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낳은 국제회의 - 1948년 제3차 파리 유엔 총회
南北 격전 속…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48개국의 찬성표
이승만, 파견대표단에 장면 등 임명… 로마교황청도 지원
"북조선에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명했다.
1946년 2월 북한에 실질적 정부인 북조선 임시위원회가 들어섰다.
남북
통일정부 수립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분단 고착화의 주범은 소련이었다.
넉 달 뒤인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과도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撤退)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말한 '세계 공론'은 유엔을 통한 한국 문제 해결을 뜻했다.
그해 12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지론을 알리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아래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진구. (운석장면기념사업회 제공)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 냈다.
미국이 소련과의 협의가 아니라 유엔을 통한 한국 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때는 1947년
9월이었다.
두 달 뒤인 11월 14일 제2차 유엔총회는 남북한 동시 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소련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방북을 막았다.
북한에서는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군이,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되는 등
단독정부 수립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남한만의 총선 실시를 결의했다.
7월 20일 5·10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8월 11일 장면이 이끄는 제3차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을 임명했다.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되기 4일 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유엔 승인 획득 전략은 치밀했다.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하는 우방을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가톨릭
교단을 대표해 정계에 진출한 장면을 수석대표로 보내 세계 외교가의 ‘보이지 않는 손’ 로마 교황청의 지원을 얻게 했다.
각국
대표를 설득하는 데 여성의 역할이 크다고 판단해 모윤숙·김활란 두 여성 대표도 포함했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은 중대한 과제였다.
1948년 8월 23일 한 미국 신문(US뉴스&월드리포트)은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과
북한의 정당성을 가르는 격전장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박사와 그의 정부는 8월 15일 미국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으며,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8월 25일 ‘선거’를 치를 예정이다.
한반도 문제는 9월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회부된다.
유엔이 이
박사의 정부를 인정하고, 소련에 대해 그들이 통치하는 북한이 남한과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할 때 결말이 날 것이다.’

에펠탑 맞은편에 있다.
1948년
9월 21일 오후 3시 30분 프랑스 파리 샤요궁(Palais de Chaillot)에서 유엔총회는 개막됐다.
샤요궁은 파리
중심부 센강 북쪽 강변에 에펠탑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름과 달리 군주가 살던 궁궐은 아니다.
1937년 세계박람회장으로
세워졌지만 거대 건축물을 궁(Palais)으로 칭하는 프랑스의 관례에 따라 궁으로 불린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제3차 유엔총회의 흔적은 없었다.
1948년 12월 12일 총회서 '48대 6' 대한민국 승인 가결
한국
문제 안건은 제3차 유엔총회 회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2월에 들어서도 상정될 기미가 없었다.
장면 등 우리 대표단은 각국
대표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원을 호소했다.
12월 6일 회기 종료 6일을 앞두고 총회 상정을 위해 넘어야 하는 관문인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되기 시작했고 한국 대표 초청 동의안도 채택되었다.
다음 날 대표단원들은
옵서버석(席)에서 내려와 1층에서 대한민국 승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수석대표 장면의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12월 8일
제1위원회는 한국독립승인안의 총회 상정을 결정했다.
마침내 12일 12일 일요일 오후 5시 15분 대한민국 승인과
신(新)유엔한국위원단을 파송해 통일을 도모할 것을 결의하는 미국·중화민국·호주의 공동 동의안이 48대6(기권1)으로 가결됐다.
반면 이에 대항해 소련이 상정한 5·10 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의 해체 동의안은 46대 6(기권3)으로 부결됐다.

12월 12일 기록에 ‘한국 문제 표결.
찬성 48, 반대 6, 기권 1(스웨덴), 결석 3’이라고 썼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거둔 승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물론 1919년
파리강화회의 회의장에 우리 대표는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당시 우리 손을 잡아 준 우방은 없었다.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1943년
카이로회담, 이를 재확인한 1945년 포츠담회담에도 우리의 의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그러나 67년 전 그때는 달랐다.
미국과 로마 교황청은 물론 프랑스, 중화민국, 필리핀 등 자유 진영의 전폭적 지지와 후원을 이끌어 냈다.
1948년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은 1905년 이래 이승만이 꾸준히 전개한 외교 독립운동의 최종 승리였다.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한 세기 전 서구 열강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 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결정에 비춰볼 때,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다. 이때 얻은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킨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었다. 오늘 우리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커졌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가 우리의 명운을 갈랐던 건국과
호국(護國)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강대국의 이익이 충돌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은 우리에게 야누스의 두 얼굴로 다가온다.
해방의 기쁨도 주었지만 분단의 고통도 준 까닭이다.
그러나
3년 뒤 탄생한 대한민국은 역설의 역사를 썼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해 기적을 일군 혁명적 변화의 싹은 그때 움트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인구 5000만 이상 나라 중 국민소득 3 만달러가 넘는 일곱째 국가로 ‘5030클럽’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67년 전 유엔 총회는 남북통일을 이룰 책무도 결의했다.
북녘에도 자유와 풍요의 빛이 깃드는 날이 ‘완전한 광복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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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할 민족의 영웅 안중근 - 미주 한국일보
가끔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포로 생활때에 바빌론 강가에서 망국의 한과 귀환을 기다리며 부른 원곡을 1972년 자메이카 그룹인 부르다가, 1978년 독일 그룹인 보니 엠이 리메이크하여 경쾌하게 불렀다는 ‘River of Babylon’과 바빌론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된 이스라엘 민족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예들의 처참한 모습을 담은 오페라[나부코]를 들으면서, 미국 땅에 디아스포라나 글로벌 노마드로 살면서 나에게 민족과 국가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구한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전개되었던 지각 변동에 대하여 보자. 서양의 개화문명과 수구문화 사이에 문호개방과 위정척사라는 국가의 외교적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에,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 1882년 임오군란과 제물포 조약,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4년 동학혁명, 1894-5년 청일전쟁, 1897년 대한제국, 1905년 일본제국주의 조선통감부 설치와 외교권 박탈, 1910년 한일 강제 합방 등... 당시 조선 반도는 강화도 조약이후에 조선 정부의 무능함과 내부분열, 호시탐탐 노리는 외세에 의해 30여년 만에 굴욕적인 국권 침탈을 당하는 한일합방이 되어버렸다.
당시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서양의 근대화의 길에서 산업장려와 국부를 쌓아가며 주위 나라에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북간도 지역을 진출하려는 때에 장애가 된 조선을 복속하는 일이 급선무이었다.
그 주역을 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그는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여세를 몰아 조선반도에서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대한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1905년 을사늑약 조인을 고종에게 강요하고, 임금을 강제 폐위시켰으며 한일합방을 서서히 진행시키기 위하여 최고 통치기관인 조선통감부의 수장을 맡아 무단정치를 펴면서 한국의 주권을 빼앗는 한일합방의 원흉이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 본국으로 돌아간 이토는 추밀원(국회)의장이 되고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 북동부를 포함한 동양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시찰 계획 중 일본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의 동청철도의 환승역인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 의사는 무사히 거사를 마치도록 기도하고 애국동지 우덕순과 조도선을 대동하였다.
1909년 10월26일 오전9시30분경 탕! 탕! 탕! 브로우닝식 권총 3발이 이토의 가슴과 흉복부에 명중하였다. 또 다시 3발로 하얼빈 총영사 가와가미,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 이사 다나까가 차례로 쓰러졌다. 거사는 완벽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의해 집압되었으나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라 외치고 체포되었다.
한국과 만주를 삼키려는 일제의 하수인 이토가 이렇게 피살되자 이 정보가 일본정부에 타전, 일간 신문들은 호외를 발간하였고, 해외에 망명,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일제히 환호를 외쳤으나 조정내부에서 사죄단을 파견하여야 한다는 등 법석을 떨었고 오히려 중국은 내심 좋아했다고 한다. 몇 년전 방문한 중국 뤼순에 안중근 의사를 투옥하고 순국한 감옥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비단 한 사람의 저격으로 그들의 만행이 멈출리야 있겠냐만은 국제법상 불법하에 한민족의 의연한 분노를 보여 줄 수 있었으며 이후에 일제의 더 혹독한 감시속에서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받칠 애국 충정의 도와선이 된 것도 사실이다.
역사학자 E. 카는 역사란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으며,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 되며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며,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노재화 / 전 성결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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