1:2)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시고 나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다

어쨌든 여자의 후손은 약속의 말씀대로(미 5:2. 눅 2:4. 마 2:11)
떡집이라 일컫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호 11:1. 마 2:15)
약속의 말씀대로 애급으로 피신하셨다가(마2:23)
약속의 말씀대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고전 15:3)
성경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고전 15:4)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과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과의 전쟁이라 할 것이다

사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세상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계 17:17)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다스릴 환란까지이다.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을 아는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계 2:9. 13:6. 16:9. 11. 21)
훼방할 것이며 회개치 않고(계 20:14) 불 못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후의 날이 임하기까지 복음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하여
진리에서 비켜서도록 할 것이다.

그 하나는 동정녀에 관하여서이고
둘은 창조론에 대적하는 진화론이며
셋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이며
넷은 홍해바다에 길을 내신 일이며
다섯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미련한 자들의 대적이며
여섯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는 일이며
일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으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그 어떤 유혹에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며
처음 듣고 믿은 복음의 말씀인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지 말고 오히려 굳게 서야 합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

알파(Α)와 오메가(Ω)

헬라어 알파벳은 모두 24자입니다. 알파(Α)는 헬라어 알파벳 첫 번째 문자이며, 오메가(Ω)는 헬라어 알파벳 마지막 24번째 문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문자의 시작과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는 22개의 문자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예수님은 22개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과정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은 이제도 있고(현재), 전에도 있었고(과거), 장차 올 자(미래)로 전능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두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일까요? 영원하신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자(永遠者)가 됩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입니다. 완전한 존재를 다른 말로 영원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이와 같은 모습을 불란서의 학자 파스칼은 “사람은 중간자” 라고 정의했습니다. 왜 사람을 중간자라고 정의했을까요?

사람은 시간적으로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중간자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는 하늘도 아니고 땅 속도 아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공간적으로 사람은 중간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모양 형태를 살펴보면 사람은 하나님도 아니고 사탄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형태적으로 사람을 중간자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은 처음(ἀρχὴ)과 나중(τέλος.)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ἀρχὴ)이란 “근원(根源)”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처음이란 영적 존재로 돌아가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이란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심판(審判)”의 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로마 우르반대학 대강당에 새겨져 있는 글입니다.
오래 전 로마법대 졸업반에는 고학생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감당할 길이 없어 필립 네리란 부자 노인을 찿아가 재정상의 도움을 청원했습니다.
네리 노인은 그의 요청을 들어 주기로 허락한 후 다음과 같은 문답을 했습니다.

네리노인 "그런데 이 돈으로 무엇을 하겠소?"
학생 "우선 법대를 마쳐야겠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변호사가 되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돈을 벌어야겠어요."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집을 짓겟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 생 "결혼을 해야죠."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자녀를 낳아서 교육을 시켜야죠."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점점 늙게 될 것입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

젊은 법학도는 대답을 못하고 다음과 같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엔가 내 피는 식게 된다.
나를 위한 장례식이 있을 것이고 공동묘지는 무덤 하나가 더 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영원히 망각이다.

아무 대답이 없는 그 대학생을 향해서 네리 노인은 이제 엄숙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망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예수 안에는 영원한 천당 예수밖에는 영원한 지옥이다."

돈 뭉치를 받아든 그는 매우 행복스러운 듯 보였으나 큰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영원이다."

비록 그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그의 마음속에 강력히 와 닿는 그의 말은 결코 지워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나깨나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이 말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현명한 결단을 내려 로마 법대에서 우르반 대학으로 옮겨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성경과 신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 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말은 마지막 다음에 있을 심판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의 넉두리입니다.
 
그런데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수 샘물을 마시고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은 처음(πρῶτος)과 나중(ἔσχατος)이시며, 시작(ἀρχὴ)과 끝(τέλος)이 되셨습니다.

처음(πρῶτος)이란 시작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시작은 창조를 말합니다. 나중(ἔσχατος)이란 마지막 즉 종말을 말합니다. 종말은 땅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위로부터 내려와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는 날을 말합니다.

시작(ἀρχὴ)은 구속의 시작으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끝(τέλος)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외치셨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구속의 사역이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첫째는 영원하신 예수님(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둘째는 창조주와 심판주(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셋째는 만유의 주(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 24문자의 첫문자와 마지막 문자입니다. 그러나 24문자 중에 첫문자와 마지막 문자를 제하면 22개의 문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드시 마지막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올 때 어떤 사람은 이미 죽어서 땅 속에 묻혀 없어진 사람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반면에 마지막 그 날에 살아있으므로 새로운 영적 존재로 변화되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약속을 사도 바울의 외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이란 첫 번째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 전체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첫 열매를 바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로 약속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첫 열매는 단 하나의 열매가 아니라 앞으로 열매 맺을 모든 열매를 대표하듯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은 장차 모든 부활 생명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알파(창세기 1:1) - 창조주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신앙고백으로 암송하는 사도신경에서도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를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알파 하나님은 우주 전체의 근원입니다.
독일의 개혁교회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10. 2 ~2014. 9. 5)는 그리스도론을 체계화 했던 학자이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알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중심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내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만 나라는 존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파 하나님은 처음부터 존재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중심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내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로서 전능한 자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이 알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오메가(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은 22장 21절이 마지막 말씀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으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끝을 맺는 인사말이기 때문에 마지막 말씀은 20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알파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오매가 하나님은 다시 오실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다시 오실 목적은 심판주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3. 하나님은 완성(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성하시는 방법은 세상에 있는 것을 모두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 죽음, 애통, 통곡, 아픔이 없는 세상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상상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눈물과 죽음과 애통과 통곡 그리고 아픔이 언제나 가깝게 우리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것들이 있어야 웃음과 삶과 즐거움을 느끼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세상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마지막 때에 모든 세상과 삶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이며 은유입니다. 

로마 황제가 아무리 자신을 황제가 하나님이라고 강요할지라도 로마 황제는 눈물과 죽음과 아픔을 씻어줄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합니다. 로마 황제의 권위에 굴복하라고 강요받던 시대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진리 즉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는 믿음입니다. 최고의 권력에 대한 혁명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읽어보면 정말 황당한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하늘이 종이두루마리처럼 말린다거나 바다에서 용이 나오는 광경도 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그 역동성에 감동을 받습니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나 사람들은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통령이나 필부나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조 단위의 재산이 있는 사람이나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의 사람이나 인간의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서 한 순간 살다가 떠나야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대상에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밥벌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 해방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 시대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알파와 오메가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신앙이란 알파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오메가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완성의 하나님입니다. 완성의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상급은 이 세상에서 올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유대인들의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나라도 없이 오랜 세월을 전세계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살던 소수민족입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되었고,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민족이기도 합니다.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성과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몸보다는 머리를 사용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습관.

배척을 당해왔던 역사로 인해 자연스럽게 어디서나 할수있는 머리를 사용하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세계에 흩어져 있어도 서로 정보를 교환할 만큼 강한 공동체 의식.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끼리는 엄청난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는 토론과 대화의 교육 방법

이론보다는 체험을 중시하는 유태인들만의 전통 교육법.
인내와 헌신을 기반으로 부모들은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통해 자녀들을 이끌어 주는 것이 유태인 교육의 공통된 노하우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고난을 이겨 나가면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귀하게 역사하십니다.
유태인들이 겪은 고난이 결국 그들에게는 가장 귀한 재산이 된 것처럼 주님 안에서는 지금 겪는 어려움들이 훗날의 진주가 된다는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견디십시오. 반드시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주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게 하소서.
어려움을 통해 성장시키실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유대인들처럼 어떤 환경에서든지 날마다의 삶이 위를 바라보는 기대가 넘쳐나는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상칠언(架上칠언)


가상칠언(架上칠언)

가상칠언 묵상

1언 용서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2언 약속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3언 섬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
4언 교환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5언 체휼 : 내가 목마르다(요 19:28)
6언 확신 : 다 이루었다(요 19:30)
7언 신뢰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도피성(여호수아 20:7-8)과 거룩한 피할 곳(이사야 8:14)

이사야 8:14
그가 거룩한 避(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磐石(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居民(거민)에게는 陷穽(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겔11: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여호수아 20:7-8
무리가 납달리의 山地(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山地(산지)의 세겜과, 유다 山地(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區別(구별)하였고

또 여리고 東(동) 요단 저便(편) 르우벤 支派(지파) 中(중)에서 平地(평지) 曠野(광야)의 베셀과 갓 支派(지파) 中(중)에서 길르앗라못과 므낫세 支派(지파) 中(중)에서 바산 골란을 擇(택)하였으니

도피성 존재의 이유



이스라엘의 요단강을 기점으로 하여 48개의 성읍 중 6곳을 택하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곳(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요단강 서편에 3곳(게데스, 세겜, 헤브론)이었습니다(수 20:7-8).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지명의 뜻까지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도피성은 골란과 길르앗 라못, 그리고 베셀에 두었고 서쪽에는 게데스와 세겜, 그리고 헤브론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이스라엘 지도를 참조하여 보면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하여 있어서 부득이 도피성으로 피해 가야할 경우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으며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도피성은 무슨 이유로 세워놓은 것일까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살인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죄에 대한 형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다 연속적으로 살인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죄가 중할수록 그리고 그 형벌이 엄할수록 의도적인 살인과 과실로 발생하는 사고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은 누명을 쓴 사람이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즉각적인 보복을 당하기 전 까지 자기 결백을 증명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피신할 장소도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다 그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의로 이웃을 모살하였으면 살인자가 거룩한 단에 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령하신 바 있습니다.(출21:12-14)
따라서 이 도피성은 중한 과실죄를 지었으나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피성에도 운영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살인자가 과실로 죄를 지었다는 것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도피성에 들어가 숨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의도적으로 살인하지 않았음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살인에 대한 도구가 있거나 계획적인 살인을 하였다면 구제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실로 살인한 자는 도피성에서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받게 됩니다.

둘째, 반드시 도피성으로 스스로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는 도피성 안에 있을 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피하는 도중에 보복을 당하거나 도피성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 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은 도피성에 대한 규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죄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할지라도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으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하는 보수(報酬)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내어준바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죄 값을 치루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해 있던 자들에게 사면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어 사면령이 내려지면 보수자가 살인자를 만나도 보수의 원칙에 따라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민35:27,28)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은총이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이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의 과실에 대한 보수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오기만 하면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과 도피성의 의미(게 세 헤 베 길 골)

1. 게데스 - 구별하다 (납달리 산지)

서쪽 경계지의 산들 가운데 있고 갈릴리 바다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다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구별된 그리스도요 구원자이심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그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하여 주신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세상의 죄에서 구별되어 거룩한 성도로 사는 은혜를 받게됩니다.

2. 세겜 - 어깨 짐 (에브라임 산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동서 경계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볍고 쉬움이라(마11:28)고 하셨습니다.

3. 헤브론 - 연합, 동맹, 교제(유다 산지)

기럇 아르바로 알려진 곳으로 유다의 예루살렘 남쪽 약 3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을 연합하게 하시는 자요 또한 우리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웃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으리니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4. 베셀 - 요새 (르우벤 지파)

사해바다로 흘러가는 요단강 입구 동쪽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요새가 되십니다. 특히 환난을 당한 자에게 요새가 되십시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자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와 돌에 맞아 죽을 여인에게도 요새가 되어 주셨습니다. (시 91:2)

5. 길르앗 라못 - 언덕, 고지 (갓 지파)

길르앗 라못 산지의 약 80km이상 북쪽에 위치했다.
예수님은 언덕이요 고지가 되심으로 어떤 경우에 가까이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예수 믿으려하니 끊을 것도 많고 버릴 것도 많고 그대로 살려고 하니 힘든 것도 많습니다. 예배 시간, 기도 시간, 봉사 시간에 참여하려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때로 비난과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곳이 곧 쉼의 언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를 높이 세우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암사슴 발을 높은 곳에 세워주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나, 롯, 에스더를 높이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6. 골란 - 기쁨 (므낫세 지파)

갈릴리바다 동쪽산지 어딘가에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수님은 최후 승리자요 기쁨이십니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에게도 승리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심으로 모든 성도에게 큰 기쁨이요 승리요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