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사도행전 2:4) 성령 훼방죄


성령(聖靈)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를 위하여 성경적인 정의가 필요합니다.

첫째, 성령세례

성령세례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 설명합니다.

그 하나는 거듭난 자에게는 누구나 성령이 내재(內在)해 계시며, 성령이 신자 안에 계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성령세례의 결과이며, 중생한 자는 다시 성령세례를 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중생한 자는 오직 성령충만을 반복적으로 받을 뿐이라는 노선이다.

또 하나는 “세례”라는 말 자체가 물에 흠뻑 빠지거나 어떤 것에 몰입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성령에 의해 완전히 사로잡히는 체험에 강조를 둔 것이다. 중생할 때 성령세례를 받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중생 이후 한동안 시간이 경과한 후에 성령에 의해 세례 되어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 성결과 성령세례

웨슬리안 성결운동 그룹에서는 전통적으로 성결과 성령세례가 동일시되어왔다. 즉 성결의 체험은 성령세례의 결과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개혁파 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성결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이해와는 구별된다.

셋째,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과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

19세기 후반 미국의 개혁파 성령운동 노선에서는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죄성에 대한 제거설을 부인하고 일반적으로 죄의 경향성에 대한 반작용설이나 또는 억제설에 입각한 성결 관념을 따랐다. 그래서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살아갈 때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승리할 수 있다는 차원으로 성결의 문제를 풀어나갔으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봉사의 능력’ 중심의 성령세례를 강조하였다.

넷째, 웨슬리의 성결론과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

웨슬리의 성결론은 무엇보다도 웨슬리 본연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노선이라는 점에서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산물인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는 그 성격의 차이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웨슬리의 상용어(常用語)가 아니라, 웨슬리와 프레처(John Fletcher)와의 성령세례론 논의를 거치면서 형성된 후, 마침내 19세기의 복음적 부흥운동의 경향이 성결론에 첨가된 결과로 인해 활용되었다.

다섯째, 전통 오순절주의

전통 오순절주의는 1900년 초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20세기 은사적 기독교의 소위 ‘제1의 물결’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의 노선을 일컫는다.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회심 이후의 성령세례의 체험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세례 받은 자는 초대교회 때 나타났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 중에 특히 표적으로서의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은사갱신운동

은사갱신운동은 1960년대를 시점으로 오순절파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와 일부 복음주의 교파들에서도 시작되었던 ‘제2의 물결’을 가리킴이다. 은사갱신운동은 전통 오순절운동보다 훨씬 광범위한 신학적 유산을 지닌 성결파, 루터파, 개혁파는 물론이고 정교회와 가톨릭 교파와의 만남도 이루게 되었다.

일곱째, 제3의 물결

이는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초교파적으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능력 전도나 능력 대결을 강조하는 성령운동을 일컫는다. 성령세례 받은 명확한 증거로서 방언을 들지는 않는다는 점도 역시 제 3의 물결이 전통 오순절주의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여덟째, 은사적 기독교(Charismatic Christianity)

이 용어는 포우위(Karla Poewe)에 의해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전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성령의 역사와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노선의 흐름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교회사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모든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http://www.ecumenicalpress.co.kr/article.html?no=51230 

그동안 한국 신학계에는 많은 성령론 관계 문헌들이 소개되었고, 특히 ‘성령세례‘라는 주제는 성령론 연구의 주요 핵심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관계, 성령세례 시기의 논쟁,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비교, 방언 비판, 오순절주의 성령세례 비판 등, 주로 교리적 비평의 방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 서있는 교단의 입장과 교리적 노선을 배제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성령세례에 대한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령론의 갈등과 대립은 한국 신학계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최근 신약학자들의 성령세례 연구는 접근 방법에 있어서의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권성수, 김희성, 박형용, 이한수, 정동수 등의 성령론 연구는 종래의 교리 비판 중심의 방법론에서 벗어나,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해석학적인 접근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세례 본연의 의미를 밝히는 데 조력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원만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진의(眞意)를 찾는 일과 함께 또한 신자들의 다양한 상황에 입각한 경험의 차원이 함께 다루어져야만 한다고 본다. 즉, 성령세례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spiritual truth)의 차원과 각 사람에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경험(experience)의 차원 역시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 ‘성령세례의 양 차원’에 대한 풍요로운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롬 6:1-10, 고전 12:13 등의 성령세례에 대한 진술은 ‘영적 사실의 차원’을 매우 획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의 ‘성령의 권능’ ‘성령 받는 것’ ‘성령이 임함’ 등에 대한 기록들은 성령세례의 ‘경험의 차원’에 더욱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획일적이라고는 볼 수 없게 여러 양상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현상이나 경험의 차원을 분석하는 데는 성서해석이나 교리 비평적인 접근 방법은 물론 또한 역사신학적인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성령세례에 대한 연구를 이같은 관점에서 시도하려는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볼 때, 사실 역사신학적인 관점에서 성령론에 접근한 자료들은 기타 관점에 비해 많지 않다. 더군다나 현재까지 한국 기독교계의 성령세례 연구 자료들을 초교파적으로 총괄하여 역사적으로 분석한 저술은 더욱 드물다. 필자가 지닌 분명한 전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향후 성령론의 상호 전통에 대한 이해와 조화의 정신 속에서, 여러 전통들 사이의 장점들을 상호 교류, 보완한 통합성을 갖춘 ‘통전적 성령론’의 적용이 전개되리라는 점이다. 이 연구는 한국교회의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사적인 방법으로 본 연구의 전개를 하였다. 먼저 다룰 것은 16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의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의 배경을 다룬다. 그리고 각각 개혁파 계통과 웨슬리안-성결 그룹의 성령세례 이해를 각각 연대기적(年代記的)인 흐름을 따라 살펴본다. 그런 후에는 시대순으로 가장 늦은 전통 오순절주의로부터 ‘제3의 물결’까지를 다루기로 한다. 글의 뒷부분에서 필자는 ‘성령세례론 유형 분석’을 통해 이 연구에서 다룬 중요한 저자들의 성령세례론을 분석하여 여러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분류는 특정 교리나 교단 노선을 염두에 두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역사신학적인 분석에 의해 유형을 분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러 유형들이 결국 ‘성령세례의 양 차원’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지금까지의 연구에 대한 전망적인 차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성령세례론의 각 전통간의 상호 이해와 조화를 통해 진전되는 ‘통전적 성령론’(Wholistic Pneumatology)의 내용을 소개한다. 그리고 통전적 성령론의 적용을 통해 얻어질 바람직한 21세기 성령운동의 핵심인 ‘성령의 주되심’(Lordship of Holy Spirit)의 내용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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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안에서의 성령세례에 대한 연구는 1930년대 이후에야 신학적 논의의 주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1920년 이전에는 주로 내한 선교사들의 글에서 성령세례(성신세례)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으며, 1920년대에 들어오자 성결교의 김상준, 이명직 그리고 장로교의 윤필성 등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문헌을 통해 이에 대한 언급을 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는 이명직, 이건, 정경옥, 변홍규 등이 구체적으로 성령론을 다룬 글들을 성결교의 ‘활천’과 감리교의 ‘신학세계’에 실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글에는 당시의 이른바 방언파에 대한 경계와 함께, 성령세례 받은 표적으로서의 방언에 대한 명백한 부정이 나타난다. 그 이유는 당시에 황국주, 유명화, 백남주 등이 거짓 계시와 방언, 예언을 동반하는 종교혼합주의적 영성운동을 확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마침 오순절주의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활동, 방언에 대한 비판이 강도 높게 일어났던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이 당시 장로교 계통에서는 성령세례의 체험을 강조하는 중국인 교수인 가옥명(賈玉銘)의 ‘성령론’이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후 194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문서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됨에 따라 성령세례에 대해 연구한 문헌이 발견되지 않는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이명직과 임종우가, 그리고 1960년대에는 김응조, 손택구 그리고 이종규 등의 성결교인들이 성령세례에 대해 연구했고, 장로교에서는 이인한과 박형룡이 성령세례에 대한 구체적인 글을 남겼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으로 박형룡의 성령세례론이 시작되는데, 그의 노선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할 때 핫지(Charles Hodge)나 워필드(B. B. Warfield) 등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성령 은사의 중단성에 강조를 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장로교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의 대표적 학자인 차영배의 글이 박형룡의 노선과 대치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통 오순절주의 노선의 성령세례론을 다룬 조용기의 ‘성령론’이 또한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 1980년대에는 웨슬리안 계통에서 김응조, 김용연, 조종남, 이성주, 한영태 등이 성령세례에 관련 연구를 하였고, 개혁파 계통에서는 차영배, 박영선, 안영복 등의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과 신성종, 김해연 등의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의 신학적 갈등이 눈에 띤다. 1990년대 이후에는 웨슬리안 계통에서 이성주, 성기호, 한영태 등의 조직신학자들과 함께, 이응호, 박명수, 정상운, 주승민, 배본철 등 역사신학자들의 연구가 또한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개혁파 계통의 안영복, 하용조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에서 연구했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전통 오순절주의 입장에서 박정렬의 ‘오순절신학’과 함께 조용기의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사도행전 강해’ ‘오중복음 이야기’ 등의 저술이 방언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강조했다. ‘선교와 에큐메닉스 중심의 한국교회사’에서 필자는 한국교회 성령운동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복음적 성령론의 유형을 소개했으며, ‘21세기 예수 부흥’과 ‘성령보고서:사역, 운동, 상담’에서는 성령세례의 이해와 경험을 포함한 ‘성령의 주되심’에 대해서 연구했고, 박사학위(Ph.D.) 논문으로 “한국교회의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제출한 바 있다. 필자의 글이 지닌 연구사적 의미와 독창성은 다음 두 가지 점에 있다. 첫째, 그동안 한국 교계에서 일어난 성령세례론에 대한 여러 혼선과 갈등들을 역사적인 분석을 통해 새롭게 정리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제까지 학문적 논제로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던 성령세례의 경험이나 그 능력의 차원을 한국 신학계에 새롭게 부각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성령론에 대한 논제는 주로 성령세례의 시기, 중생과의 관계성, 용어 정의, 은사와의 관계성 등에 관한 것이었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초기 한국교회 성령론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직접적으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근대 영미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성령운동의 결과였다. 당시에는 매우 복잡한 성령운동의 조류들이 있었으나, 크게 보면 개혁파, 웨슬리안파 그리고 오순절파의 세 그룹으로 그 성격이 분류된다. 이 세 조류들은 각각 한국교회 성령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들 성령운동의 배경을 살펴보면 18세기 존 웨슬리의 성결론과 17세기 청교도의 성령론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16세기 존 칼빈의 성령론에서 그 영향력의 출처를 찾게 된다. 필자는 종교개혁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적 성령운동의 저변에는 최소한 칼빈이 제시해 놓은 성령의 내적 증거,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화시키는 능력으로서의 모티브가 짙게 내재되어있다고 본다. 칼빈 사상에 있어서의 성령은 마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있어서 필수적인 중보자 역할을 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향하도록 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 칼빈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하여 논하는데, 여기서 ‘내적’이란 기록된 말씀 그리고 이 기록된 말씀에 기초한 설교 말씀을 외적인 것으로 볼 때, 이와는 상대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칼빈이 ‘하나님이 친히 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할 때, 성령의 사역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가 영적인 생활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생명과 성령에의 참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연합 자체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일으키는 움직임이 시작될 수 있는 곳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며, 그러한 시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로부터이다. 이와 같은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는 모든 복음적인 성령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어온 내용이다. 이는 우리 신앙의 근본이 그리스도에게서 말미암으며 또한 우리 신앙의 목표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일에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믿음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게 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또 우리는 그분의 성령에 의해 살게 된다. 이 같은 중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옛 사람에 대한 억제와 새로운 삶에의 참여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직접 비롯되어 중생의 최후 목적인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죄인 되었던 상태에서 이제는 실제로 거룩한 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점차 성화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가 아직 실제적인 의와는 사실상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의 삶이 반드시 금욕이라는 회개의 소극적 측면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신자가 이 땅에서 계속 죄인으로 머물러 있고 저 세상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성화를 완성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우리는 결국 승리의 확신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소생시키시고 의롭게 여기신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선택의 은사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이 은사는 또한 그들로 하여금 죄와 효과적으로 싸우고 거룩한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견인의 은사를 수반한다. 이처럼 칼빈의 ‘성화시키는 능력’은 청교도들의 성령론에서 구체화되었으며, 나아가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는 웨슬리 성령론의 골격을 이루게 된다. 단적으로 죄와 성화의 교리에 있어서 칼빈이 통시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웨슬리는 각각 이분법을 적용하였다는 점이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의 핵심이라고 본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칼빈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청교도 신학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로서 구약과 신약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되었다. 성경은 청교도의 안내서였고 그리스도는 이 안내서의 핵심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가 성도의 생존과 애정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격려되었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성례전이나 예배 등 모든 교회 기능에 있어서 칼빈적 전통에 따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중시하였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고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청교도들의 성령론에 있어서 후대에 미친 특별한 발전은 양심에 대한 교리이다. 양심이란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하시는 지적 기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치 평가에 있어 양심의 조명과 교훈과 정화를 받아 영혼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보다 인간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양심을 드러내고 복종하기 전에는 진정한 영적 깨달음이나 참된 경건이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양심을 향한 해설자들이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선과 악, 의무와 의무 포기에 대한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권위있게 처리하는 양심의 이성적 기능, 도덕적 자각과 판단의 능력을 중시하였다. 양심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기 위한 반향판으로서, 인간 안에 두신 기능,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비취는 도덕과 영적 진리의 빛을 받아 우리의 행위와 욕망과 목표와 선택들에 집중시켜 반영하는 거울로 보는 청교도의 양심 개념을 충분히 정당화해준다. 성령의 역할은 중생하지 않은 자들을 은혜의 상태로 이끌어 내는 데 있어 동반자의 기능이 강조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역사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을 때 그의 양심은 악한 상태와 잠든 상태 사이에서 마치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은혜의 첫 번째 사역은 그의 양심을 일깨워 그에게 강제로 하나님의 명령들을 직면하게 하여 그의 범죄, 무력, 패역, 부정, 소외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깨닫게 한다. 양심은 하나님 자신의 영과 함께 연합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길로 우리를 지도한다. 그러므로 성령과 양심은 함께 반항을 받거나 순종을 받거나 하며 함께 탄식하거나 즐거워한다.(롬 8:16).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 즉 영의 증거를 확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증거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의 증거란 단지 인간 자신의 영의 증거 또는 간증을 풍성하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성령께서도 증거하시는 것인데, 더 이상 간접적으로 하시지 않고 즉각적이고도 직관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청교도들이 강조한 확신의 교리 역시 후대에 미친 성령론의 유산이라고 본다. 청교도들은 참으로 중생한 자들에게는 어떤 증거가 주어진다고 믿었다. 죄로부터 은혜로 나아갈 때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이를 알 수 있는 것이고, 남들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증거들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복음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성령의 이 증거는 개인의 믿음에 있어 기본적 요소이며, 성령께서 주시는 복음의 이 원만한 이해의 확신은 구원에 대한 개인적 확신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 영적 지식이 유혹들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는 수도 있으나, 진정한 영적 지식은 변함없는 구원의 확신과 함께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청교도들이 형성해 나간 양심의 교리, 성령의 증거에 대한 해설, 확신의 교리 등은 18세기 웨슬리의 성결론을 비롯하여 이후 성령론의 발전에 큰 기초석이 되었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존 웨슬리의 성결론은 현대 성령론 이해에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의 성결론은 많은 전통의 조명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 중에서도 확신의 교리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1738년 5월24일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체험을 통해 분명하게 경험되어진 바 있다. 이 확신의 교리의 자원은 가까이는 모라비안파였고 멀리는 청교도였는데, 특히 그의 이 체험에 대한 심리적 이해의 배경은 직접적으로 청교도들의 ‘충만한 확신’의 교리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1740년경에 이르러서는 웨슬리의 성결론이 잘 정리되어지게 되었다. 신자가 경험하는 구원의 과정은 두 단계이다; 첫째는 회심 또는 중생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또는 성결이다. 첫째 체험에서 신자는 그의 자범죄를 사함받는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유전된 죄성은 남아있는데, 이는 제 이차적 축복인 성결의 은혜에 의해 제거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죄 없는 완전’을 가르치지 않았다. 크리스천의 완전이 무지, 과오, 결점 그리고 유혹 받을 가능성 등에서의 완전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죄란 근본적으로 자유의지의 고의적 행사였다. 그러므로 그가 가르친 완전의 교리는 차라리 동기와 욕망에 있어서의 완전이라 할 수 있다. 죄없는 완전은 오직 죽음 이후에만 찾아올 수 있다. 성화된 영혼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 경건훈련 그리고 세속적 욕망의 기피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칭의와 중생은 그 자체가 완전히 성화되는 것이 아니요, 이것은 성화의 문이므로 완전 성화까지는 계속적인 성장과 발전이 필요하다. 웨슬리의 완전 성화의 교리는 죄에 대한 이중적 견해에 의하여 성립된다. 칭의의 단계에서는 자범죄의 죄책이 용서받으나, 순간적인 성결의 체험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정결하게 씻음을 받게 되고, 이 원동력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과 봉사의 승리하는 삶을 가능케 해준다. 웨슬리의 성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웨슬리와 존 프레처 사이에 있었던 성령세례론 논의도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프레처도 역시 웨슬리의 제자로서 전형적인 감리교 설교자였지만, 그의 지속적인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히 세례받는 일에 있었다. 결국 프레처와 또 그와 같이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조셉 벤슨의 노선이 웨슬리에게 하나의 큰 골칫거리로서 다가왔다. 웨슬리는 벤슨에게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도 역시 성령의 증거를 지닌다고 확고히 답변하였다. 그러자 벤슨과 프레처는 함께 연대하여 웨슬리의 입장에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웨슬리가 ‘성령을 받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종종 ‘성령의 증거를 받는 것’을 의미했고, 또한 ‘성결케 하는 은혜’로서의 의미도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후자의 의미가 벤슨과 프레처가 취했던 노선이고, 이 용어들의 서로 다른 시각의 차이가 웨슬리와 프레처 사이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주원인이었다. 그러나 의견이 교환되어지자 결국 둘 사이의 오해가 풀리게 되었고, 이에 대한 모든 논쟁은 끝나게 되었다. 마침내 1775년에 웨슬리가 자신의 친구에게 쓴 글에서 프레처의 노선을 흔쾌히 추천하며 동조하는 내용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웨슬리와 벤슨 그리고 프레처는 완전히 동의를 하게 되었고,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프레처의 오순절적 성령세례론은 감리교도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이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후 ‘교회에 대하여’(1785)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제시하였다. 모든 의롭다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낮은 의미에서’ 성령을 받은 자들이며, 성령세례의 체험은 온전히 성화된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19세기 성령 운동의 흐름

19세기 미국 교회에서는 성령론에 있어서 여러 다양한 견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날카로운 신학적 논쟁의 주제로서 성령론이 달아오르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성령론의 이견들로 인해 19세기 미국 교파 분열의 주된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19세기에 성령론이 크게 부각된 이유들을 몇 가지 들 수 있다. 당시 미국에는 초월적인 신념들의 도전이 미국적 사상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성은 곧 미국의 기독교계에 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삶에 대한 강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서 부흥사들은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영적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관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 영국에서 건너온 감리교의 영향이 미국에서 강력해지자, 자연스럽게 제 2차적 축복으로서의 성결에 대한 강조가 성령운동에 큰 동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남북전쟁(1861-5) 전 미국에서는 성령론에 대한 강조가 다음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첫째, 1820년대 이후부터 ‘성결’에 대한 질문이 초교파적으로 일어났다. 이는 전도와 사회 개혁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던 미국적 상황으로 볼 때 필연적인 질문이었다. 둘째, 신앙생활에 있어서 인간 자유의지의 능력과 책임을 강조하는 신학적, 문화적 낙관주의가 지배적이었다. 이처럼 전쟁 전, 특히 1840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주의가 미국의 사회적, 지성적 그리고 종교적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 되는 주제가 되어갔다. 1857-8년의 부흥운동 기간에는 마치 초대교회의 오순절 사건과 같은 성령의 부어짐이 교회에 임하고 있다는 신념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오순절’이라는 고전적 용어가 성령운동에 새롭게 등장하여, 마침내 전쟁 이후 문화적, 신학적, 교파적 진전에 있어서 하나의 큰 조류를 형성해가게 되었다. 1865년에 전쟁이 끝나고 1870년대에 접어들자,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미국 개신교는 또한 영국 등지로부터 건너온 성서의 고등비평과 다윈주의에 노출되어 크게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특히 남북 전쟁 이후 임박한 종말론 사상이 팽배해지면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대대적인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전쟁 이후의 성령운동은 이같은 도전과 요청에 직면하여, 전쟁 전의 성령운동이 인간의 의무와 능력을 강조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능력에 대한 비관적 견해와 함께 특별히 성령의 능력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지게 되었다. 성령에 관해 언급하는 성경 구절의 사용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1870년 전에는 주로 죄성의 정화와 관련된 구절들이 많이 사용되었으나(마5:48;요17:20-23;고후7:1;살전5:23-23), 전쟁 이후에는 능력에 관계된 사도행전의 구절들이 많이 인용되었다(행1:8,2:4,19:2). 또 전쟁 이전의 성결론에 있어서는 대개 그리스도 중심적 성결에 강조점을 둔 반면, 전쟁 이후에는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사역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었다. 이처럼 전쟁 이후 인간의 능력에 대한 불신은 성령운동에 ‘성령의 권능’, ‘권능을 주심’ 또는 ‘권능 받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등장시켰다. 그래서 웨슬리안 성결운동 그룹에서는 오순절날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세례‘에 의해 성화되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봉사의 사역을 위해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정화 차원과 함께 능력 차원을 새롭게 부가시킨 것이다. 이제 초기 한국교회 성령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영미를 중심으로 한 19세기 성령운동의 커다란 세 조류인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과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근대 오순절운동을 차례대로 살펴 보기로 한다. 이 세 조류 중 처음의 것은 초기 한국 장로교 성령 이해에, 둘째 것은 성결교회와 초기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웨슬리안-성결 교단들의 성령론에, 그리고 마지막 것은 오순절교단에 각각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근대개혁파 성령운동

미국의 자유로운 교회 체제는 부흥운동의 발생을 용이하게 해주었고, 완전을 추구하는 경건주의적 기질과의 만남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미국의 부흥운동의 성격이 형성되어갔다. 완전주의 부흥운동의 열기 속에서 여러 급진적인 성결운동들도 미국교회 내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새로운 운동들에는 초월주의, 진보주의 그리고 낙관주의 등의 요소들이 뜨겁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 아래서 1830년대에는 성결에 대한 급증하는 질문들이 개혁파 노선에서 일고 있었다. 19세기 장로교의 신학적 이슈는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었다. 그 중에서 인간의 부패성을 강조하는 파가 프린스톤파(구파)였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파가 유니온파(신파)였다. 구파 칼빈주의는 인간의 무능력을 강조한 나머지 숙명론으로 기울어진 감을 주었고, 이같은 소극적인 인간론은 새로운 국가적 이상에 적합치 않았다. 제2차 대각성운동 기간에 형성된 뉴헤이븐신학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과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였으며, 오벌린 완전주의자들은 개혁주의 계약 개념에 이같은 노선을 첨가하여 나름의 성결론을 형성해 나갔다. 특히 1830년대 후반에는 미국 개혁파 전통에서 새로운 형태의 완전주의가 찰스 피니와 아사 마한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피니는 개혁파 노선에 있어서 자유로운 구원과 인간의 선택을 강조한 완전주의자들 중의 대표자로 들 수 있다. 피니는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을 거친지 몇 년 후, 두 번째 축복을 체험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능하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오벌린대학 동료들은 이른바 ‘오벌린 완전주의’라고 불리는 가르침을 전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부흥운동에 인간의 심리학적 기초에 근거를 둔 수단 또는 기술에 대한 강조를 한 일에 있어서도 그 이전의 부흥사들과는 구별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후대에 ‘현대 부흥운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웨슬리안-성결 그룹의 뵈베 팔머처럼, 피니도 역시 성화의 점진적인 면보다는 즉각적인 변화와 고백에 중심을 두는 방향에 강조를 하였다. 그리고 이전의 개혁파 부흥회가 회심을 궁극점에다 두는 점에 비해서 볼 때, 피니는 회심을 신앙경험의 시작으로 보는 방향으로 변화를 보여주었다. 피니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가 열망하는 성결의 단계를 단지 자유의지를 훈련하고 ‘올바른 의도’를 계발함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같은 피니의 오벌린신학은 그가 받은 칼빈주의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웨슬리안 성결론과는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피니는 신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율법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노선이었다. 반면에 웨슬리안 성결론은 의지적 결단은 성결체험에 대한 동기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성결체험을 주신다는 노선이다. 1858년에는 장로교 목회자인 윌리암 보드맨에 의해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특히 감리교 전통 이외의 사람들에게 성결의 은혜를 해석할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개혁주의 전통의 긍정적인 측면,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웨슬리안 완전주의나 오벌린 완전주의와 동일시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칭의의 주로서 고백하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또한 성결의 주로서 고백하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후자의 믿음은 신자의 두 번째 회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하고 난 후,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의식적인 증거’를 얻게 된다. 그는 이 두 번째 회심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더 높은 삶’ 운동에는 보드맨 외에도 로버트 스미스와 한나 스미스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비록 그들은 미국인이었으나, 그들의 영향력은 영국에 크게 미쳐서 마침내 케직운동에도 큰 감화를 주었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케직운동의 중요한 지도자인 이반 홉킨스는 죄의 뿌리를 죄성이 아닌, 악에 대한 경향성으로 설명했다. 그러므로 성결은 고정된 정결의 상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유지되어야 되는 상황이다. 그는 죄의 완전한 분리나 제거가 아니라 죄악의 경향성에 대한 ‘반작용’(counteraction)을 주장하였다. 이같은 홉킨스의 견해를 핸드리 모울이 다소 온건한 형태로 추종하였다. 이같은 초기 케직의 죄에 대한 이해가 후기에 와서는 세대주의적 영향으로 마이어와 같은 이들을 통해 육체적 전적 부패성과 죄성의 억제설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졌다. 그러나 고든, 피어슨, 무디, 토레이와 같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성결론은 세대주의 견해와 케직의 가르침 사이에 위치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세대주의적 두 본성 이론보다는 케직에서 주장하는 죄성에 대한 승리의 방향에 대해 더 많은 강조점을 띠었다. 모울, 마이어 그리고 앤드류 머레이와 같은 케직운동의 지도자들은 1870년대 이후 영국인의 영적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사역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모울은 그의 저서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의 능력을 의지함으로서 죄로부터 해방 받게 된다고 보았다. 이같은 케직의 성령론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결에 대한 케직의 가르침에는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한 죽음’(death to self)이 먼저 강조된다. △그 후에는 성령의 충만을 즉각 받아들이는 일이 요구되는데, 물론 여기에는 온전한 헌신이 전제된다. 케직의 가르침에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보다는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였다. △마지막으로 강조되는 것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서이다. 비록 죄를 이기는 능력과 봉사의 능력이 강조될지라도, 케직 가르침의 최종적인 극치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데 있다. 아사 마한이 1870년에 발행한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Ghost)는 북미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는데, 이 책은 그가 전에 영향을 받은 오벌린 완전주의 등에 기초한 것이었다. 마한의 가르침 속에서 특징적인 것은 “사람이 구하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견해였다. 그는 에베소서와 사도행전의 몇몇 특별한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봉사와 거룩한 삶에 있어서의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성령세례의 결과를 주로 ‘영원성’과 ‘능력’이라는 의미로 기술하고 있거나 좀더 자세히 말하면, (1) 우리의 자연적 능력에 대한 각성 (2) 인내하는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을 주는 것 (3) 진리에 대한 영적인 이해 (4) 소망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 (5) 성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보다 친밀한 교제 (6) 깊고 영원한 영적인 축복 (7) 신자간의 영의 하나됨으로 묘사한다. 찰스 피니도 마한과 마찬가지로, 그의 후기 사역에 있어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에 그는 오벌린 완전주의의 선구자로서 참 신자에게 나타나야만 할 변화된 윤리적 삶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신자들에게 성화된 삶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성결이란 우리의 모든 힘과 관심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자유의지와 믿음을 활용하여 성화된 삶을 살아가는 능력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그의 후기 사역에서는 그 중심점이 우리의 자유의지와 믿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성결을 부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하고, 이 은혜는 신자가 자신의 의지를 성령의 인도와 지도와 영향과 통치하심에 온전히 헌신하게 될 때 주어진다고 했다. 피니의 성령론이 가장 완숙하게 나타난 것은 그의 마지막 저술인 ‘능력의 부여’(The Enduement of Power)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핵심은 신자는 성령세례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인 지상명령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1870년대 이후부터 미국의 대중복음전도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서 무디를 들 수 있다. 부흥운동가로서, 비록 신학적인 깊이는 없으나, 그의 저술 속에는 거룩한 삶과 특히 봉사의 능력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타난다. 무디는 자신이 1881년에 저술한 ‘은밀한 능력’에서 신자는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디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이미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의심치 않았다. 무디는 신자가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고,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준비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같은 온전한 준비가 이루어진 후에, 신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이 임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기다리던 이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는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의 삶 속에 성령의 능력을 받은 열매들이 뒤따르게 된다고 보았다. 무디는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복음적 용어로서 이른바 ‘능력’을 갖춘 크리스천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능력을 소유한 증거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목회자들에게는 설교에서의 특별한 능력을 말하기도 하고, 한 차례의 특별한 기간에 교회에 나타나는 능력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게 이 용어는 새로운 회심자를 교회로 인도해 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이 능력을 소유했다고 하는 사람에 대한 궁극적인 증거였다. 무디에 의해서 강조되어지던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이는 토레이이다. 무디는 자기가 인도하던 부흥운동에 자주 토레이를 초청하여 성령세례에 대해서 가르치도록 했다. 토레이는 성령세례가 명확한 체험이라고 강조하면서, 신자들은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토레이는 성령세례가 중생시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과는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했다. 특히 그는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열매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고든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유익을 깨닫도록 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오순절 날 교회에 성령이 임하신 까닭은 교회로 하여금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하려함이라고 했다. 그는 성령 세례가 오순절날 교회에 한번에 임했으며, 그 후에는 성령께서 교회 내에 지속적으로 거하시게 된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연합선교회의 창시자인 심프슨도 역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것은 단지 거듭난 신자 속에 성령께서 자동적으로 거하신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은 신자가 특별하게 영접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심프슨도 성령세례를 성결의 차원과 봉사의 능력 차원 모두와 관련시켜 받아들였다. 성결에 대한 심프슨의 입장도 역시 개혁파 ‘더 높은 삶’ 노선과 비슷했다. 죄성의 정화차원을 강조한다거나 성결이 신자의 영혼 속에 이루어진 어떤 구체적인 상태라고 보기보다는, 내주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복종의 삶을 통해 그분이 준비하신 성결의 은혜를 적용하는 것이 성결이라고 보았다.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첫 번째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에 있다. ‘더 높은 삶’의 성령론이라든가, 케직에서 시작된 성결운동, 그리고 고든이나 심프슨의 강조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두번째 핵심으로서, 마한이나 무디 그리고 토레이에게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는 중생한 자가 ‘위로부터 받는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 관념을 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핵심은 내한 선교사들을 통해 초기 부흥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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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웨슬리안 성령운동

하나님의 영(총20회)

 

(구약10회)

[창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출31:3]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출35:31]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민24:2]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삼상10:10]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11:6]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삼상19:20]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삼상19:23]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대하24:20]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겔11:24]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신약10회)

[마3: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12: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롬8: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전2: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7:40]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전12: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빌3: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요일4:2]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여호와의 영(총6회)

[삿3:10]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삿14:6]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삿15:14]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상10:6]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삼하23: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사11: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예수의 영(총1회)

[행16: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아버지의 영(총1회)

[마10: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리스도의 영

[롬8: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벧전1:11]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총1회)

[빌1:19]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아들의 영(총1회)

[갈4: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순간적 성령충만(돌발적 성령충만)

[눅1: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1: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1: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눅4: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행2: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4: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행4: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6: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행6: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7: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9: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11: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행13:9]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13: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2. 장기적 성령충만(인격적인 성령충만)

[엡5: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지난 주일에 “영생”에 대한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It is as if the dew of Hermon were falling on Mount Zion. For there the LORD bestows his blessing, even life forevermore.)  
영생의 복을 받으셨으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When anyone is joined to Christ, he is a new being; the old is gone, the new has come.)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오직 예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만 사랑하려면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지난 날  예수만을 사랑하지 못했던 거짓된 삶을 회개하고 가식적인 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령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구원 받았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것을 알게 하신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즉 성령께서 깨우쳐 알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제삼위의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모두가 성령과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충만이란 가득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부 하나님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자 예수님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 하나님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채워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영으로 채워진 것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날 성령이 임재 했을 때 성령의 충만은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듣고 보면서 성령 충만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최초의 성령 충만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이라고 하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합니까?

하나님은 영(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예수님은 영(사도행전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성령은 능력(로마서 15:13, 18)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성령 충만이란 능력의 영이 사람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알렉사드리아 호를 타고 로마로 향하여 항해할 때 큰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습니다. 배 안에는 276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제는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사도행전 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사도행전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 충만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한 현상이 아니라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를 사람들이 깨닫고 알게 하려면 어떤 사건이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최초의 성령 충만의 사건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때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합니다.

첫째, 현상(現象)이 아니라 상태(狀態)

현상(現象)
- 나타날 현(현), 옥 다음가는 돌 현(현)
- 코끼리 상(象)
- 나타나다, 옥 다음 가는 돌, 나타냄, 현재, 이승

상태(狀態)
- 형상 상(狀), 형상 장(狀), 문서 장(狀)
- 모양 태(態), 모습 태(態)
- 사물이나 어떤 작용이 드러나는 바깥 모양새
- 오관 또는 심리 작용의 매개에 의해 의식으로 발현되는 모든 것

성령 충만이란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들 예를 들면 방언을 말하는 것, 병을 고치는 것, 귀신을 내쫓는 것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성령 충만이란 이와 같은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또는 말씀에 순종하며 예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한다.

둘째, 복종하는 삶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이란 초대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목적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회 부흥도 중요하지만 말씀에 따라 철저하게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였다. 복종이란 인격적인 복종을 말한다.

셋째, 친밀한 교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하였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될 때 나타나는 것은 두려움이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이란 단어가 신약 성경에서 “191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가 “49구절”에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 대략 성령이란 단어가 25% 사용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가 신약 성경에서 “15회”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4번(1:15, 41, 67, 4:1)
사도행전에서 10번(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에베소서에서 1번(5:18)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성령 충만”이란 용어가 14번 사용되었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란 말이 93%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성령”과 “성령 충만”이란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성령과 성령 충만의 역사가 나타나서 초대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성령행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이란 말을 바울 서신에서 단 1회 사용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주로 “누가”에 의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용했습니다. 신약 성경 27권에서 13권이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이란 말을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단 한 번만 소개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 충만”이란 주로 누가에 의해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말하는 “성령 충만”이란 무엇일까?

“성령 충만” 이란 용어를 사전적 의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聖靈, the Holy Spirit)” 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삼위 하나님을 말합니다.
“충만(充滿, be filled with)” 이란 가득 채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 이란 “성령 하나님으로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들(사도행전 7:51)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 충만”이며 “말씀 충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채워야 하며, 또 채워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내 안에 채울 수 있을까요?
말씀을 어떻게 내 안에 채울 수 있을까요?
또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채워진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성령 하나님을 내 안에 채우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커다란 그릇과 물과 스펀지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커다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워 넣습니다. 그리고 스펀지를 물 위에 올려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스펀지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면 스펀지는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스펀지를 물속에서 집어들도 손으로 누르면 스펀지에 흡수되었던 물이 다시 스펀지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자, 이제 큰 그릇을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을 성령이라고 하고 스펀지를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인 스펀지가 물속에 들어가서 물을 최대한 흡수하여 물속에 가라앉는 것을 “세례” 라고 하며 “성령 충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洗禮)”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907, baptizó)” 라고 합니다. ‘밥티조’는 “잠기다, 가라앉다”는 뜻입니다(to dip, sink). 따라서 물을 흡수한 스펀지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은 “세례”라고 하겠습니다.

스펀지가 물을 최대한 흡수한 것을 충만 이라고 합니다. 즉 성령 충만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스펀지가 나는 물을 흡수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며 거부하면 물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펀지가 물에 닿는 순간 자연스럽게 물을 흡수하면 스펀지는 물 위에 떠 있지 않고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스펀지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 할 때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드릴 때 실현 될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스펀지가 물속에 가라앉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스펀지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흡수한 물을 모두 포기하면 다시 물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성령 세례를 받고 구원 받은 사람으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몸부림을 쳤을 때 나도 모르게 물이 점점 내 안에서 빠져 나가버립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세상살이가 지옥과 같고 신앙생활에도 기쁨이 없습니다. 이때 다시 물속에 깊숙하게 들어가려면 내 주장과 의지와 습관과 지식과 같은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다시 성령 충만한 삶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물을 성령으로 스펀지를 사람으로 비유하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스펀지를 물속에서 꼭 짜면 어떻게 될까요? 스펀지는 여전히 물속에 있지만 스펀지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물이 스펀지를 채우지 못합니다. 스펀지가 다시 물로 채워지려면 스펀지를 놓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 충만의 경험은 물속에 있는 스펀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펀지를 누르는 것과 스펀지를 내려놓은 것은 바로 내가 갖고 있는 통제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넘겨드리면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간섭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통제권을 내려놓는 순간, 성령님의 통제가 여러분의 삶 속으로 물밀 듯이 다시 밀려들어올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이상하고 신비한 경험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은 성도로서 당연히 살아야 할 삶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충만한 모습이 방언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서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습니다. 서로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 반드시 그 언어를 내가 들을 수 있도록 통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통역도 없이 각자 자기 언어로 알아듣고 이해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최초로 나타났던 성령 충만의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 방언(글롯사, γλωσσα 혀, 언어, tongue, language) 
왜 방언을 말했습니까?
물질이 아닌 성령께서 내 안에 가득하게 임재 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구원의 표시가 아닙니다. 어느 교회와 교단에서는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 받지 못했다고 하여 방언을 연습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방언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지만 성령을 받은 증거의 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기 전에 방언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예화 #.1) 성령 충만의 처음 사건이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는 지금도 성령 충만의 시작은 방언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했던 학생이 입학 한 후에 장로교 신학대학으로 학교를 옮기에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순복음 신학교에서는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하여 방언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로교 신학대학에 입학한 후에 어느 날 기도하는데 갑자기 방언이 튀어나와 그때부터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언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성령의 역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화 #.2) 어느 시골 교회의 목회자의 간증
내가 그랬다! 내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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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충만

1.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충만

1. [사도행전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2.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 [사도행전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4.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 [사도행전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6.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왜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이란 말을 누가보다 훨씬 적게 사용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성령 충만이 소개되기 전에 성령에 관한 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성령으로 명하시고” 라는 말씀은 “성령으로 여러 가지를 지시하시고” 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제까지는 요한의 물 세례만 받았지만 앞으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증인이 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경이 응하였으니 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예언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성령께서 행하신 것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여러 가지를 지시하신다.
둘째는 성령 세례를 베푸신다.
셋째는 땅 끝까지 증인이 되게 하신다.
넷째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신다.
다섯째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하신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복음의 내용을 자기들의 언어로 듣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이란 서로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께서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을 하게 하셨다.

물을 컵에 채운다는 것은 누구든지 볼 수 있고 할 수 있지만 성령 충만이란 성령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 채우며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시대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성령 충만은 방언을 말하므로 겉으로 드러나게 임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의 처음 사건이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는 지금도 성령 충만의 시작은 방언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했던 학생이 입학 한 후에 장로교 신학대학으로 학교를 옮기에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순복음 신학교에서는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하여 방언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로교 신학대학에 입학한 후에 어느 날 기도하는데 갑자기 방언이 튀어나와 그때부터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언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성령의 역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 이란 용어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령(聖靈)” the Holy Spirit
“충만(充滿)” be filled with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삼위 하나님입니다.
충만이란 가득 채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성령 하나님으로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데 성령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채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 대야에 물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스펀지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스펀지를 대야에 넣는다면 스펀지를 서서히 물을 흡수하여 물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스펀지가 물속에 잠기는 것을 “세례”라고 하겠습니다.
세례란 “잠기다(밥티조,  βαπτίζω. 907, baptizó)”는 뜻입니다(to dip, sink).

물을 성령으로 스펀지를 사람으로 비유하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스펀지를 물속에서 꼭 짜면 어떻게 될까요? 스펀지는 여전히 물속에 있지만 스펀지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물이 스펀지를 채우지 못합니다. 스펀지가 다시 물로 채워지려면 스펀지를 놓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 충만의 경험은 물속에 있는 스펀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펀지를 누르는 것과 스펀지를 내려놓은 것은 바로 내가 갖고 있는 통제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넘겨드리면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간섭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통제권을 내려놓는 순간, 성령님의 통제가 여러분의 삶 속으로 물밀 듯이 다시 밀려들어올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이상하고 신비한 경험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은 성도로서 당연히 살아야 할 삶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이란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의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차이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15회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에서 4번(1:15, 41, 67, 4:1)
①. 1:15, 이는 저가(요한)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②. 1:41,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③.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④.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누가복음에서 성령 충만의 사건은 예수님을 비롯한 개인에게 나타난 사건이었다. 이것은 “성령 충만”이란 “예수를 증거 하려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도행전에서 10번(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①.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②. 4:8,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③. 4:31,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④. 6:3,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⑤. 6:5,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⑥.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⑦. 9:17, (사울)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⑧.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⑨. 13:9,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⑩.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이 임했던 것은 개인에게(6회 / 베드로, 스데반, 사울)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4회 / 저희, 무리, 너희, 제자들) 임하셨다. 성령 충만이 임재했던 사례들을 분석해 보면 어느 특정한 개인과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나타났다는 것은 당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역사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에베소서에서 1번(5:18) 사용되었다.

성령 충만이란 말이 15회 사용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14회가 누가의 글 즉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은 누가에 의해서 자주  사용되었다. 이 표현 사용에서 사도행전과 사신서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사도행전은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여러 번 성령 충만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의 서신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의 체험은 그의 삶과 사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일생일대의 중요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의 서신서에는 그런 획기적인 체험을 주장하거나 암시하는 주장을 발견할 수 없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으로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중생 후에 성령 충만을 또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그것을 강조했더라면 그 시대의 누군가가 성령 충만을 체험했다면 외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베드로와 함께 같이 성령 충만을 받은 것으로 기록된 요한과 야고보도 그의 서신서에서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오직 바울만이 그의 많은 서신서 중 에베소서에서 언급했다.

 

왜 사도행전과는 대조적으로 서신서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성령 충만’을 듣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모호함이 있다는 점이다. 성령 충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지 않은 채 그 말만 사용할 경우 듣는 자에게 혼란과 오해 속에 빠지게 할 소지가 있다. 아마 사람들마다 성령 충만에 대해 이해하는 관점과 판단기준이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비적 체험”을 하고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의 사람은 “열정적 찬양과 기도”, “설교”를 성령 충만의 증거로 생각할 것이다. 다른 이는 윤리적이고 인격적 면에서 증거를 찾으려 할 것이다. 이렇게 성령 충만의 구체적 의미가 제시되지 않은 채 용어만 사용되면 많은 혼동을 야기할 위험성이 있다.

 

서신서는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이런 잠재적인 위험성을 잘 피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와 내용은 결여되지 않았다. 말은 사용되지 않았으나 그 의미는 풍성하게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성령 안에서의 삶”,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으로 이해하고 증거하고 있다. 그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라, 살라, 행하라”를 사용하는데, 성령 충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성령 안에 살고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바울은 성령 안에서의 삶,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다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갈 5:22이하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다.
고전 13장도 성령 충만에 대한 내용이다.
롬 5:5도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고 했다.
골 3장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라고 했다.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관하게 하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Gordon D. Fee가 지적한대로, “충만이라는 표현은 ‘인도함 받음’, ‘따라 산다’는 말의 더 부요하고 강력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성령 안의 삶,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 무엇인가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그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고, 겸손하고,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사랑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최초의 교회 직분자를 세울 때 그 자격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교회 직분자의 자격을 논하면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아도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그 직분자의 자격을 밝혔다.

 

디모데전서 3:1∼7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사도행전에서는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는 10번 쓴다. 그런데 그 의미는 약간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령이 충만한 자는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바울 서신서에서 성령 충만이란 단어는 1번 쓴다. 그런데 그 의미는 풍성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성령 충만의 의미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용어 사용이 뚜렷하게 차이가 나 보인다.

 

그러면 왜 누가는 이렇게 혼동을 야기할 수 있는 표현을 10번이나 사용하고 있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과 강조점, 관심의 초점이 서신서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사도행전에서 누가의 일차적 관심은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사도행전의 아웃라인을 제시한다. 이 구절의 말씀에서 제시하는 패턴과 순서를 따라서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성령을 자주 언급한 것은 이 복음이 확산되고 나라가 확장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모든 과정에서 성령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기록함으로써 교회의 터가 되는, 복음전파의 시발점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도적 복음 선포가 인간의 철학이나 오류가 아니라 성령의 전적 주도와 감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최초에 교회가 발전해서 교회 직분자를 세울 때도 그 자격으로서 성령 충만이 언급된 것은, 인간이 세우지만 그 배후에서 그 직분자를 세우시고 그 자격을 부여하시는 분이 성령임을 밝히기 위해서다. 충만이란 단어는 무엇을 주관한다는 의미가 있다. 복음사역을 충만하게 주관하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령이 감동한 메시지를 사도들이 전했음을 암시한다.

 

사도행전 6장에서 직분자를 세우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밝히고 있고, 13장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할 때도 성령이 구별해서 세우심을 강조한다. 교회가 발전하고 확장하는 중요한 변이단계로서 전환점마다 성령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부각했다. 이런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을 이해하지 않고서 단순히 성령 충만을 자신들의 교리의 증거본문으로 사용하면 곤란하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론을 구원 역사적, 선교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의 일차적인 관점이 구원론적인 것에 있지 않다.

 

누가의 성령론은 구약의 성령론, 구약의 예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에 분명히 기록했듯이, 누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요엘의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성령의 역사를 예언의 영의 역사로 이해하고 있다. 누가는 성령을 증거의 영, 증거를 위해서 능력을 부여하는 이로 묘사한다. 항상 복음의 증거, 전파와 연결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복음의 증거를 위해서 능력을 부여받는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이 쓰인 특별한 목적을 착안하지 않고서 그 언급을 이해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근거로 나 자신의 교리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본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누가가 본 구원역사적인 넓은 틀로 이 표현을 이해해야 한다.

 

누가는 성령 충만을 교리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성령 충만을 구원론적, 성화론적으로 보기보다, 오히려 선교론적인 구원역사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사도행전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의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문맥에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힌트는 얻지만, 그것에 근거해서 성령 충만의 교리를 확정적으로 발전시키기는 힘들다. 사도행전뿐 아니라 서신서에 내포된 가르침을 참고해야 한다. 서신서와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의 증거는 상호보완적이다. 전체적, 통전적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어떻게 임하는가?

 

단일한 성령 충만이 우리의 삶과 사역을 따라서 다양하게 여러 가지 형태로 역사하신다. 항상 인도, 주관, 은혜를 주심으로써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사역에 따라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강건케 하고 이끄신다. 우리에게 특별한 사역과 임무가 주어졌을 때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임하신다. 핍박에서는 그것을 극복할 힘을, 기도할 때는 기도의 영을, 설교에는 능력과 감동과 확신으로, 상담 시에는 지혜의 영, 위로할 때는 위로의 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헬라어로 구분이 가능하다면 다음과 같다.

 

1. The Acts of Spirit's filling - πιμπλημι :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 주권적 역사, 행위를 좀 더 강조한다.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는 우리가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항상 선재적이다. 성령이 선재권을 가졌다. 우리가 조절할 수 없다. 항상 성령이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기도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조건이 아니라 사실 무조건적으로 예수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주어지는 축복이다. 생수의 강이 이미 흐르고 있다. 주권적 역사이므로 우리가 주관할 수 없다. 선재적으로 내주하시고 충만히 인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 은혜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이 이미 와 있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성령께서 간청하신다. “제발 나의 이 충만한 은혜를 거부하지 말라. 이 역사를 따라 살라!” 생수의 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정반대되는 광야의 길을 헤매고 있다. 육신의 길을 따라서... 그래서 이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어떤 조건이 요구되지 않는다. 물론 기도해야 한다.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묵상해야 한다.

 

2. The State of fullness - πληρης, πληροω : 

좀 더 성령 충만 상태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상태의 측면에서는 우리에게 책임이 따른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지 않고 항상 순종할 책임이 있다. 그 충만한 역사를 거스르거나 소멸하지 않고 그 충만한 은혜가 머물게 할 책임이 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그 은혜에 젖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런 측면에서는 기도해야 한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가 성령 충만한 사람, 열매의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령 충만에 대해 쓰인 경건서적을 보면 혹자는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나”는 제하에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자기를 죽이고, 깨끗하게 하고, 순종, 믿어야 한다 등등...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많은 도움은 주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한 혼돈을 준다. 그 조건을 다 이룬 후 이루어진다면 죽어도 못 받는다. 얼마나 깨끗하게 해야 하나? 내가 깨끗하게 된 상태가,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체가 성령 충만의 상태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그래서 그들이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을 할 때 어떤 의미로 말하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주권적 역사(The acts of Spirit's filling)를 말하면서 성령 충만해야 한다고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항상 충만하게 내재하신다.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욱 강하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다. 성령은 언제나 열심히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 축복을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상태의 지속성(The state of fullness)적인 의미로 말하면 인간의 책임을 말할 수밖에 없다. 자기 부인, 죄 청산, 거룩한 삶, 양도, 순종의 삶... 이런 책임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순서를 우리가 뒤 바꾸어 버리면 성령론적 율법주의에 빠진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생수의 강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다이내믹하게 흐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있다. 거룩한 삶을 살려는 갈망이 있어야 생수의 강을 누릴 텐데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 은혜가 소모되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못 받는 것이 아니라, 계속 멈추지 않고 폭포같이 흐르는 은혜를 무한히 소모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라고 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책임이다. 특권과 책임이 하나로 맞물려 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생수의 강을 주시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성령 충만케 하시는 주권적 역사, 생수의 강의 선물은 예수의 공로에 근거한다. 예수의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로... 우리로 성령 충만케 하시려고 주님이 그토록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왜 주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충만은 특권이요 축복이다.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특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어지지만 우리의 심령이 강퍅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은혜를 소멸키시지 않도록 조심스런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은 예민한 분이다. 조그만 부주의한 교만과 죄로 성령의 은혜가 소멸된다. 작은 죄라도 엄청나게 심각한 죄이다. 작은 죄악으로 너무도 엄청난 은혜를 상실하고 있다 삶을 돌이켜 보라.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가? 삶에 작은 부주의로 엄청난 은혜가 소멸된다.

 

성령 충만은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다.
이런 측면세서 성령 충만은 indicative / imperative의 구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indicative는 성령 충만의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에 근거에서 imperative가 주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성령 충만하라’는 말에는 이 두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다. 성령이 은혜 가운데 주권적으로 역사해서 충만케 하신다. 그러니 이 역사를 제발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님은 이미 충만하게 와 있다. 그것을 거스리면 안 된다. 특권과 책임의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다.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


1. 성령 충만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이 성령 충만하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전혀 모른다면 왜 성경이 “성령을 좇아 살라, 육신을 좇지 말라”는 명령을 하시겠는가? 영적으로 예민해지면 점점 더 밝히 알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육적(carnal) 신자와 영적(spiritual) 신자를 편의상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자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본질적으로 영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의 특별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 잠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성령의 사람들이지만, 그 본분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목회적 측면에서 편의상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크리스천은 모두 영에 속한 사람이다.

 

성도들 중에도 완전히 100%만을 성령 쫓고, 100% 육신 좇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비중의 문제다. ‘어느 쪽으로 기울었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 성령 충만을 받으며 살다가 간헐적으로 죄에 빠졌다가, 다시 하나님 은혜로 회복되는 사람들이다. 비중이 월등하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 즉 95% 정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육신을 쫓아 사는 사람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거의 유지 하지 못해서 육신적으로 치우치는 삶의 비중이 많다. 후자가 지금 현대 교인들의 실상이다. 현대 교인들은 은혜 받기가 너무 힘들다. 특별하게 무슨 집회를 해야 간혹 은혜를 받는다. 영적 질식 상태를 겨우 모면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5% 성령을 따라 살고, 95%를 육신을 따라 살면서, 자신이 51% 정도는 성령을 따라 살고 49% 정도는 육신을 따라 산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2.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 

섣불리 자기 입으로 성령 충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항상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3.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 교인들, 가족들, 자녀, 부인이 인정하면 그럴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이의 평가도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가정에서부터 참된 신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 충만하면 인위적이지 않으나 은혜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함이 전달된다. 옥합을 깨뜨려서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이 흐르는데 내 주위의 사람이 그것을 접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 교회에서도 다른 사람의 성령 충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지만, 초대교회와는 달리 긴밀하게 더불어 살지 않기에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충만은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자기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느 정도 알아준다. 그런데 이 땅에서 100% 온전하게 인식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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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성령 충만을 한 마디로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에서 “성령 충만”이란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제3위의 하나님입니다.
충만은 “가득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성령 하나님이 가득하게 채워져 있는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셨는데(에베소서 5:18), 그렇게 말씀 하신 이유는 당시 에베소에 있던 이교도들의 생활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인들에게 교훈하고자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많은 이방신전들이 있었는데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전 제사에서 술에 취하여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서울대 3대 바보가 누구인지 궁금하시지요?
첫째는 서울대 입구역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걸어가는 사람, 서울대 정문에서 공대 찾는 사람
- 걸어서 20~30분쯤(거리로는 약 1.8km 내외) 걸린다 

둘째는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이었다고 자랑하는 사람
- 전국의 고등학교의 수보다 모집 정원이 더 많기 때문이다.


셋째는 축제에 열심히 참가하는 사람

- 서울대 축제는 재미없기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축제 기간에 수업은 계속 진행된다.

요즈음도 불신자들이 술집에 모이면 뭐 자랑합니까? 주량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나는 막걸리를 몇 말 마신다. 나는 물을 못 먹어도, 강물이 막걸리라고 하면 다 마실 수 있어 하면서 큰 소리 칩니다. 나는 소주 4∼5병은 먹어도 끄떡없다고 하면서 자랑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자랑입니까?


그렇듯이, 에베소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전에서 술에 취해 춤추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너희들은 이방인들처럼 방탕하게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πληροῦσθε  ἐν  Πνεύματι, be filled with the Spirit)
* πληροῦσθε(V-PMM/P-2P) 
충만함이란 단어를 헬라어 문법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사(Part of Speech, Verb)

시제는 현재(Tense, Present)

가정법(Mood, Imperative)

태는 수동태(Voice, Middle or Passive)

2인칭(Person, 2nd Person)

복수(Number, Plural) 

문법적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 복수형(누구나 다 충만할 수 있다)
- 현재 시제(나중에 충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충만해야 한다)
- 수동형(내가 의지적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 명령형(한 사람도 빠짐없이 충만해야 한다)

첫째, “충만을 받으라”에 사용된 동사는 “복수형”


복수형이란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저도 성령 충만을 받아야하고, 여러분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모든 성도는 예외 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충만을 받으라”에 사용된 동사는 “현재시제”

핼라어 문법에서 현재 시제는 계속하여 반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반복적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려고 하면 하루 종일 호흡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호흡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 쉬고, 내쉽니다. 평균적으로 사람은 하루에 2만 1,600회의 호흡을 한다고 합니다.


빌 브라이트 박사는 성령 충만을 영적 호흡에 비유를 합니다.

호흡이란 한자어는 - 호(呼): 내쉴 호, 흡(吸): 들이마실 흡, 자를 씁니다.

호흡의 기본은 먼저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호흡으로 비유하여 다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영적)숨을 내 쉽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이 이제 나의 삶을 통치하고 지시하신다는 진리를 인식하며 (영적) 숨을 들이쉬는 것입니다.


내쉬기 :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들이쉬기 : “하나님, 당신의 성령으로 나를 채우소서.”


내쉬기 :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들이쉬기 : “하나님, 당신의 성령으로 나를 채우소서.”


이렇게 내쉬기 → 들이쉬기, 내쉬기 → 들이쉬기를 하는 이런 호흡이 하루 종일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해 보실까요?


내쉬기 :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들이쉬기 : “하나님, 당신의 성령으로 나를 채우소서.”


이 호흡 비유는 두 가지 관점에서 유용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호흡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루 종일 어디에 있는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을 구하게 함으로써 개인이 자랑할 수 없게 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 보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여, 나를 보십시오, 내가 공기를 호흡합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 호흡가인지 보십시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이상자일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호흡하는지 알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다음 호흡을 할 수 있음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누구든지 성령께서 충만히 채워주십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채워 주실 것을 믿는 것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셋째, “충만을 받으라”에 사용된 동사는 수동형

수동적(受動的)이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것”

능동적(能動的)이란 “다른 것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으키거나 움직이는 것”

충만은 우리에게 되어지는 일입니다.

헬라어의 수동태는 보통 주격이 하는 것보다 주격에게 되어 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것에서 여러분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은 어떻게 나누어지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이 스펀지와 물, 그리고 대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스펀지를 대야에 넣습니다. 이것은 잠기는 것,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스펀지는 여러분을, 물은 성령님을 나타냅니다. 제가 스펀지를 물에 넣을 때, 물이 스펀지를 “채웁니다.” 이제 스펀지가 물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의 뜻은 <잠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만일 제가 스펀지를 물속에서 꼭 짜면 어떻게 될까요? 스펀지는 여전히 물속에 있지만, 제가 누르기 때문에 물이 스펀지를 채우지 못합니다. 스펀지가 다시 물로 채워지려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스펀지를 놓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 충만의 경험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통제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면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 계획, 생각을 꼭 붙잡을수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통해 하시려는 것들을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통제권을 내려놓는 순간, 성령님의 통제가 여러분의 삶 속으로 물밀 듯이 다시 밀려들어올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이상하고 신비한 경험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은 성도로서 당연히 살아야 할 삶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충만을 받으라”에 사용된 동사는 명령형

이것은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끔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성도가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다. 성령 충만해야 하는 대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도덕적인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즉 죄를 멀리하고 더욱 거룩해져 가는 성화의 삶을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 말씀에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영적인 어린 아이들과 같아서 시기와 분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그러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많은 도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충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 집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 집사님은 초대교회에서 첫 번째로 선출된 일곱 명의 집사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집사의 선택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6장 3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했습니다. 집사의 첫 번째 기준이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이런 조건을 갖춘 스데반 집사님은 집사로 선택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역하는데 그의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6장 15절에 보면, 공회 중에 잡혀있었지만 당당하게 전도하는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고 했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성령 충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성도가 성령 충만해야 성화(聖化)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성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성령 세례는 받아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으니 도덕적인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도 힘들고, 남들도 그로 통해서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모습이 치료가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기에 우리는 더욱 주님을 닮은 성도로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성령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머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 주님이 기뻐하는 것을 생각하고

눈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 아름다운 것만 바라보고

입이 성령 충만해서 - 비방의 말 대신, 칭찬하고 남을 세우는 말을 하고

손과 발이 성령 충만해서 - 주님의 일을 대신하고,

가슴이 성령 충만하여 - 늘 감격이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 사도를 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당시 종교적인 엘리트들이 모여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적개심과 성경지식으로 가득한 산헤드린 회원, 장로, 서기관이 있었습니다. 종교적 엘리트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였기에 ... 그들 앞에서 전혀 거리낌 없이 <용기를 가지고, 성경과 복음의 진리를 명확하게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담대함에 놀라서 감당하지 못하고 베드로 보고 “밖으로 나가라”고 요청하고 그들끼리 의논을 다시 하지 않습니까?


스데반도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니 그는 순교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보며 담대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도행전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오늘 우리들도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이 꼭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 없이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을 바르게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함으로 주님께서 주신 직분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을 왜 우리가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죄 문제도 해결함을 받았고, 우리의 미래의 문제인 천국도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성도님들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 영적인 심한 기복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파르르 끓는 것 같다가도, 언제 그랬 냐는 식으로 식어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 기도생활이 굉장히 취약합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 응답이 전혀 없습니다.)


• 규칙적으로 말씀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 교회생활을 의무적으로 합니다.


•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남들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 진정한 기쁨이나, 평화가 없습니다.


• 마지못해 시늉만 하고, 하는 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고 그리스도인처럼 찬양하고, 그리스도인처럼 미소 짓 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삶을 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 나쁜 태도가 몸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남을 보면 쉽게 비판하고, 시기하고, 원망합니다. 대신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이 일어납니다.


• 반복적인 똑 같은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면, 진지한 고민을 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과,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했다면

두 번째 질문 <나는 성령 충만한가?>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에 이런 경우가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슬픈 일은 회심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최선을 놓칠 수밖에 없다.” 고 했습니다.







충만이란 가득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채워진 후에 넘쳐서 흘러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혜 충만, 성령 충만, 말씀 충만은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채워져 만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만하다(플래도, πλήθω, plḗthō)”란 “공급하다(furnish), 성취하다(accomplish), 채우다(fill), 공급하다(supply)”




요엘 2: 28-32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교회에 나오시는 새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40년 세월을 살아오면서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불교 문화권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불교를 믿었기에 불교문화에 익숙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교회에 몇 개월 전부터 잘 나오시고 계십니다. 교회와 거리가 먼 곳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잘 나오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라고 나와 보니 모든 것이 다 서툽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아직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때로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혹은 성령님 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저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오곤 합니다. 그러면 정성껏 설명을 해 드립니다.


새 가족이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신 성도님들 중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라고 하면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실 분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어쩌면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신학교에 가면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한 한기를 배웁니다. 그런데 한 학기를 배우면서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라는 것입니다. 또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설명하려는 순간, 잘못 설명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집에 같이 사는 부부의 경우에도 수십 년 살았지만 부부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때로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하면서 놀랄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 인간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고 그것도 우리의 언어적인 표현으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신 분량만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그림이나 형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부득이 해서 설명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상을 보시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면 이렇게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삼위일체, 한 존재 안에 세 위격으로 우리와 관계하신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신6:4)

3. 아버지께서 하나님이시고, 아들께서 하나님이시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이시다.

4. 세 위는 서로 구별되지만 하나이시다.


자 이 정도 생각하시고, 이제 여러분 삼위하나님을 조용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성부하나님, 우리가 쉽게 표현하는 하나님 아버지!> 하면 어떤 모습이 머릿속 에 떠오르십니까?

<성자 예수님>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아마 예수님은 성화를 많이 보 셨기에,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 하면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떠오릅니까?

아마 여기에서 조금 힘들어 하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친근하게 생각하고, 쉽게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묘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하나님은 대부분 성도들에게 신비로운 대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형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보시면 성령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 상징을 사용하여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바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람이 하는 일은 그려볼 수 있지만, 바람은 그리지 못합니다. 성령을 바람 같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이 큰 힘을 가지고 있듯이 성령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또 성령님을 <기름, 불, 비둘기> 등 으로 말하면서 성령님을 묘사합니다.


이렇듯이 성령님은 신비로운 존재로서 우리의 눈에는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경은 우리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처럼, 성령 하나님께 예배하고, 사랑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성령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성령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성령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성령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서 새롭게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느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서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도표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관점으로 성경을 구분해 보면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하나님께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다양한 때에 사람들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영원히 내주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잠깐 동안 성령님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구약의 본문인 요엘서 2:28절에 보면,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시대가 되면, 성령하나님을 만민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인 요엘 2: 28-29절을 열정적으로 한 번 읽어보십시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 말씀은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시대가 되면, 성령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50일 만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 문제를 해결함 받은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에 헬라인도, 유대인도, 종도, 자유인도 모두 주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게 된 것입니다.(중간의 점은 - 성령을 받기 시작한 때를 말하고 있고, 고린도 전서 12: 13절에 모든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 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사도행전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장 :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기록함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 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렇게 연결되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임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령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알아보십시다. 성령의 역할은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은 나에게 중생을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하면서 거듭남,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이 말씀을 간단하게 명제로 만들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나는 영적으로 죽었다.

이제 나는 거듭남으로 영적으로 살아났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반대로 영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의 영은 우리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부분으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연결되고 관계하는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들은 영적으로 살아 있었고,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대화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먹는 죄를 지어,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 결과는 즉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숨었으며,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여러분 추운 겨울, 차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고생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배터리가 방전되면 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할지라도 배터리가 방전되면 차는 가지 않습니다. 그 차를 다시 달리게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배터리를 충전하든지 아니면 새 배터리로 갈아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 한 순간,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영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봐야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하나님과 연결하고픈 갈망은 있지만,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연결될 수 없습니다.


그 일을 누가하셨다는 말입니까? 성령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령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것을 일부의 사람은 느끼지만, 대다수의 삶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을 우리 모두가 성령님으로 인해서 영적인 배터리가 교체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 하나님은 나에게 내주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장소는 오직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특별한 장소는 따로 있었는데, 그곳은 성전의 내실인 바로 지성소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에 세 차례씩 먼지 나는 흙 길을 마다하고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것은 하나님이 임재 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직접 그 장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 하는 곳과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했습니다.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것도 1년에 단 한 차례만 허락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을 위해서 속죄한 후에,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러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사람들이 그의 몸을 줄로 묶었습니다. 만일 그가 지성소 안에서 죽으면, 끌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제사장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그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그 사람도 죽고 만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는 그 정도로 거룩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지성소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의미심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안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관문이 되는 장막이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어 가실 때, 하늘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가시는 순간,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많은 성도들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사건 들 중에 가장 의미심장했던 것은 바로 장막이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 장막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찢어져 두 조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이런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나는 더 이상 여기 지성소만 거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성전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내주하신다고 가르치십니다.

고린도전서 6:19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을 매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감격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심을 알고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성령님은 나에게 인(引)치십니다.

에베소서 1:13절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합니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 봉인은 장식이 아니라 자물쇠에 가까웠습니다. 편지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누가 뜯어보면, 봉인은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인봉 처리를 해서 서류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전도사님이 목사고시를 치려고 하면 담임목사의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추천서 내용에는 <교회생활, 봉사생활, 가정배경, 헌신도, 앞으로 어떤 목회자가 될 것 같은지> 담임목사로서 소견을 적게 해 놓았습니다. 어떤 것은 상중하로 표기하고, 어떤 것은 글로서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전도사님의 경우에는 있는 대로 적어 주면 합격하겠지만, 만약에 담임목사가 보아서 자질이 너무 부족하다 생각되면 그 부족한 부분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불합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추천서의 내용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것을 일반 편지로 보내면, 중간에서 표시나지 않게 뜯어서 읽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내용을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추천서를 뜯어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인봉처리를 하는데 도장을 윗부분에 3개를 찍고, 중간선에서도 세 개를 찍어요. 그리고 스카치 테-잎으로 붙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내면 받는 사람까지 안전하게 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引)친다는 말도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 성령님의 도장을 찍어놓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이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목적지인 천국까지 갈 때까지 어떤 세력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을 성령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축복을 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성령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입니다.

에베소서 1:14절과 고린도후서 5장 5절을 함께 큰 소리로 읽어보십시다.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 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비유하자면, 성령님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금”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천국을 약속하마, 나는 이 약속을 너에게 반드시 지킬 거야, 이 약속이 변치 않는 진리라는 것을 네가 믿을 수 있도록 너에게 엄청난 보증금을 줄게” 하나님이 보증금으로 무엇을 주셨을까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증금은 예나 지금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잃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토지 거래에 대한 보증금으로 돈을 지불하고 계약을 취소하면 그 돈은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약혼반지를 주었다가 약혼을 깨트렸다면, 그 반지는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하나님 자신으로 보장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려선 안 될 담보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생을 빼앗아 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그렇게 깊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만 바로 알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천국까지 갈 수 있도록 성령하나님으로 보증을 하셨는데, 나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13 성령세례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중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준 적이 몇 번 계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기적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두 명의 맹인이 예수님께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두 맹인의 마음속에 예수님이라면 보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시고 고쳐주셨는데, <맹인의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 선포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도 보면 맹인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벳세다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기적처럼 손을 대어서 고쳐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벳세다에서 예수님은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선 맹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였기에 다시 안수해 주었더니 맹인의 눈이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기적이 나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놓고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까?”하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고 결론지어주십니다. 그 후에 맹인을 고쳐주셨는데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맹인이 눈이 떠지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는 상상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해서 눈이 떠진 세 사람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 어떤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눈이 떠진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맹인이었는데 예수님이 저의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주님이 만져 준 것 뿐인데, 저는 이렇게 앞을 보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이 눈을 만져주심으로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눈에 침을 뱉어서 고쳐주십니다. 저는 그렇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한 사람도 말합니다. “아니에요, 저는 만져 주셔서도 아니고, 눈에 침을 뱉어서도 아니고, 눈에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씻었더니 이렇게 고쳐졌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이 분명 예수님으로 인해서 눈이 떠졌는데, 어떤 사람의 말이 맞는 말씀입니까? 답은 세 명의 고침 받은 사람의 말이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저 각 자의 체험이 다를 뿐인 것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 맞아, 우리가 생각할 “성령세례”에 대한 부분은, 사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논란이 되어 오는 부분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지금 앉아계시지만, 성령세례가 무엇입니까? 성령세례 받으셨습니까? 하면 분명하게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성령세례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해서 새로운 교단이 생겨나고, 성령세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어서 서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단정 짖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보통 성령세례를 받았느냐? 하면 성도님들은 무엇인가 뜨거운 경험들을 생각합니다. 어떤 집회를 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는 사이게 가슴에 불덩이 같은 것이 임해서 뜨거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면서 그때 나는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순복음 교회 같으면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알아볼 때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를 가지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복음교단의 신학교에 들어가면 한 한기 안에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성령세례 받은 것으로 인정해 준 다는 것입니다.


우리교단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다닌 어떤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서울에 다닐 때 이야기이니 벌써 오래전 이야기이지요.

그때 한 학생이 들어왔는데, 순복음신학교를 자퇴를 하고 장신대에 들어왔습니다. 이유는 순복음신학교에 다니는데 방언을 하지 못해서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방언을 받으려고 기도하는데,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자신이 방언을 못하니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결국은 학교를 그만 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방언으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 우리교단 신학교에 들어온 것입니다. 장신대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는데 장신대 뒤에 있는 아차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이 꼬이게 되고,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세례를 가지고 교단별로 이것이 성령세례다, 이것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는 이유가, 그것을 가지고 교단끼리, 성도끼리 논쟁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주신 이유는 “교회가 하나 되고, 성도가 하나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는 핵심적인 말씀이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 그럼 우리가 오늘 생각하려고 하는 주제 “성령세례”로 돌아서 생각해 보십시다. 우선 성령세례 사전적인 의미부터 생각하십시다.

성령 세례란?
성령이 사람의 마음속에 임하여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세례.


성령세례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가 목회자로 통해 받은 “물 세례”를 바르게 이해하면 훨씬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르쳐 주는 예표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 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의미적으로 비슷한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 일반적으로 우리가 받은 세례의 특징을 살펴보십시다.

물 세례는 최초성

세례는 예수 믿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에게 맨 처음으로 행해지는 예식이다.

물 세례는 단회성 및 지속성

한 번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효력이 일생동안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반복해 서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물 세례는 정결성

세례는 죄 씻음을 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의식이다.

물 세례는 보편성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세례를 받는다.


물 세례는 하나님의 주권성
성경에 세례를 주라는 명령은 있으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없는 것을 보면, 세례는 사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성질을 가진다.

이 특징에서 우리는 성령 세례도 그와 같은 의미가 내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령세례는 모든 성도들의 보편적 경험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여러분이 유의해서 보셔야 할 것은 “다” 라는 말입니다.


다른 곳에 있는 말씀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 구절에서도 “다” 라는 말에 주목하세요. 성도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세례를 받아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성령세례는 모든 성도들이 받는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 세례를 소망하거나 구하라고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기도하거나,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하다거나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께로 왔을 때, 그의 성령을 내게 주셨다는 대 진리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동등하게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2등 시민은 없습니다. 성령을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나는 그 사람보다 성령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라고 하거나 “나처럼 많은 성령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도 성령 세례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까? 답은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은 어떠했습니까?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얼마나 애쓰면서 개척한 교회입니까? 그런 교회가 바울이 떠나오고 나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당파 문제(1-4장) /
불륜문제(5장) /
혼인문제(7장)

우상제물문제(8-10장) /
부인의 수건 문제(11장)

성찬에 대한 문제(11장) /
은사에 대한 문제(12장)


그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문제요, 교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다 성령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이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이 때로 거룩하지 못하고 온전치 못하다 할 찌라도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성령세례를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회적 사건


성령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뿐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라고 하면서 바울은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성령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될 때 모든 성도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 안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세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 우주적인 교회 안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연합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고, 그 후에 일어나는 일을 영적으로만 볼 수 있다면 놀라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우리는 우주적인 교회에 접붙임을 받을 것입니다. 즉 성령세례를 받고 나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성도들을 만나면 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라는 의식을 분명히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안식년에 미국교회를 탐방하면서, 흑인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극장을 구입해서 교회로 리모델링하여서 사용하는 교회였습니다.

수요예배에 많은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우리처럼 앉아서 점잖게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수치고, 춤추고 찬양을 합니다. 오히려 앉아있는 사람이 정도입니다. 찬양 후에 설교 시간이 있었는데 설교시간에는 경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설교 후에는 성도간의 교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옆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데 우리처럼 목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허그(꼭 껴안습니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얼마나 허그가 어색합니까? 그런데요. 미국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동양에서 온 조그만한 등치를 가진 목사님들을 안아주는데 꼭 껴안아주십니다. 저하고 같이 간 목사님은 저보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으셨는데, 뚱뚱한 아주머니가 아들 안듯이 안아주니 목사님이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비록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성령 안에 있기에 금방 마음이 이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라는 표현을 하는 구절이 150구절이나 있습니다. 그 중 한 구절만 소개하면 에베소서 1장 3절을 들 수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성령 세례 받으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갑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에 그의 아들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으로 보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들고 있는 이 종이가 여러분의 생명이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분명히 이 종이는 깨끗한 종이가 아닙니다. 이 종이는 여러분의 이기적인 모습 때문에 구겨졌고, 여러분의 죄악 때문 된 습관들 때문에 더러워졌습니다. 여러분의 큰 잘 못 때문에 찢어졌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 선해지려는 노력들 때문에 낡아졌습니다. 보아도 썩 기분 좋은 종이는 아닙니다.


여기 성경책이 있습니다. 성경책이 종이 하나는 넣습니다. 그러면 종이는 보이지 않고 성경책만 보입니다. 종이와 같은 우리의 생명은 세상에 살면서 상처를 입고 상하고 실패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얼룩이 진 종이의 가치가 매우 낮아진 형태라고 한다면 이런 종이를 성경책 안에 넣을 때 종이는 볼 수 없고 성경책만 보입니다.



성령은 제3위의 하나님이며 성부와 성자와 일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님입니다. 종이를 성경책 안에 넣어보겠습니다. 종이는 사람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종이를 성경책에 넣는다는 것은 생명이 를 여러분의 생명자, 그런데 제 왼손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제가 이 종이를 성경 사이에 넣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상징하는 종이를 성경 속에 넣었습니다. 분명 여러분의 생명을 상징하는 종이가 성경 속에 들어있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성경뿐입니다. 종이를 성경 사이에 넣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 두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아들 안에 두셨기에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 보이는 것은 그의 아들의 영광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보실 때, 이것(구겨진 종이)를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것 <종이가 끼워진 성경>을 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의” 여러분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세례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은 성령세례를 분명히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물세례를 받듯이, 모든 성도는 세례를 받습니다.

성령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회성 사건이고,

그리고 성령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알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21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자동차에는 휘발유를 넣어야 합니다. 자동차 연료통에 물을 넣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자동차는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수영장에는 물을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수영장을 모래로 채운다고 하면 수영장이 주는 상쾌한 느낌은 맛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비싼 크리스털 꽃병에다 잡초를 꽃아 놓는다고 하면,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꽃병이 아깝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마음속에는 무엇을 넣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욕심이나 욕망이 아닌 “성령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찰스 스윈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은 성도들에게 자동차의 원료와 같다. 그분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에너지를 공급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장애물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신다. 그분은 길이 험할 때도 우리가 계속 나아가도록 격려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고민할 때 위로하시고, 재난을 당했을 때 평안케 하시고, 외롭고 슬플 때 우리의 동반자가 되시고, 지혜롭게 행동하시고, 어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불안해 할 때 분별력을 주신다. 간단이 말해, 그는 우리의 영적 연료이시다”


이렇게 귀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 동안 생각한 것을 잠시 되새겨 보십시다.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성령의 역할 네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새로 태어남)하시고,
내주(와서 삶)하시고,
인(引)쳐주시고,
보증이 되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세례는 무엇인가?

1. 모든 성도들이 당연하게 경험하는 사건이다.(보편성)

2. 구원의 순간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다.(단회성)

3.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의 몸(교회)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7:37-39 성령 충만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하면서도,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입니다.

- 가정주부가 음식점에 갔는데 같은 재료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여러분이 맛보지 못한 특유한 맛이 난다면 그것을 먹으면서 “어떻게?”만들었을까? 하면서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 만일 제가 이번 여름에 여러분이 가족과 함께 무료로 유럽 여행을 갈 수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라고 질문을 할 것입니다.

- 요즈음 텔레비전에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아는 사람이 출연해서 한 주일 만에 10kg을 빼었다고 하면, 아마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라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 주일 동안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지난주일 생각한 말씀을 요약한다면

- 성령 충만은 성도의 영적인 연료이시다 (자동차에 가솔린이 있어야 하듯)

-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하지 않기에 성령 충만해야 한다.

- 성령 충만은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 한다.

- 성령 충만은 호흡을 하듯이 반적인 행동을 말한다.

- 성령 충만은 우리에게 되어 지는 것이다. 즉 우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면 된다.

- 성령 충만은 명령이다.

- 성령 충만을 받아야하는 이유는 도덕적인 변화와, 효과적인 사역의 감당을 위 해서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은 “어떻게”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명령하셨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되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들에게도 힘써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지만, 우리의 노력 없이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 충만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1. 성령 충만에 대한 갈증을 인식하고 갈망하라.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7-39)


이 본문은 유대인의 축제인 장막절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장막절기간이면 매일 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새벽을 지나 하루가 밝아오는 여명 직후가 되면, 대제사장이 예배자들의 축하 행렬을 이끌고 성전 근처의 실로암 못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대제사장은 황금 주전자에 물을 가득히 채웁니다. 그리고는 그 주전자를 가지고 다시 성전 남문(수문(水門))으로 들어가고, 사람들은 뒤를 따르면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이사야12:3) 말씀을 낭송합니다.


대제사장은 가지고 온 물을 성전 제단에 부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예식은 풍년을 위해서 비를 내려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요엘서 2장 28-29절에 나오는 성령님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현장에 여러분이 서 계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도시를 꽉 매운 예배 자들로 예루살렘은 붐볐습니다. 물을 붓는 이 의식은 축제 기간의 하이라이트였고, 어쩌면 주전자의 물이 제단에 막 부어지려는 극적인 순간,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여 군중들에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든 꿈과 소망이 바로 자신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 주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TV에 생중계되는 광복절 행사장에 우뚝 서서 “누구든지 참된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내게 오라!”고 외치는 상황과 비슷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으로 우리를 만족시켜 주시겠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외치신 것은 거기에 모인 군중이 예수님께서 주실 것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모인 군중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과 관계, 영적 생활>에 대해서 목마르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갈구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영적인 목마름을 위해서 어디로 가야 할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단은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돈 / 성적 범죄 / 권력>으로 인도합니다.

또 우리 나름대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친구, 영화, 쇼핑, 나름대로 인생 목표>를 가지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조용히 앉아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때보다 제겐 주님이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필요합니다.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들과 다른 사람들을 찾았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의 성령으로 저를 채워 주옵소서. 주님께서 저의 목마름을 씻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하려면 먼저 나에게 성령 충만에 대한 목마름을 인식하고 성령충만을 위해서 갈망하여야 합니다.


2.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되, 특히 회개의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기도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120명의 성도들이 열흘 동안 집중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면 “...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라고 합니다. 즉 그들은 열흘 동안 성령을 받기 위해서 한 마음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를 시작으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성령 충만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는 항상 기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1월 14일, 15일에 걸쳐서, 길선주장로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자, 다른 목사님, 장로님들도 회개하게 되었고, 그 회개가 이어졌을 때 그곳에는 성령 충만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오늘 우리들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이 아무 사람들을 향해서 <회개하라> 하는 외치는 말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사실 회개는 사전에서 가장 긍정적인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돌아서다 / 다시 시작하다 / 생각을 변화시키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것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회개는 <나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동의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남 탓하기를 그만 두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1장9절은 회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말해주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들이 가장 하기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헌금은 하겠는데, 봉사는 하겠는데 -- 그보다 하기 힘든 것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마음과 행동 속에서 범했던 죄를 회개합니다.”하며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회개기도야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헐어내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면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귀한 회개기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 2:13절에 보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버린 것> 또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 대신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 이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기도의 내용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 내가 이 일을 하려고 하니 내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게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 라는 기도만 하지 않습니까?


이제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기도의 무릎을 꿇으셔야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은 기도하셔야 합니다.

교회를 앞장 서 섬기는 분 가운데 기도하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타까워하면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실 내용입니다. 왜 앞장선 항존 직분자가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하지 않고 성령 충만을 경험한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고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앞장선 분은 예배시간에, 기도시간에 철저한 모델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은 기도의 내용을 점점해 보셔야 합니다. 나는 진정한 회개의 기도가 있는가? - 주님 앞에서 나의 생각, 행동의 잘못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성도인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령 충만을 위해서 모두가 기도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의 기도를 하심으로 성령 충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성령님의 통치에 우리의 전부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 충만 하려고 하면, 성령님이 나를 통치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말씀이 있지요. 갈라디아서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신 것이라”

이 구절로 만든 복음성가를 아실 것입니다.

한 번 해 보십시다. (1분) (기쁨으로 찬양 70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매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 하려고 하면 -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나는 죽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매일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8:34,35절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대 부분의 사람은 <통제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냥 내 마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즈음 스릴을 즐기는 레저스포츠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번지점프 해 보신 분계십니까? 깊은 계곡이나, 혹은 강위에 높은 곳에다 번지 점프장을 설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스릴을 즐기기 위해서 뛰어내립니다. 그들이 뛰어내릴 때 그들의 몸은 누구에게 맡깁니까? <밧줄에 맡기지 않습니까?> 나를 맡겨야 스릴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롤러코스터는 어떻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타보지 못했지만, 그것 역시 스릴을 즐기려고 하면 자신을 맡겨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그 기구에 맡기지 못하면 스리를 즐기지도 못하고 힘만 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스릴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들이 지금 이 설교를 들면서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사업을 할 때나, 취미생활을 할 때, 인간관계를 할 때는 내 뜻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지금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내 뜻대로 살 것인가? 문제는 내 마음의 문제에서 내가 빨리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 충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항복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처럼 매일 매일 주님 앞에서 항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하십시다.

오늘까지 네 주간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6월 첫주일은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1. 성령님은 나에게 중생을 주신다.(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2. 성령님은 나에게 내주하신다.(함께 거주하심)

3. 성령님은 나에게 인쳐주신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4. 성령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이 되신다.


6월 둘째주일은

<성령세례는 무엇인가?>

성령세례를 설명하기 위해서 물세례와 비교하면서

1. 성령세례는 모든 성도들의 보편적 경험입니다.

2. 성령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회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3.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 안에 두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고,

요약은 설교 서론에서 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령충만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를 세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1. 성령 충만에 대한 갈증을 인식하고 갈망하라.

2.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되, 특히 회개의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3. 성령님의 통치에 우리의 전부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자 이제 6월 한 달 동안 성령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던 내용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여러분이 다 이해하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대충은 아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알고도 누리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성령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사역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시고, 성령 충만하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ordseed114&logNo=220605738149 


성령은 ​진리다 : 
요일 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예수는 진리다 :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3598) 이요(1510) 진리요(225)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 :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4674) 말씀은(3056) 진리(225) 니이다.

예수의 말은 영이다 : 
요 6:63  살리는(2227) 것은(3588) 영(4151) 이니(2076) 육은(4561) 무(3756) 익하니라(5623) 내가(1473) 너희에게(5213) 이른(2980) 말은(4487) 영(4151) 이요(2076) 생명(2222) 이라(2076) 

아버지의 말씀 = 진리 = 예수 = 성령 = 영 = 예수가 이른 말 = 생명.

1. 성(40)령(4151)충만(4130)이 무엇인가?

4130 plhvqw 플레도(pletho) {play'-tho}기본어 pleo, <플레오>(어떤 시제에서는 대체어로, 그리고 중복형 pimplemi, <핌플레미>로만 나타나는)의 연장형;‘채우다’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감화시키다’, ‘영향을 주다’, ‘공급하다’), 특히 (시간을)‘채우다’, 완수하다, 가득 채우다 ; 동사. to fill, to filled;

    <마 22:10, 눅 1:15, 외 신약 24회>

   

충만(充滿) : 가득하게 차 있음.

- 充 찰 충; ⼉-총 5획 ; 차다, 채우다, 막다, 막히다, 두다, 덮다, 살찌다, 번거롭다.
- 滿 찰 만; ⽔-총14획 ; 차다, 가득하다, 넉넉하다, 둥그레지다, 곡식이 익다, 활을 힘껏 당기다, 교만하다, 속이다.

 

요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진리라고 했고,
요일 5:6에서 성령이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의 뜻은 아버지의 말씀이 우리 속에 충만(4130)한 상태 즉 가득 채워진 상태를 말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말씀 자체가 영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행 4:31에 보면 성령이 충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담대히
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 하나니 하나님의(2316) 말씀을(3056) 받은(1096) 사람들(1565)을(4314) 신(2316) 이라 하셨(2036) 거든(1487)

1096 givnomai 기노마이(ginomai) 기본동사의 연장형과 중간태; (‘발생하게’) ‘되는 원인(原因)이다’,  즉 (재귀형) ‘되다’ (‘되기 시작하다’), (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 강조의미로) 

아래와 같이 폭넓게

     사용됨; 일어나다, 모이다, 되다, ~에 일어나다, 스스로 행하다, (지나가기 위해)가져오다, (지나가기

     위해)오게 되다, 계속하다, 나누이다, ~되어졌다, 끌어내다, 끝맺게 되다, 떨어지다, 끝내다, 따르다,

    ​발견되다, 이루어지다, 하나님이 금하시다, 자라다, 일어나다, 가지다, 지키다, 만들다, 결혼하다, 되도

     록 정해지다, 착수하다, 지나다, 수행되다, 출판되다, 요구하다, 보이다, 보여지다, 취해지다, 변화하

     다,  사용하다, ~이 되다,~일 것이다, ~할 작정이다, 쓰여 졌다 ;동사. to cause to come being into;

  

    요 10:35을 원어성경을 근거로 해서 해석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신이 아니라, 하나님

    의 말씀이 된자가 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온 신은 스트롱번호 2316 하나님을 가리킨 것입니다. 


     2316 qeov" 데오스(theos) {theh'-os}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신성(神聖)’, 특히 (정관사 3588

    {oJ,호(ho) ἡ,헤(he) τό,토(to)과 함께} ‘최고 신(神)’, 상징적으로 ‘행정장관’, 히브리어로는 ‘매우’,

    ​하나님, 신(~을 공경하는, ~에게 향한) ; 남성명사 혹은 여성명사. God;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은 재귀한다는 것이다. 재귀한다는 것은 우리가 창조될때의 모습으로 돌아

     간다는 것입니다.(재귀 : 위의 1096 givnomai 참조)


       재귀 再歸 : 다시 돌아옴.

              再 두 재; ⼌-총6획 ; 두, 둘, 재차, 거듭, 다시 한 번, 두 번 하다, 거듭하다.

              歸 돌아갈 귀; ⽌-총18획 ; 돌아가다, 돌아오다, 돌려보내다, 반환하다, 시집가다, 시집을 보내다.


​   


    

    

결론 :

성령 충만이란? 돌아가야 할 존재인(7225 레쉬트)가 하나님의 집인(베트) 속에 복귀한 상태를 말합니다.

요 10:35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 자를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창 1:1에 나온 하나님의 집은 말씀이 된 하나님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된 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된 자란 성경이된 자를 말합니다.

                  성경이된 자는 하나님의 펀지가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은 현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된 자란 존재의 상태를 가리킨 것

                  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령 충만의 원어적 의미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세 가지 헬라 단어로 묘사되어 있다.
πιμπλημι - 8번
Luke 1:15 - John the Baptist

Luke 1:41 - Elizabeth

Luke 1:67 - Zachariah

Acts 2:4  - the 120 disciples

Acts 4:8  - Peter

Acts 4:31 - the disciples

Acts 9:17 - Paul at conversion

Acts 13:9 - Paul against Elymas

πληροω - 2번
Acts 13:52 - the Antiochan disciples
Eph. 5:18 - Paul's exhortation

πληρης - 5번
Luke 4:1       Christ
Acts 6:3       The seven
Acts 6:5       Stephen
Acts 7:55      Stephen
Acts 1:24      Barnabas

 

πιμπλημι - 8번

πληροω - 2번

Luke 1:15 - John the Baptist

Luke 1:41 - Elizabeth

Luke 1:67 - Zachariah

Acts 2:4  - the 120 disciples

Acts 4:8  - Peter

Acts 4:31 - the disciples

Acts 9:17 - Paul at conversion

Acts 13:9 - Paul against Elymas

Acts 13:52
  - the Antiochan disciples

Eph. 5:18 - Paul's exhortation

πληρης - 5번

Luke 4:1       Christ

Acts 6:3       The seven

Acts 6:5       Stephen

Acts 7:55      Stephen

Acts 1:24      Barnabas

 


이 세 단어는 같은 근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자적으로는 ‘무엇으로 가득 채워졌다’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공간적 개념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성령은 물체가 아니고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물질계에 사용하면 뜻이 정확하지만, 이 표현을 영적 실체를 묘사하는 데는 그 문자적 의미가 한계에 봉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자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성령은 비록 부피, 질량을 갖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내재하시는 영적 실체라는 면에서는 문자적 의미로 성령의 임재의 채워짐을 논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은 공간을 초월하지만 공간 안에도 내재하신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로 이해할 때 성령의 열매와 영향력과 능력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자적 의미로만 이해할 수 없다.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함과 비유함으로써 의미는 확실히 드러난다. 술에 취하면 알코올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성령 충만하면 강력한 영향력에 지배를 받고 압도당한다는 비유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외에도 바울 사도가 두려움이 가득하다고 표현했을 때에도 그 의미는 두려움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령 충만의 의미는 “침투(penetration)”, “지배(control)” 두 가지이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이를 “페리코레시스” 라고 했다. 

*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뜻합니다. 또는 “공재(περιχώρησις. circumcessio, circumincessio)” 라고도 한다.


A. W. Tozer는 용광로에 쇳덩이가 들어가면 불의 본질이 쇠의 본질에 침투해 들어가서 그 둘이 하나가 된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마음을 완전히 침투해서 우리 마음 전체에 성령의 지배가 완전히 스며드는 것이다. 우리 마음, 정신,  육체가 모두 성령의 지배로 충만해진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를 통합해서, 성령 충만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 안에 성령의 임재와 영향력에 의해 침투되어서 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The whole sphere of on e's being and life, being pervaded with the Spirit's Power and influence, is controlled and led by the Holy Spirit.)

성령의 불이 우리의 전 존재에 확산되어 우리를 불덩어리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문제는 바울 사도는 서신서에서 성령으로 인도받음, 지배받음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쫓아 행하라. 따라 걸어라...” 갈 5:17, 롬 8:14, 갈 5:25...
이 표현들은 성령 충만과 동일한 유사의미이다.

Gordon D. Fee가 말한 대로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과 용어는 바울 사도의 이런 말을 더욱더 부요하고 강력한 은유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 충만이 동일한 의미라고 말했을 때,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충만한 능력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혜와 풍성함을 표현하는 장점을 가진 용어이다. 전적 주관, 전적 지배의 측면을 더 강조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그 뜻이 좀 더 선명하게 전달되는 표현들을 더 선호해서 사용하고 있다. “인도를 따라 행하라, 성령 안에 살라...” 이런 그 은혜의 풍성함을 부각시키는 장점인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병합해서 사용함으로써, 장점도 살리고 그 표현이 애매하게 잘못되는 위험성을 막아주고 있다.

성령 충만이란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의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차이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15회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에서 4번(1:15, 41, 67, 4:1)
사도행전에서 10번(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에베소서에서 1번(5:18) 사용되었다.

성령 충만이란 말이 15회 사용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14회가 누가의 글 즉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은 누가에 의해서 자주  사용되었다. 이 표현 사용에서 사도행전과 사신서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사도행전은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여러 번 성령 충만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의 서신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의 체험은 그의 삶과 사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일생일대의 중요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의 서신서에는 그런 획기적인 체험을 주장하거나 암시하는 주장을 발견할 수 없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으로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중생 후에 성령 충만을 또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그것을 강조했더라면 그 시대의 누군가가 성령 충만을 체험했다면 외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베드로와 함께 같이 성령 충만을 받은 것으로 기록된 요한과 야고보도 그의 서신서에서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오직 바울만이 그의 많은 서신서 중 에베소서에서 언급했다.

 

왜 사도행전과는 대조적으로 서신서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성령 충만’을 듣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모호함이 있다는 점이다. 성령 충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지 않은 채 그 말만 사용할 경우 듣는 자에게 혼란과 오해 속에 빠지게 할 소지가 있다. 아마 사람들마다 성령 충만에 대해 이해하는 관점과 판단기준이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비적 체험”을 하고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의 사람은 “열정적 찬양과 기도”, “설교”를 성령 충만의 증거로 생각할 것이다. 다른 이는 윤리적이고 인격적 면에서 증거를 찾으려 할 것이다. 이렇게 성령 충만의 구체적 의미가 제시되지 않은 채 용어만 사용되면 많은 혼동을 야기할 위험성이 있다.

 

서신서는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이런 잠재적인 위험성을 잘 피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와 내용은 결여되지 않았다. 말은 사용되지 않았으나 그 의미는 풍성하게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성령 안에서의 삶”,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으로 이해하고 증거하고 있다. 그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라, 살라, 행하라”를 사용하는데, 성령 충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성령 안에 살고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바울은 성령 안에서의 삶,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다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갈 5:22이하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다.
고전 13장도 성령 충만에 대한 내용이다.
롬 5:5도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고 했다.
골 3장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라고 했다.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관하게 하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Gordon D. Fee가 지적한대로, “충만이라는 표현은 ‘인도함 받음’, ‘따라 산다’는 말의 더 부요하고 강력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성령 안의 삶,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 무엇인가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그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고, 겸손하고,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사랑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최초의 교회 직분자를 세울 때 그 자격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교회 직분자의 자격을 논하면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아도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그 직분자의 자격을 밝혔다.

 

디모데전서 3:1∼7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사도행전에서는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는 10번 쓴다. 그런데 그 의미는 약간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령이 충만한 자는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바울 서신서에서 성령 충만이란 단어는 1번 쓴다. 그런데 그 의미는 풍성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성령 충만의 의미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용어 사용이 뚜렷하게 차이가 나 보인다.

 

그러면 왜 누가는 이렇게 혼동을 야기할 수 있는 표현을 10번이나 사용하고 있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과 강조점, 관심의 초점이 서신서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사도행전에서 누가의 일차적 관심은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사도행전의 아웃라인을 제시한다. 이 구절의 말씀에서 제시하는 패턴과 순서를 따라서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성령을 자주 언급한 것은 이 복음이 확산되고 나라가 확장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모든 과정에서 성령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기록함으로써 교회의 터가 되는, 복음전파의 시발점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도적 복음 선포가 인간의 철학이나 오류가 아니라 성령의 전적 주도와 감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최초에 교회가 발전해서 교회 직분자를 세울 때도 그 자격으로서 성령 충만이 언급된 것은, 인간이 세우지만 그 배후에서 그 직분자를 세우시고 그 자격을 부여하시는 분이 성령임을 밝히기 위해서다. 충만이란 단어는 무엇을 주관한다는 의미가 있다. 복음사역을 충만하게 주관하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령이 감동한 메시지를 사도들이 전했음을 암시한다.

 

사도행전 6장에서 직분자를 세우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밝히고 있고, 13장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할 때도 성령이 구별해서 세우심을 강조한다. 교회가 발전하고 확장하는 중요한 변이단계로서 전환점마다 성령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부각했다. 이런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을 이해하지 않고서 단순히 성령 충만을 자신들의 교리의 증거본문으로 사용하면 곤란하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론을 구원 역사적, 선교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의 일차적인 관점이 구원론적인 것에 있지 않다.

 

누가의 성령론은 구약의 성령론, 구약의 예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에 분명히 기록했듯이, 누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요엘의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성령의 역사를 예언의 영의 역사로 이해하고 있다. 누가는 성령을 증거의 영, 증거를 위해서 능력을 부여하는 이로 묘사한다. 항상 복음의 증거, 전파와 연결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복음의 증거를 위해서 능력을 부여받는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이 쓰인 특별한 목적을 착안하지 않고서 그 언급을 이해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근거로 나 자신의 교리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본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누가가 본 구원역사적인 넓은 틀로 이 표현을 이해해야 한다.

 

누가는 성령 충만을 교리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성령 충만을 구원론적, 성화론적으로 보기보다, 오히려 선교론적인 구원역사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사도행전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의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문맥에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힌트는 얻지만, 그것에 근거해서 성령 충만의 교리를 확정적으로 발전시키기는 힘들다. 사도행전뿐 아니라 서신서에 내포된 가르침을 참고해야 한다. 서신서와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의 증거는 상호보완적이다. 전체적, 통전적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어떻게 임하는가?

 

단일한 성령 충만이 우리의 삶과 사역을 따라서 다양하게 여러 가지 형태로 역사하신다. 항상 인도, 주관, 은혜를 주심으로써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사역에 따라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강건케 하고 이끄신다. 우리에게 특별한 사역과 임무가 주어졌을 때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임하신다. 핍박에서는 그것을 극복할 힘을, 기도할 때는 기도의 영을, 설교에는 능력과 감동과 확신으로, 상담 시에는 지혜의 영, 위로할 때는 위로의 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헬라어로 구분이 가능하다면 다음과 같다.

 

1. The Acts of Spirit's filling - πιμπλημι :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 주권적 역사, 행위를 좀 더 강조한다.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는 우리가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항상 선재적이다. 성령이 선재권을 가졌다. 우리가 조절할 수 없다. 항상 성령이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기도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조건이 아니라 사실 무조건적으로 예수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주어지는 축복이다. 생수의 강이 이미 흐르고 있다. 주권적 역사이므로 우리가 주관할 수 없다. 선재적으로 내주하시고 충만히 인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 은혜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이 이미 와 있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성령께서 간청하신다. “제발 나의 이 충만한 은혜를 거부하지 말라. 이 역사를 따라 살라!” 생수의 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정반대되는 광야의 길을 헤매고 있다. 육신의 길을 따라서... 그래서 이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어떤 조건이 요구되지 않는다. 물론 기도해야 한다.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묵상해야 한다.

 

2. The State of fullness - πληρης, πληροω : 

좀 더 성령 충만 상태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상태의 측면에서는 우리에게 책임이 따른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지 않고 항상 순종할 책임이 있다. 그 충만한 역사를 거스르거나 소멸하지 않고 그 충만한 은혜가 머물게 할 책임이 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그 은혜에 젖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런 측면에서는 기도해야 한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가 성령 충만한 사람, 열매의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령 충만에 대해 쓰인 경건서적을 보면 혹자는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나”는 제하에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자기를 죽이고, 깨끗하게 하고, 순종, 믿어야 한다 등등...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많은 도움은 주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한 혼돈을 준다. 그 조건을 다 이룬 후 이루어진다면 죽어도 못 받는다. 얼마나 깨끗하게 해야 하나? 내가 깨끗하게 된 상태가,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체가 성령 충만의 상태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그래서 그들이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을 할 때 어떤 의미로 말하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주권적 역사(The acts of Spirit's filling)를 말하면서 성령 충만해야 한다고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항상 충만하게 내재하신다.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욱 강하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다. 성령은 언제나 열심히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 축복을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상태의 지속성(The state of fullness)적인 의미로 말하면 인간의 책임을 말할 수밖에 없다. 자기 부인, 죄 청산, 거룩한 삶, 양도, 순종의 삶... 이런 책임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순서를 우리가 뒤 바꾸어 버리면 성령론적 율법주의에 빠진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생수의 강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다이내믹하게 흐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있다. 거룩한 삶을 살려는 갈망이 있어야 생수의 강을 누릴 텐데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 은혜가 소모되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못 받는 것이 아니라, 계속 멈추지 않고 폭포같이 흐르는 은혜를 무한히 소모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라고 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책임이다. 특권과 책임이 하나로 맞물려 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생수의 강을 주시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성령 충만케 하시는 주권적 역사, 생수의 강의 선물은 예수의 공로에 근거한다. 예수의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로... 우리로 성령 충만케 하시려고 주님이 그토록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왜 주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충만은 특권이요 축복이다.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특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어지지만 우리의 심령이 강퍅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은혜를 소멸키시지 않도록 조심스런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은 예민한 분이다. 조그만 부주의한 교만과 죄로 성령의 은혜가 소멸된다. 작은 죄라도 엄청나게 심각한 죄이다. 작은 죄악으로 너무도 엄청난 은혜를 상실하고 있다 삶을 돌이켜 보라.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가? 삶에 작은 부주의로 엄청난 은혜가 소멸된다.

 

성령 충만은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다.
이런 측면세서 성령 충만은 indicative / imperative의 구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indicative는 성령 충만의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에 근거에서 imperative가 주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성령 충만하라’는 말에는 이 두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다. 성령이 은혜 가운데 주권적으로 역사해서 충만케 하신다. 그러니 이 역사를 제발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님은 이미 충만하게 와 있다. 그것을 거스리면 안 된다. 특권과 책임의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다.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


1. 성령 충만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이 성령 충만하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전혀 모른다면 왜 성경이 “성령을 좇아 살라, 육신을 좇지 말라”는 명령을 하시겠는가? 영적으로 예민해지면 점점 더 밝히 알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육적(carnal) 신자와 영적(spiritual) 신자를 편의상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자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본질적으로 영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의 특별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 잠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성령의 사람들이지만, 그 본분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목회적 측면에서 편의상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크리스천은 모두 영에 속한 사람이다.

 

성도들 중에도 완전히 100%만을 성령 쫓고, 100% 육신 좇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비중의 문제다. ‘어느 쪽으로 기울었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 성령 충만을 받으며 살다가 간헐적으로 죄에 빠졌다가, 다시 하나님 은혜로 회복되는 사람들이다. 비중이 월등하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 즉 95% 정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육신을 쫓아 사는 사람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거의 유지 하지 못해서 육신적으로 치우치는 삶의 비중이 많다. 후자가 지금 현대 교인들의 실상이다. 현대 교인들은 은혜 받기가 너무 힘들다. 특별하게 무슨 집회를 해야 간혹 은혜를 받는다. 영적 질식 상태를 겨우 모면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5% 성령을 따라 살고, 95%를 육신을 따라 살면서, 자신이 51% 정도는 성령을 따라 살고 49% 정도는 육신을 따라 산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2.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 

섣불리 자기 입으로 성령 충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항상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3.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 교인들, 가족들, 자녀, 부인이 인정하면 그럴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이의 평가도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가정에서부터 참된 신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 충만하면 인위적이지 않으나 은혜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함이 전달된다. 옥합을 깨뜨려서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이 흐르는데 내 주위의 사람이 그것을 접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 교회에서도 다른 사람의 성령 충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지만, 초대교회와는 달리 긴밀하게 더불어 살지 않기에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충만은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자기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느 정도 알아준다. 그런데 이 땅에서 100% 온전하게 인식할 수는 없다.

성령 충만의 특징적인 성향은 무엇인가?

Ⅰ. 성령 충만은 점진적이다.

‘충만’이라는 것은 ‘완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번 충만하게 되면 더 이상 충만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의 절대적 의미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상대적인 의미이다. 성령 충만의 양은 받는 그릇에 따라 다르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채워지는 충만이 달라진다. 여기에 대해 자주 사용되는 예화가 있다. 3살짜리 어린이에게 채워지는 공기의 폐활량과 어른의 그것은 다르다. 그러나 둘 다 동일한 충만의 상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갓 태어난 신자도 성령 충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앙이 자람에 따라 그 충만의 양이 더 커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커진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 양적으로 더 증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령은 인격이셔서 부분적으로 나누어서 받을 수는 없다. 예수 믿을 때 신성의 모든 충만 가운데 계신 성령께서 전인격적으로 내재하시는 분께 ‘내가 더 온전히 지배를 받는다’는 개념이다. 내가 더 많이 받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나를 더 많이 ‘주관하신다, 인도하신다, 아무런 장애도, 막힘도, 거리낌도 없이, 자유롭고 편하게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Spirit get the more of us. 성령 충만하게 되면 나의 삶의 전 영역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조절하신다.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는 것이다.

전에는 교회 안에서만 은혜와 성령 안에 살았으나 이제는 교인과 대중 앞에서 뿐만 아니라 은밀한 곳에서도 성령이 주관함을 받고 살아간다. 특별히 우리의 말을 통해서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다. 에머슨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말로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의 됨됨이, 인격, 마음의 상태가 말에 다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말로 나타낸다. 먼저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 이후에 서로 대화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가장 존귀한 것이, 가장 하나님을 닮아야 할 것이 가장 가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말을 가장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들의 말에 성령이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세우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Ⅱ. 성령 충만의 집합성이다(교회 공동체성)

성령 충만을 여러 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성령 충만의 구체적 내용과 특성, 결과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성령 충만의 두 번째 특성은 집합성이다. 곧 공동체적인 차원이라는 말이다. 오순절에 교회에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개인도 성령 충만하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오순절의 성령 충만은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과 사역 속에서 체험했다. 교회가 탄생한 동시에 그 안에서 성령 충만한 개인 신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성령 충만을 조명하고, 또 그 안에서 개인적인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개인이 성령 충만 받았다고 기록된 본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거기서 언급된 개인들은 교회와 단절된 고립된 개인들이 아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구성원, 대표자로서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의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위해 성령 충만 받은 것이다. 누가의 기록에서는 성령 충만의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은 공동체적이고, 선교론적이다.

바울의 관점도 비슷하다. 엡 5:18에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 개개인 신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진 권면이요 명령이다. 바울 사도는 그 구절의 근접 문맥 속에서 성령 충만함의 구체적인 모습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공동체적인 삶, 예배, 교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다. 엡 5:18은 교회가 성전이라는 바울 사도의 독특한 교회론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엡 2장에서 교회를 ‘성전, 하나님의 처소’라고 이해하고 있다.

바울의 성령 이해는 구약적 성령론의 토양 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구약에는 솔로몬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가득했다고 했다. 이런 구약적인 성전의 모티브가 신약교회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실현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말세에서는 손으로 만든 장막이나 성전에 거하시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친히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하신 새 언약의 성취로서, 공동체와 교회 안에 그 영광의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게 된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새 언약의 성취로,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 성령의 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처럼 이제는 새로운 성전인 교회에 성령의 임재가 가득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상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종말론적 비전을 내다보고 있다. 구름이 상징하던 실체가 이제 교회에서 나타난다. 성령 충만을 교회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 신자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그 교회가 성령 충만하다. 그러나 역으로 교회가 성령 충만 해야 개개인의 신자가 충만하다. 충만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고 모습과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 교회가 우선 충만해야 그 안의 소속된 개인이 성령 충만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이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영적 분위기와 토양이 준비되어야 한다. 교회 강단에서 성령 충만한 메시지가 선포되는 예배가 있어야 하고, 성령 충만한 교제와 섬김이 있어야 하고, 카리스마 차원의 은혜가 나타나야 한다. 그런 토양과 분위기 안에서만 개개인의 신자가 살 수 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배양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피폐해 있는 것이다. 영적 토양이 굉장히 척박해져 있다. 아무리 은혜를 유지하려고 해도 교회의 황폐된 영적 분위기가 성령 안의 생명력 있는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 개인 신자는 매우 약하다. 그래서 공동체를 주셨다.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개인의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바울의 관점에서는 신앙생활은 근본적으로 교회 안에서 가능하다. 우리는 환경적 존재이다. 날씨만 추워도 굉장히 움츠려든다.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영혼은 더 그렇다. 영적으로 은혜가 충만한 공동체와 교회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그런 분위기에 쉽게 젖어들게 된다. 그런 영적 분위기 안에서는 쉽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아주 피폐하고 굳어있고 경직된 육적 분위기의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이 발버둥해도 성령 충만하게 살기 어렵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삶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죄 회개만 아니라 교회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가 근본적으로 피폐한 것은 강단의 메시지가 능력이 없고 은혜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목사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지시를 전하면 목사들이 교회 안에 회복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Ⅲ. 성령 충만은 보편적이다.   

성령 충만은 특별한 사역을 하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요 의무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indicative(은혜), imperative(책임, 역할)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공로에 전적으로 의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성령 충만은 성령을 따라 산다, 성령과 함께 거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믿는 동시에 내주하신다. 그 동시에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공급해주신다는 보장과 약속과 함께 내주하신다. 그래서 축복이요 약속이요 특권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영적으로 거듭날 때부터 받는 생득권, 권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기독론적으로 볼 때 Spirit-led man은 곧 성령론적으로 볼 때 Spirit-filled man이다.

이렇게 특권인 동시에, 또한 성령 충만은 우리의 책임이다. 주권적 역사로 항상 인도하시되, 풍성한 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시니 그것을 거스르지 않게 살아서 열매를 맺을 책임이 있다. 긴급한 명령으로 주어진 책임이다. optional한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큰 문제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것이다. 은혜가 충만하지 않아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다이내믹이 없어서 여러 가지 죄에 시달리는 것이다. 매일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야 새 사람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죄의 세력을 극복할 수 없다. 성령 충만하지 않는 만큼 우리는 죄의 세력에 의해 지배 받을 수밖에 없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경륜과 목적이 우리 안에서 구체화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심각하고 근원적인 죄악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죄이다. 모든 죄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 명령을 따라서 살지 않는 것이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우리 교회가 술 취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면서, 왜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사람을 용납해야 하는가? 이런 죄에 대해서 교회는 회개해야 한다.”라고 했다. 성령 충만의 삶이 신약이 제시하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내 안의 죄 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어둠의 영에게 은밀하게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화가 진행이 되지 않는다.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 찰스 피니는 “세상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불평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자기들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증거를 제시할 사람들을 보기를 원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세상은 불평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그런 권리는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을 보기를 원한다. 흑암에 있는 사람이 빛을 보기 원한다. 그 빛을 비추지 못하면 곤란하다. 성령 충만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절대적 의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성령 충만은 아주 보편적이고 정상적인데, 대다수 교인들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대다수가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므로, 마치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령의 충만은 계속 공급해 주실 약속과 함께 우리에게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하심의 은혜와 책임도 수행해야 하는데, 책임을 우리의 힘으로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indicative(은혜)가 imperative(책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것은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면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한 원동력은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주어져야 한다.

indicative의 차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potentially 성령 충만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경험적으로(experientially)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 책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받을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적으로 경험적으로는 아주 소수만이 성령 충만한 것이 현재의 교회의 상황이다.

Ⅳ. 성령 충만은 계속적이며 지속적이다.  

성령 충만은 계속적으로 체험되는 은혜요, 우리가 지속시키고 유지해야 할 은혜이다. 단순히 전에 받았던 성령 충만의 상태 유지만이 아니라 또 새로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어제 획기적으로 성령 충만 받았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동적으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큰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틈을 타서 마귀가 역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교회에서 특별한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이 그런 체험을 한 다음에 죄의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2차 은혜라는 말 자체가 그런 오류에 쉽게 빠지게 한다. 2차 은혜만 받으면 ‘전무후무한 것’이라는 것이다. ‘2차 은혜’는 그런 뉘앙스를 심어줄 수 있는 잘못된 용어이다. 획기적으로 받았을지라도 매일같이 새롭게 성령 충만해야 한다. 기도로 매달려야 한다.   

에베소서 5:18 말씀에는 은혜로 받은 특권(indicative)과 의무(imperative)의 측면이 다 들어 있다. 이 말씀에는 수동태가 사용되고 있다. 주권적인 역사로 성령이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고 충만케 임재 하시려고 한다(indicative).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은 그 역사를 거역, 소멸치 말고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계속 충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imperative). 그러므로 “항상 충만케 하시니, 성령으로 항상 충만케 하라(Let the Spirit keep filling you).” 자원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고, 주어졌을 때 그 은혜를 따라서 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Ⅴ. 성령 충만은 2차 은혜가 아니다.

성령 충만은 오순절 교회의 주장처럼 2차 은혜는 아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 된 다음에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른 다음에, 2차적으로 받을 특별한 은혜가 아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특권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체험적으로 누리지는 못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은혜다. 꼭 예수를 믿고 중생한 후 오랜 기간이 지난 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을 필요는 없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이런 영적인 정도(正道)를 탈피해서, 예수 믿을 때부터 옛 생활을 청산하고 온전히 충성하고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례의 의미는 성령을 좇아 살겠다는 고백과 언약이다. 오늘날의 세례가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오히려 육신에서 오랫동안 헤매고 육신에 매여 있는 교인들이 많다. 여러 가지 영적인 억압과 질병 속에서 참된 신자의 삶을 살지 못한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오순절의 획기적인 2차 은혜의 가르침은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다. 실제적으로 그런 은혜를 받을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는 문제가 있다. 꼭 2차적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은혜에 대한 이해와 개념에 문제가 있다.

Ⅵ. 성령 충만은 우리가 회복해야할 은혜이다.

오늘날 육적인 교회는 육적인 신자를 만들어낸다. 예수 믿을 때부터 성령 충만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예수 믿을 때 죄와 결별하는 회개와 순종을 강조해야 한다. 순종하지 못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성경적이지 않다.

오직 믿음(Sola Fide) 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율법적인 행위를 배제한다.
육신적 에너지로 행하는 행위를 배제한다.
둘째 참된 행함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오직 믿음이다.

믿음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역사케 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행함의 열매를 맺게 한다. 현대 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데 육신을 따라 산다. 그래서 어떤 점에는 획기적인 은혜가 필요하기도 하다. 예수를 믿었지만 너무도 육적으로 산 사람에게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아주 획기적인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2차적인 어떤 은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상적인 패턴은 아니다. 성경의 패턴은 처음부터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의 초기 단계부터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육신을 따라 사는 것에 익숙한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것으로 전환되기는 매우 어렵다. 어쩌면 불신자가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오순절 교회에서는 중생 후에 획기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거기에 대응해서 개혁주의에서는 ‘받을 만한 것은 다 받았다’는 단회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 주장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현재 교회의 상황 속에서, 개혁 성령론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가? 개혁주의 성령론의 문제는 현대 상황 속에 지혜롭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고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현대의 상황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헤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육적으로 방황하고 있다. 그러니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획기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2차적 은혜로 이해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회복해야 한다”고 얘기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예수 믿을 때부터 우리에게 보장된 특권이기 때문에 그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 은혜의 삶에서 탈선을 했기에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삶으로 돌이키기 위해 교회 안에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획기적인 은혜만 받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성령을 근심시키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안에 밀려 들어와서 아주 획기적인 은혜로 체험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계기가 되어서 계속적인 성령 충만을 받는 삶으로 진입해야 한다.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경우는 많지 못하다. 복음을 깨닫는데 시간이 걸릴 경우도 있고, 자기 삶을 온전히 바치는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시간적인 지체가 있더라도 신앙생활 초기 단계에서부터 성령 충만한 삶을 훈련시키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한번 육체의 삶에 고착화되고 길들여진 사람을 돌이키는 것은 아주 어렵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 고난을 받았지만, 성령님은 교회 역사상 2천 년간 고난을 받고 계신다고 말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한없이 탄식하고 계신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의 자원하는 마음을 원하신다. 성령이 강압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신다. 자원하는 심령이 생길 때까지 성령님은 손이 묶인 채 일을 못하고 있는 것과 같다. 성령의 은혜가 너무도 많이 허비되고 있다.

Ⅶ. 결론

성령 충만은 우리가 무한히 낭비하고 있는, 소모시키고 있는 은혜이다. 생수의 강은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그런 무한한 생명력을 활용해서 열매 맺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은혜를 헛되게 하고 계속 방치하는 삶을 살았다. 교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무한하고 엄청난 영적 다이내믹을 무한히 낭비하는 불충을 범하며 살았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주를 갱신할 다이내믹이 주어졌는데, 그것을 지금까지 무시하고 그 은혜를 활용하지 않고 삶으로써 무한히 그 은혜를 낭비해 왔다. 성령님도 우리 안에서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낭비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거스르고 육신을 좇아 삶으로써 시대 전체가 영적으로 아주 어두운 시대가 도래 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우리를 연대(聯隊)적으로 다루신다. 우리는 은혜 체험을 주로 개인주의적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공동체적이고 연대적으로 다루신다. 그 시대 전체가 영적인 어두움과 침체와 가뭄을 맛보게 하신다. 지금이 그런 시대이다. 우리 인간은 굉장히 이기적이다. 자기가 은혜가 있고 영적 은혜를 누리면, 도리어 다른 사람의 아픔이 자기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적으로 다루심으로써 내 심령으로 느끼게 하신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그러셨다. 그들에게도 얼굴을 가리셨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여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하나님을 내 심령으로 누리고 그런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는데, 지금은 눈물의 선지자가 필요하다.

Ⅷ. 성령 충만의 결과는 무엇인가?

로이드존스 책 등을 보면 성령 충만의 결과를 여러 가지 단편적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전도하게 되고, 기쁨으로 살게 됨, 하나님의 임재 체험, 영광 접함, 하나님 상을 새롭게 느끼고 영광스런 기쁨 체험, 말씀전파의 담대함과 능력, 얼굴이 변함’ 등등의 변화를 제시한다. 우리는 성령충만의 결과를 신자 개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 살펴본다.

 

1. 구원론, 성화론 적인 관점에서 본 성령 충만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객관적으로 성취하신 구원을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체험케 하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그래서 그런 사역을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충만히 역사하신다.


Christ in us의 축복이 온전히 임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세 가지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독론                /       구원론              /   성령론

하나님의 형상    / 많은 하나님의 형상  / 형상을 이루심 (성령의 열매로 나타남)

율법 앞에의 의 / 율법 앞에 의인들     /  율법의 의를 이루심

하나님 나라   / 하나님 나라 백성들  /   하나님 나라 백성을 만드심


① 성령충만의 결과는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에서 보면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맺는 것이다.

  성령은 새 창조의 영이다. 우리 안에 새 사람을 창조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신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창조하신다.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뜻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그 고난의 효력을 성령 충만으로 우리 안에 이루신다. 아들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본받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거룩함의 옷이, 내 안에서 끌어낼 수 없는 거룩성이 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역사했던 부흥의 때에 사자같이 포악한 자가 양순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계속 유지하면 계속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잘 나가다가 성질나게 하면 옷을 벗고 헐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배양되어야 한다. 성령충만의 가장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Christ like’의 열매이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의 열매는 이것이 없다. 앞으로 성령운동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은사에서 찾으면 안 된다. 진정한 영성의 표적(mark)는 우선적으로 은사는 아니라,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열매가 우선적 표적라고 해서 은사를 평가절하 해서도 안 된다. 열매는 은사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맺혀지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가 맺히려면 은사가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는 은사를 잘 활용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는 순서를 기억하자. 그러나 ‘열매+은사’이다. ‘인격적인 면+사역적인 면’이 모두 성령 충만 해야 한다. 은사가 성령 충만의 일차적인 결과는 아니지만, 은사 없이 열매만도 나타나는 법이 없다. 열매와 은사는 항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열매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인데, 사랑하려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봉사의 에너지인 은사가 있어야 한다. 가르침의 은사가 없어서 교인들에게 말씀을 잘 나눠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고 할 수 없다. 열매만 성화적인 면이고, 은사는 사역적인 면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은사와 열매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은사는 풍성하게 나타나는데, 열매는 안 나타날 수 있다. 고린도교회나 한국교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경우에는 은사와 열매가 함께 나타나야 한다.  성령충만의 결과는 일차적으로 열매에서 찾아야 하는데, 열매만은 아니다. 열매와은사가 함께 항상 나타나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존재(being)을 새롭게 하시고, 행동(acting0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전인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신다. 전인적 변화를 이루시는데, 성령 충만은 우리의 의식만 아니라 잠재의식까지 깊숙이 침투해서 우리의 심령에 근본적인 치유와 변화를 일으키신다. 내적치유에서 너무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영적으로 침체한 삶을 사는 자들의 의식 속에 성령의 은혜가 침투하면 근본적인 치유가 일어난다. 우리의 전인격 안에 성령의 은혜가 파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잠재의식을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의 꿈의 세계도 변화시켜 준다. 꿈의 신학도 중요하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잠을 자도 숙면을 하고, 꿈을 꿔도 달다. 꿈도 영적인 꿈을 꾼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잠을 잘 때도 죄를 짓는다. 프로이드는 잠 속에서 우리의 잠재의식에 깔린 것들이 많이 표출된다고 했다. 과거 선지자들의 꿈속에서 메시지가 주어졌다. 성령 충만한 자들이라 잠재의식이 정화되어서 꿈이 하나의 방편이 되었을 것이다. 아직 검증되지는 않은 사실이다. 신경계통에도 성령 충만이 영향을 미친다. 예민해지고 날카로운 것을 풀어준다. 아주 느긋한 가운데 살도록 도움을 준다. 호르몬 계통에도 도움을 준다. 호르몬의 분비로 다혈질인 사람도 있다. 성령 충만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생각을 맑게 한다. 기억력을 새롭게, 말의 자유를 준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은사를 활용하는 삶과 사역 속에 열매가 배양된다. 교회에 주님의 구원의 경륜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교회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은 은사를 활용하는 맥락(context )속에서 가능하다. 교회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열매를 맺을 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카리스마적 차원은 본질적인 것이다. 성령 충만하면 교회 안에 열매와 함께 은사가 풍성하게 나타난다. 갖은 은사를 온전히, 바르게 발휘할 수 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사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알려주어야 한다. 성령 충만의 정의, 특성, 결과, 열매에 대해서 밝혀줄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하면 광신자가 된다고 생각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다. 성령 충만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 충만을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에서 볼 때, 성령충만의 결과는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일차적 증거는 열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은사도 나타나야 한다. “우선 열매 그리고 은사”가 옳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의도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구원의 경륜과 직결된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하시는 분이시다.


② 성령충만의 결과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의와 희락과 화평이다.

롬 14:17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 충만하게 되면 우선 하나님 나라가 나의 개인의 삶 안에 의와 희락과 화평으로 임하는 것을 체험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현재적인 천국의 축복을 누린다. 새 창조의 능력이 이 땅이 가장 필요로 하는 축복이다. 새 창조의 능력이 우리들의 모습을 바꿔준다. 서울의 청계천이 죽었다가 회복되었을 때 물고기들이 다시 찾아오듯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버린 이 땅에 하늘의 능력이 임하면 이 땅에 새로운 생명이 넘친다. 하늘의 평강과 화평이 이 땅에 이뤄진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정을 주는 것을 많이 추구한다. 세상 사람들 마음에 깔려 있는 불안과 죄의식을 제거할 능력은 복음뿐이다. 인격을 변화시키고,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병을 고치는 은혜가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 천국의 축복은 천국의 주인이신 삼위하나님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삼위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가톨릭의 유명한 성령신학자 Herbert Mühlen은 “우리가 성령을 체험하면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를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먼저 우리는 성부의 사랑을 체험한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로이드존스는 성령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님이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 하나님 사랑이 신약성경의 Christianity이다.

 

[사례]

Finney :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 몸과 영혼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마치 전기파장이 나를 꿰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정말 성령은 투명한 사랑의 물결같이 내려오셨다. 달리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Moody : “하나님 자신이 그분을 나에게 계시해 주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이제 그만해 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했다. 나도 다시 말씀 선포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의 설교내용에 달라진 점도 없고 어떤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지 않았는데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John Osteen : “뜨거운 용암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하늘로부터 시내가 흘러오듯이 부어졌으며, 나는 나를 떠나서 그분께 들려 올려지는 것 같았다.”

로웰 해리스(18세기 웨일즈 부흥, 웨슬레와 휫필드의 친구) : “갑자기 나는 양초가 불에 녹아내리듯이 내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랑과 평화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났다. 그 때 내 영혼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말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바 아버지"”

로이드존스 :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체험할 때 성령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unspeakable joy)을 누린다.”

개혁주의에서는 보편적으로 셩령의 체험적인 측면과 감정적 측면을 너무 간과해 왔고, 너무 부정적으로 봐 왔다. 그래서 정통신학에서는 너무 교리적이고 객관적 진리만 강조해서 이런 체험을 ‘미성숙한 것, 냉철하고 이지적이지 못한 것, 저급한 것’으로 간주했다. 우리 정통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은 체험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모토 하에 감적적인 부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너무 감정, 체험에 치우쳐서도 안 되지만 너무 무시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성령체험 후 무엇을 느꼈는가를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을 체험함으로써 삼위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했다. 그 생생한 정도는 기질의 차이 때문에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일률적으로 몇 사람의 경험을 강조할 수는 없지만, 성령을 체험하면 삼위하나님을 만나고 접하고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느끼고 그분의 강권함을 받아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동일하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고난과 환란을 능히 극복할 다이내믹이 된다. 우리의 삶이 성령충만함으로 의와 희락와 화평을 누리며 더 깊이 살게 된다.

 

③ 성령충만의 결과는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의(율법)을 이루는 자유이다.

  성령 충만하면 율법의 의로움을 이룬다. 바울은 옛 시대를 대변하는 율법과 새 시대를 대변하는 성령을 서로 반의관계(구원역사적인 반의관계)에 있는 것으로 본다. 율법은 옛 언약시대 아래 있고, 성령은 새 언약시대아래에 있다(갈 3:2, 5 ; 롬 7:6, 8장).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닌 ‘성령 아래의 삶’이다. 이것은 율법이 더 이상 필요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객관적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 주님이 우리 대신 2천 년 전에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셨다. 그 의로움의 근거로 우리가 의롭다함,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 대신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 이 율법을 실현시켜가게 하신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성령을 충만하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고후3:17,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더이상 외부적 율례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구가 없어도 우리 맘속에 심겨진 자유의 법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간다. 성령 안에서 새 언약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 새 언약의 은혜는 우리가 거듭날 때 단 회적으로 체험되고 실현될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서 온전하게 체험해 가야 한다. 죄는 하나님 은혜로 부드러워진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영적침체에 빠졌을 때 이 새 언약의 축복이 성령의 은혜로 다시 체험되도록, 그래서 부드러워지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좇아 살도록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정직한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자원하는 마음을 주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자원해서 좇을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영적으로 메마름에 안주하지 말고 새 언약의 축복을 다시 회복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어거스틴도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계속 참회록에서 기도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지금까지 하이델베르그나 웨스트민스터 등에서 표현하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령 안의 삶보다도 십계명을 지키는 삶, 율법을 따르는 삶으로 강조했다. 즉 율법의 제 3용법을 따라 사는 삶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했다. 물론 이런 관점은 크리스천의 삶이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분명히 객관적 지침을 따라 사는 것임을 부각시키는 장점은 있다. 그러나 그런 측면만 강조하면 아주 경직된 계율주의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이 은혜의 측면도 함께 강조해야 한다. 먼저 이런 성령의 은혜가 풍성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새 계명과 모세율법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구약에 나타나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율법은 돌판에 새겨진 것이고, 새 계명은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 돌판에 새겨지니 율법은 육신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말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추악했겠는가? 우리들의 심비(마음판)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자원해서 지키려는 마음이 생긴다.


구약에 약속된 새 언약의 약속

[렘 31](3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3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겔 36](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성령충만한 삶은 외부적 법이 아니라 성령의 내면적 인도를 받아 사는 삶이다. If you on ly love God enough, you may safely follow all your inclination(만약에 당신이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한다면, 끌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에 끌리게 된다. 성령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심령의 자유이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다.


2. 교회론적 관점에서 본 성령 충만의 결과


 - 하나님 형상, 율법의 의로움,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실현되는 곳 : 이 결과들이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성령 사역의 개인적 차원과 집합적 차원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한      다. 교회는 새 사람의 공동체이다. 목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공동체가 그 사람들의 모습을 회복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 천국 공동체 : 천국이 임하는 곳, 천국원리가 구현되는 곳

 - 삼위 일체적 공동체 : 하나님의 백성(구약적 이미지. 구약언약의 실현으로 신약교회가 세워짐).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

신약성경에 교회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이미지(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가 나타난다. 이 세 가지 대표적인 이미지가 안고 있는 장점은 교회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삼위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영원한 사랑의 결정체로 나타난 십자가의 구속으로 객관적으로 성취된 것이 교회이다.

또한 교회는 성령강림으로 주관적으로 설립되었다. 먼저 삼위 하나님 중심적으로 교회를 이해해야 한다. 교회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라는 인간적인 측면에서부터 이해하지 말라. 삼위하나님이 임재, 통제, 만남, 모든 은총으로 복 주심, 교제와 예배가 이루어지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공동체가 교회이다. 모든 예배나 프로그램이나 목회 사역은 교회 안에 이 교회의 본질적인 특성과 사명을 구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예배, 교제, 전도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① 성령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예배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체험되고 구현되는 것이다. 삼위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이론적으로만 아니라 생생하게 체험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영적인 예배이다. 성령이 교회 안에, 하늘의 영역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고 그 안에 주님이 임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하게 우리 교회와 예배 속에 임하면 분위기가 바뀐다. 땅의 분위기가 하늘의 분위기로 바뀐다. 그 영역 속에 땅에 붙어 있던 우리의 심령이 끌어올림을 받고 깊은 영적 심연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자유주의자 폴 틸리히도 말하고 있다. 엑스타시.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접하면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 모호함, 혼돈의 문제가 그 만남 속에 다 해결됨으로써 holiness를 회복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전인적인 치유가 일어난다. 한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만나게 되면 전과 같은 삶이 아니다. 

미국의 신학자들이 미국교회를 탐방하고서, 교회 안에 예배 시에 경건과 초월성에 대한 의식(sense of holy, transcendence)이 없다고 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체험과 그 표본이 무엇인가를 알게되면, 그에 비추어서 우리의 영적인 모습과 얼마나 동떨어졌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표준으로 우리를 끌어올릴 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부흥운동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실제적 임재가 충만하게 일어났다. 에드워즈, 피니, 스펄전, 평양 부흥 등에서 그런 것이 발견된다. 지금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가 힘든 것 같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 말씀이 권세 있게 전파될 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나타난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있을 때에 말씀의 결과가 달라진다. 똑같은 말씀인데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함께 할 때 결과는 다르다. 말씀하시는 인격으로 회중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체험해야 한다.

 

(시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 63:1-2)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 84:1-2)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이토록 그들이 사모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손으로 만든 장막이나 성전이 아닌, 더 온전한 성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접하고 있고 이 축복이 약속되었는데, 너무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죄악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율법주의로 전락했다. 삼위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상태에서 계속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 율법주의적 신앙으로 변질된다. 존 오웬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무디고 둔해지니 그들 가운데 영광으로 오신 주님을 알지 못했다.”라고 했다. 우리 교회시대도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영광의 성령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 A W 토져는, “하나님이 교회를 완전히 거두어 가셔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지 모른다.”고 했다. 우리의 육신의 에너지와 힘으로 얼마든지 신앙생활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 결핍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교회의 본질적인 특성에 근거해서 예배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② 성령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교제와 섬김

성령은 두 차원에서 역사한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 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한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하나님과만 아니라, 인간끼리도 서로 간 단절되고 분리되었다. 하나님께만 원수된 것이 아니라 서로 원수가 되어 있다. 자기중심적 마음이 다른 사람을 항상 이용할 대상으로 삼는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갈등과 분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성령 충만의 역사가 성도들 간에 참된 fellowship을 일으켜야 한다. 성령은 i우리들 안에서만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서도 역사하신다. 우리는 참된 교제와 섬김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오직 성령 충만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교제 속에서만 참된 섬김이 가능하다.

어떤 학자는 “죄는 교제의 결핍이라고 말한다, 교제를 파괴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했다. 교제의 회복이 없이 성령 충만은 어렵다. 부흥의 발단이 교제 회복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있었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도 선교사들이 서로의 시기와 잘못을 통회할 때 그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런 갈등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해결되어야 성령 충만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초대교회는 이 두 차원의 성령역사가 온전히 나타났다.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교제의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들의 예배상황을 추적하면 모여서 성령 안에서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지금 우리는 너무 수직적인 관계만 focus를 맞추다보니 수평적인 신자가의 교제와 섬김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것인가?” 이 질문은 올바른 질문인가?

 

성령 충만에 대해 기록한 경건서적을 살펴보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것인가?” 하는 제하에서 여러 가지 조건과 스텝을 제시하고 있다. 대개 그런 조건은 다음과 같다.


 - self-emptying(자기비움) : 자기를 비워야 한다. 그릇이 깨끗이 비워져야 한다.

 - consecration(성결) : 죄를 다 청산해야 한다. 특별히 알고 있는 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죄를 다 회개해야 한다.

 - self-surrender(양도) :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양도해야 한다. 굴복되어야 한다.

 - obedience(순종) :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

 - faith(믿음) : 믿음이 항상 마지막 단계로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앞의 4가지 전제조건을 다 이룬 다음에야 믿음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개 이런 스텝을 거쳐서, 조건을 이룸으로써 성령 충만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가르침은 이런 책을 읽는 사람에게 도전과 유익과 도움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가지 혼동과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믿음이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다. 문제가 있지 않은가? 또 다른 문제는 자기 비움의 정도의 문제다. 또한 자기청산에 대해서도 자기 기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만일 영적으로 너무 예민한 사람은 끊임없는 내적 자기 성찰의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

James Packer는 “Keep in step Holy Spirit”에서 말하기를 “성령 충만 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우고 양도해야 한다는 조건적인 가르침에 대해 나는 탐닉해서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결사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고 성결케 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승리와 기쁨이 가득한 삶이란 점점 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그런 행복한 삶을 획득하지 못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자신을 거듭 성결케 하려는 노력을 되풀이하며 축복을 받기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추적해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나 자신의 심리를 성찰하며 그 내부를 찢길 때까지 추적했다. 그러나 계속 버스를 놓쳐버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신앙생활이 마치 신발 속에 돌멩이가 들어가 걸을 때마다 절룩거리게 하는 것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런 가르침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500년 전 종교개혁 시에 로마 가톨릭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는 조건으로 거룩함을 제시했을 때 루터의 경험처럼 성령충만 받는 문제에도 먼저 거룩함을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조건을 다 이룬 다음 성령 충만 받는다면 죽을 때까지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조건을 내 힘으로 다 이룰 수 있는가? 은혜를 받기 전에 다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율법주의적인 삶에 빠질 것이다. 만약 노력으로 조건을 다 이루었다면 성령 충만을 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삶 자체가 성령 충만인데... 이런 삶을 내가 내 노력으로 이루었다면 은혜가 필요 없게 된다. 이런 오류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성경적으로 교정해 보자.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느냐?”는 질문 자체도 엄밀하게는 정확하지 않다. “어떻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가”로 바꾸어야 한다.

성결의 조건을 내세우는데, 그것을 해결할 능력 자체가 나에게 없다. 만일 내가 철저히 순종하고 자신을 양도하고 죄를 해결했다면, 그것 자체가 성령 충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논리적 모순이다. 따라서 성령 충만의 종류를 나눌 때 두 가지, 세 가지로 나누면 안 된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의 두 측면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첫째, Acts!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다. 이 주권적인 역사는 선재적이다. 우리는 주시는 것을 그저 받는 것이다. 둘째 State! 성령의 역사를 거스리지 말고 그 역사를 따라서 살아라!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책임이 필요하다. 만일 앞서 말한 성령 충만 전제조건 제시 자들이 이 두 번째를 말했다고 한다면 한편 일리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있다. 믿음이 맨 마지막에 오는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앞서야 한다. 조건을 다 이룬 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시기에 우리들이 순종할 수 있다. 믿음 다음에 책임으로 양도, 자기 비움 등이 따른다. 조건이 아니라, 책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책임 있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게 하시니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충만을 위한 모든 전제조건들을 다 이루셨다. 우리는 이미 특권을 받은 자들이다.

성령 충만한 삶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1. 영적인 상태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들이 자기기만 가운데 빠지기가 쉽다. 교회는 외적인 번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내적인 빈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이 가장 중요한 내적인 본질인 성령 충만의 은혜를 상실하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인처럼 자족에 빠지기가 쉽다. 그러나 실상은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보지 못한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충만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적은 은혜로 만족해 버린다. 이미 충만하다고 착각하므로 더 충만해질 필요성을 못 느낀다. 성경의 기준과 표준을 낮춰버렸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신학이 없는 목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없다. 교회를 세상 나라의 연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목회가 없는 신학도 문제다. 현실에 대한 인식 없이 그저 공중에 뜬소리를 할 수 있다. 성령 충만의 복된 측면을 인식해야 한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주님의 뜻이 이뤄지지 않음을 가르쳐야 한다. 의무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성령 충만의 회복이 가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경건한 삶을 사는 보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한 자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 이라는 선물을 주신다.

복음서의 제자들은 초기에는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한 자들 이였다. 그 후에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순간에 성령 충만이 주어졌다. 성령 충만은 실패한 자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 주는 은혜이다. 우리가 영적 침체의 깊은 심연에서 이 회복의 은혜가 임한다. 인간적으로 가장 소망이 없을 때 하나님 안에서 소망이 있다. 그때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과 회복의 역사는 우리들이 영적인 침체의 골짜기에 있을 때 나타난다. 심연은 뒤집어놓은 정점이다. 하나님은 뒤집기의 명수다. 사막에 물 댄 동산처럼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다. 가장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부흥을 예비하신다. 깊은 타락의 역사에서 탁월한 영적인 거장이 나타난다.

2. 갈망이 있어야 한다.

속히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있기를 갈망해야 한다.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만큼 성령 충만할 수 있다. 겔 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한번 육신을 따라 사는 삶에 익숙해진 사람이 돌이켜서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오냐하면 육신적인 섦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들이 악을 행하기에 익숙하니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악은 자기의 뜻대로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악이다. 거기에 익숙해지고 굳어지면 돌이키기 힘들다. 영적 회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자유는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간섭과 은혜가 임해야 한다.

우리가 죄 성에서 방황할 때 우리를 돌이키는 특별한 방법으로 돌이키는 역사를 하시는데 육적인 기쁨과 평안을 말려버리는 은혜로 역사한다. 이것도 중요한 은혜이다. 스펄젼 목사가 이렇게 표현했다. 성령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 뒷면에서 역사하는 쓰디쓴 은혜를 맛보게 된다. 은혜의 뒷면은 하나님의 질투이다. 뒤로 하나님의 질투의 불로 우리의 심령을 다 말려 버린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감동해서 인도하실 수 없으면, 환경을 동원해서 우리를 말리는 역사로 일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실 수 없으면, 하나님의 섭리를 총 동원해서 충격요법, 비상수단을 사용해서 우리의 죄성을 깨드리시고, 굴복시키시고, 항복시키시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는 자신의 메마른 심령임을 깨닫게 된다.

목마름은 강렬한 욕망을 의미한다. 목마르면 물만 생각난다. 메마른 심령은 전심으로 생수를 원하게 된다. 은혜의 법칙은 전심으로 그것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동시적으로 있을 수 없다. 두 마음을 품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충만하지 못한다. 전심으로 성령만을 쫓기를 원해야 한다. 한 순간이라도 육신의 뜻을 좇아 가면 성령 충만을 못 받는다.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간음하는 여인과 같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생수가 없으면 목말라 죽겠다고 생각할 때 은혜가 임한다.

야고보서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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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을 성령의 은사나 기적 행함 또는 열광적인 기도의 몰입이나 황홀경의 체험 등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 충만의 원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단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상태만 가지고는 우리를 충만히 다스리지 못하십니다. 우리들 자신의 욕망과 편견 등으로 가득 찬 영혼으로는 결코 성령 충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성령께 온전히 우리의 영혼이 붙잡히게 될 때 성령 충만의 상태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에 충만할 때 우리의 삶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와 복종의 영으로 넘치게 됩니다.

에베소서 5:18∼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뜻으로 늘 영혼이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곧 성령 충만의 상태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개의 크리스천들이 관념상으로는 성령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생활 속에서 성령께 인격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비록 성령 충만을 구하고 있지만 이를 얻지 못하는 경우 또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많은 기도를 드렸을지라도,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께 인격적인 복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성령 충만을 구하고 계시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그 경험을 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과연 내가 성령께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온전한 복종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시다면 이제는 마음의 태도를 회개하여 주님께 대한 복종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 성령 충만을 받았으나 현재는 충만한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주 쓰러지는 분들이 계시다면, 과연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령께 복종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고 그 부분을 새롭게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난 이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히 우리의 영혼을 통치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대부분 신자의 삶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 분은 인격을 지니고 인격적인 관계를 우리와 맺기 원하십니다.

또한 성령 충만이란 성령과 친밀히 교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친밀한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했습니다.

창세기 3:8∼10,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멀리 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온 것은 죄악과 수치와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인간의 영혼은 부패한 죄성을 유전(遺傳)으로 온 인류에게 이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끊어진 교제의 다리를 다시 잇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죄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신앙의 경륜이 오랜 분들만이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 나누기를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성령 충만한 상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회복이란 바로 주님과의 끊어진 교제를 다시 잇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는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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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을 향한 강단의 요란한 목소리와는 달리 성령 충만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성령 충만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본문은 에베소서 5장 18절 이다.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이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본문들은 주로 성령 충만이 특별한 구속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지만(그래서 우리에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 본문은 에베소 교회에 주는 일반적 명령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주 간단한 명령문을 한국인으로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원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첫째 오해, “받으라!”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에 근거한 설교를 듣게 때 뭔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문에는 ‘받는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번역이 생겼을까? 그것은 바로 한국말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원문의 수동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직역을 하자면 “성령으로 충만해져라”라는 뜻이다.

이 표현이 부자연스러우니 “충만을 받으라!”고 번역한 것이다.
“받으라”가 수동태의 한국적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복을 받는다(blessed)” 혹은 “구원을 받는다(saved)”도 뭔가를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상태에 들어간다.’를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는 번역은 상당한 오해를 준다. 무엇보다 성령을 인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야 할 어떤 영적인 물질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령과 관련하여 우리가 무엇보다 가장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니케아 신경이 가르치듯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를 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데, 이것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령을 어떻게 하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할까를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떻게 성령님을 예배할까?”라는 고민이 없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만 하면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둘째 오해, “내”가 성령 충만을 받는다.

성령 충만과 관련하여 우리가 던져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은 ‘누가 성령 충만을 받는가?’이다. 소위 부흥강사들이 강단에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하면 청중들은 경쟁적으로 “아멘!”하고 외친다. 어떻게 보면 성령 충만을 서로 먼저 받으려고 경쟁을 하듯이 더욱 더 큰 소리로 응답한다. 한글 성경 번역은 누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한국어 명령문에서는 주어가 거의 대부분 생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는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바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할 대상은 “너희”이다.


이것은 성령 충만을 이해함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본문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성령 충만을 혼자서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물론 개인적인 성령 충만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에베소서에서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성령 충만은 한 개인의 충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성령 충만이다. 즉 성령 충만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문제이다. 즉, 성령 충만은 주위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한 몸으로서 받는 것이지 다른 형제는 성령 충만하지 않는데, 자기만 혹은 자기라도 성령 충만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셋째 오해, “성령으로?”

개역 개정판에서 “성령으로 충만”이라는 번역은 모호하다. 물론 “성령의 충만”이라고 번역한 이전의 개역 성경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모호성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잘못 이해하면 성령으로 우리들을 가득 채우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 드럼통을 기름으로 가득 채우다.)

그렇게 되면 성령을 “받는다”는 개념이 그대로 남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서 “성령으로”라는 말에서 “으로”는 문법적으로 수단적 여격에 대한 번역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는 “성령에 의하여”로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성령님에 역사에 의하여 너희들이 충만해져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인 성도들이 가득 채워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 부분에서는 단순히 원문에 대한 낱말풀이만으로 성령 충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다. 신학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핵심적인 것은 바울 사도가 이 부분에서 구약의 성전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 성전은 뭔가 가득 채워지는 곳이었다. 그것은 구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성전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 역시 구약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 이 충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죄인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한 몸이 되어서 삼위 하나님과 가장 큰 친밀한 교제를 누린다. 이것이 “너희가 충만해져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충만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만이 특별한 비법을 통해서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고신교회야말로 아주 풍성한 성령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고신교회는 일부만의 성령충만을 조장하는 개인적이고, 부분적이고, 배타적인 성령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고신교회가 풍성한 성령론을 누리게 된 것은 바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성령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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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중의 하나가 성령 충만 이란 단어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여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하여 알려면 성령에 대하여 아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는니라. (고린도전서 12:3)

성령이란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삼위일체는 신학적 용어로서 곧 “하나 안에 각각 셋”이란 뜻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가운데 제3위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 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신성이 그의 명칭과 속성이나 사역에서 그 존영이 나타납니다. 성령은 예배와 경배의 대상입니다. 성령은 신적 존영이 동등합니다(마 28:19, 고후 13:13)

성령의 사역은 이렇습니다.

- 자연의 영역에서 창조(창 1:2, 욥 26:13: 시 33:6)
- 인간에게 재능을 부여(출 28:3, 31:3-4)
- 구속의 영역에서 예언(벧후 1:21, 요 16:13, 행 11:28) 
- 성경 기록에 감동(딤후 3:16, 벧후 1:21, 사 34:16)
- 구원에서 주를 믿어 시인케 함(고전 12:3)
- 인간의 영을 거듭나게 함(요 3:6)
- 예수를 증거함(요 15:26)
- 기도하고(롬 8:26) 근심(사 63:10)
- 허락하는 일(행 16:7)과 말씀하시는 일(행 10:19-20)

성령은 어떻게 받습니까?


성령께서는 아무리 귀하고 좋으신 분이라도 내 마음에 그분을 체험치 못하면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을 체험 할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2장37절에서38절에는 말씀을 잘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세례를 받고,죄 사함을 받으면 선물로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령을 받으려면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고 사모하는 가운데 그 말씀이 내 본질을 찌를 때마다 가슴 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 회개 다음에 죄 사함, 그 다음에 성령이 옵니다.

성경도 싫어하고 회개도 하지 않고 불 받았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성령을 남용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사도행전 4장31절에서34절까지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우리가 다 성령이 충만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성도들) 성령 충만에 대해서 좌우로 치우친 경향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첫째로 무슨 극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상한 체험이 아닙니다.

이런 이상한 힘이 몸속으로 들어오거나 이상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온 몸이 떨리거나 진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으면 등허리가 뜨거워지거나 어떤 이상한 것을 체험하는 것으로 생각하나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은 곧 성령세례가 아닙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그 시간 이 곧 성령세례 받는 시간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시간 바로 그분과 연합하여 하나가 될 뿐 아니라 성령세례 받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은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금욕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즉 우리 자신의 행위나 노력에 의해서 소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들의 의지, 지식, 몸, 시간, 재능, 소유, 욕망 등을 성령께 양도한 것을 말합니다.

“충만하다”의 뜻

충만하다 의 헬라어 “플레로오”는 세 가지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돛단배를 힘차게 달리게 하기에 충분한 바람을 “플레로오”라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돛단배는 오직 바람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바람이 적고 많음에 따라 바람의 강약에 따라 그 속도의 정도가 결정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라 함은 오직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야 합니다. 돛단배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도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성도에게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람이 힘차게 불수록 배는 빨리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성도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일할 때마다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바람이 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스며들다”는 말에 사용하였습니다.

즉 고기나 생선에 소금이 스며들어 부패를 방지하고 오히려 맛을 내게 하는데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생활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 세상 부패한 윤리와 타락한 생활에서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보존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데 있어서 소금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음란과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아 갈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로 전적으로 조정하고 지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슬픔이 가득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감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분노로 가득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분노의 감정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술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 하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장갑은 전적으로 손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장갑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장갑은 전적으로 손에 의해 지배되고 조종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갑을 낀 손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께서 이끄는 대로 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화를 생활에 옮겨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고 용기를 주고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더러운 생각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정결한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삶 전체가 성령의 지배와 조정을 받아 인간의 고집, 생각, 의지, 이익, 욕심이 아닌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첫째, 성령 충만한 사람은 지혜도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지만 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되고, 지혜가 충만하지만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과 지혜 는 동시적으로 충만해야 하고 동시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지혜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살아가는 기술'이란 뜻이라고 켄 가이어는 '묵상하는 삶'에서 말하였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죽어 가는 기술로 가득해집니다. 진정한 삶의 기술은 성경에서 얻을 수 있으며, 참 지혜는 성경에서 성령을 통하여 공급됩니다.

둘째, 성령 충만한 사람은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가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성경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라고 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은 칭찬 듣는 조건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칭찬의 대상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면서 칭찬 듣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칭찬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 충만한 사람이 교회의 일꾼입니다

성령과 지혜 충만하고 칭찬 듣는 것은 교회 일꾼의 자격입니다. 교회 일꾼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지식도 필요하고, 재물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필수 조건입니다. 없어서는 안될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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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pneuma)의 의미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단 한번 사용된 말씀입니다.
원문에 보면 그렇지 않다. kai me methyskesthe oino, en ho estin asotia,(술 취하지 말라, 그 안에 방탕이 있다.) 술 먹는 것 자체가 방탕이 아니라 술 먹음으로 방탕해 간다. alla plerousthe en pneumati,(그러나 영으로 충만케 되라.)

먼저 여기서 그 영(pneuma)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영을 대부분 현대판 성경과 우리말 성경이 성령으로 번역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라도 the Spirit라고 관사를 붙이고 대문자를 써서 결국은 성령인 것으로 번역을 해놓았다. 그런데 pneuma라고 다 성령으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관사 to나 형용사 hagion(거룩한)과 함께 쓰여 져 있을 때는 분명히 성령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나 문맥에서 단독으로 쓰여 졌을 때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므로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바울의 용법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체험을 영이라 했다. 또 힘 혹은 능력, 지혜를 다 영이라고 했다. 엡 1:17에  pneuma sophias kai apokalypseos(개역 성경에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 즉 진리의 영과 계시의 영이 나오는데 이것을 성령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리의 영은 분별하는 영을 말하고 계시의 영은 진리를 알도록 하는 영을 말한다. 여기서 pneuma하고 sophia가 동격으로서 지혜가 곧 영이다.

요한복음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영이 사람을 살린다고 했을 때 예수님의 그 말하는 것을 성령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말이 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예리한 능력 면에서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세 혹은 능력, 지혜 등의 새 생명의 능력의 의미로 영이 쓰이는 것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또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영을 혼동하면 안 된다. 영이라고 할 때 성령도 되지만 성령에 의해서 새로워진 그리스도인의 생활 혹은 그 존재방식을 영이라고 한다. 이럴 때는 육과 대조된 것으로서의 새사람의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의 번역들이 영(pnuema)을 전부 성령으로만 번역을 했는데 이런 의미의 구분을 혼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육이 영이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지만 죄만 즐기던 옛사람이 의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으로 있는 존재방식 그것이 영이지 그때도 성령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의 인도로 결과 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존재를 영이라고 한다. 육은 자연인의 사고방식, 생활, 이런 것들의 전체로서 옛사람을 말한다. 말하자면 죄짓는 사람의 존재방식과 생활방식이다. 영은 그러던 데서 성령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로 사는 새 생명을 말한다. 죄 짓는데서 의를 행하는 새 생명의 존재방식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세가 새 생명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엡 5:18이하의 문맥에서 바울 사도는 옛사람의 생활 방식과 새사람의 생활 방식을 대립시켜 놓았다. 18절의 전반부에 있는 술 취해 사는 것은 옛사람의 일이다. 18절 후반 절부터 영(새사람)의 삶이 나온다. 여기 pneuma에 정관사도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도 없으니 그대로 영으로 해야 한다. 옛사람의 삶은 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고 영의 삶은 성령의 인도 받아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새사람으로 사는 삶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진행되는 문맥이 다 영으로 사는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며 범사에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자 복종하라." 이것은 성령으로 인도 받아 사는 전혀 새로운 삶이다. 그 전에는 그런 삶을 전혀 생각할 수 없고 불가능하였는데 성령으로 인도 받아 이렇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영의 삶이다.

충만(pleroma)의 의미   

그 다음 이 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가 특히 바울의 서신 중에서 충만을 말하는 책이다. pneuma란 말이 여기에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처음 교회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을 사용한 후 다른 신약 성경에는 충만 이라는 말이 없고 에베소서에 처음 나온다. 우리는 충만 이라고 할 때 물이 독을 가득 채우듯, 공기가 지구에 가득 차 있듯 하는 가득 담기는 것으로 일차적으로 이해를 하는데 바울이 사용한 충만은 소위 교회론적인 전개에서 이해해야 한다.   
엡 1:22-23에 kai panta hypetaksen hypo tous podas autcu, kai auton edoken kephalen hyper panta to ecclesia, hetis estin to soma aotou, to pleroma tou ta panta en pasin pleroumenou(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해 충만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이 그의 발아래 놓여 있다는 표현은 적을 잡으면 정복자가 발로 적의 목을 밟는다는 동양적 표현이다. 그러니 완전한 복종을 의미한다. 즉 독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충만이 나온다.

바울에 의하면 자기가 복음을 전해 가지고 로마 천지에 교회가 가득 재워져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 교회가 각 족속들에게 퍼져 있어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충만이 무엇이냐 하면 온전한 그리스도의 통치 혹은 지배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만유를 지배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는 그것을 지금 말하고 있다. 그래서 충만의 표가 무엇이냐 하면 모든 만물이 그의 무릎 아래 꿇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스리시고 다 어거하신다. 그런데 그 힘을 교회를 통해 행사하신다. 그래서 교회가 일차적으로 또 궁극은 그리스도의 통치의 자리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해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일이어서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다.

또 에 3:19에 충만이 나오는데, ginonai te ten hyperballousan tes gnoseos agapen tou Christou, hina plerothete eis pan to pleroma tou theou(...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이다.

바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기까지 충만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지각위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구속하신 넘치는 사랑을 말한다. 하여튼 에베소서 전체의 문맥에서 충만 이라고 할 때 교회론적 입장에서 전개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통치를 말한다. 그래서 교회가 확장되는 것은 분명하게 만물이 그의 발아래 복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에 관하여 제일 많이 말하며 특히 바울의 주된 글인 4대 서신에는 전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한곳이 없다. 다만 엡 5:18인데 그것은 바울의 후기 작품으로서 그 한 구절의 잘못된 번역으로 바울의 주된 사상을 바꿀 수 없다. 롬, 갈, 고전후가 바울의 가장 중심 되는 사상인데, 특히 롬 8장에와 갈라디아서에 성령의 인도함 받아 사는 것을 말하고 있고 지금 유행하는 "성령 충만"에 대해서 그 어느 곳에도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전체에서 부분을 조명해야 한다는 개혁신학의 성경해석 원리에 비추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계속 성령을 좇아 사는 것,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것이 영으로 충만케 되어지는 삶이다.

"plerousthe"(한글 개역 성경: 충만을 받으라)의 바른 의미

여기의 plerousthe는 수동태 명령법이다. 그래서 "충만케 되어져 있으라"로 이해해야 한다. 항상 성경에는 직설법과 명령법이 같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명령법만 보고 직설법을 못 보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이미 성령을 받아져 있는 상태를 말하고, 이미 받아져 있으니까 성령으로 사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항상 직설법에 근거해서 명령법이 나온다. 다 은혜이어서 은혜로 살도록 명령한다. 그런데 직설법은 못보고 명령법만 보고서 문제를 일으킨다. 성령이 와계시니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지 내가 기도해서 그를 끌어다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좇아서 죄와 투쟁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며 사는 삶이, 꼭 그 말을 사용하고 싶으면, 성령 충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만의 일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되어지는 일이다. 사람이 언제 죄와 투쟁하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 식의 성령 충만을 받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 때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일을 한다. 어떻게 사는 규범이 없는데 성령이 스스로 즉각 즉각 직접 말씀해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시니 늘 말씀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도 없이 성령 충만만 받으면 되는 줄 아는 것은 잘못이다. 금식 기도하고 방언을 받아도 옛사람은 안 벗고 그대로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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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이란 성령 세례의 결과이다. 세례는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성령을 부어 주심이요 충만은 제자들이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단 하나 밖에 없는 최초적인 체험으로서 반복될 수 없고 상실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충만은 계속적이며 반복될 수 있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이란 그리스도로 충만해짐을 말합니다. 생수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요 7:37-39). 성령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경험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어 주십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계속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목마른 심정으로 마시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찰스 피니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많은 빛을 소유했으므로 죄인이 회개 안하는 죄보다 성령 충만하지 않는 죄가 더욱 크다"

 앤드류 머레이 "성령충만을받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 일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성령충만을 구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께서 충만히 임재하시어 그분의 뜻을 우리를 통해 나타내심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첫째로,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 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습니라?(요 16:13-14).

 성령님이 역사하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아지며 그 이름이 증거되었습니다.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어려움을 당하자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가하나님의 말씀을 전싸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더욱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분은 자기 모습을 강조하시지 않고 그분이 일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임하기에 성령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도 했습니다.

둘째로, 성령충만은 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남을 뜻합니다.

 주께서도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엡 5:18을 보면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말씀을 골로새서 3:16-18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켜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로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충만" 대신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로 바꾸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령충만이란 말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히 거한다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성령충만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고 영원하신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말씀으로 우리를 충만히 지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성령충만은 술취함으로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의 중추신경을 지배해 버리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되 그분의 말씀 다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우리 속에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두가 지 의미

1)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

 성경에 보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성령충만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출 31장 2-3절에서는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만들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장막짓는 일을 감당케하기 위함입니다.

눅 1:15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저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고 했습니다.요한의 모친 엘리사벱에 대해 "엘리사벱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41)라고 했으며, 부친 사가랴에 대해서는 "성령이 충만을 입어 예언자가 예언하여 가로되"(눅 1:67)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예언을 하거나, 어떤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았음을 알수있습니다. 즉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입는 권능입니다.

 오순절 사건도 이와같은 것입니다. 행 2: 4 "저희가 성령으 가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충만은 선명한 체험을 갖갖게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성령이 자기에게 임한 것을의식했고, 새능력과 환희로 옷입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상시에는 일어 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 일을 우리의 신앙현장에서, 목회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2) 생활상의 성령충만

엡 5:18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한 충만은 오순절사건과 같은 충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상에서 누리는 영적인 " 상태를말합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이같은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행 6장에서 일곱집사를 뽑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들이 뽑고자 했던 일곱 집사의 조건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뽑혔고 7장 순교하기 직전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것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행 7:55).

 하나님께서 그에게 순교를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셨는데 이때의 충만은 곧 능력의 충만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앞서서 받았던 성령충만은 엡5:18에서말하는 충만입니다.

엡 5장의 성령충만하라는 동사는 현재 계속적인 명령법이요, 특별한 경우에 일시적으로 임했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을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받으라는 명령입니다.

행 2장의 성령충만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실 때 받는 것입니다. 엡 5장의 성령충만함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그리스도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성령충만함을 받아들일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둘째로, 성령충만으로 나타난 상태가 다릅니다.

 엡 5장의 성령충만은 시와 찬미의 생활로 나타나며(엡 5:19), 감사와 복종의 생활로나타난다(엡 15:20, 21).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고 난 후 마음이 즐거운 상태를 맛보는 것은 보통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병고칠 능력이 없어도 누릴 수 있는 충만이다.

 성령충만을 방해하는 것들

 1)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

 그리스도인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 성령충만은 방해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들을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지식의 결핍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소홀히 하고 그로부터 공급받는 능력을 약화시켰다.

 2)교만과 거만한 마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잠 16:18). 교만은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신다. 교만은 사단의 죄이다(사 14:12-14).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 5:5).

 3)다른 사람들에 대하나 두려움

 현대 크리스천들이 다른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기를 두려워하고 오히려 비기독교인 사회의 행위와 표준에 적응하려고 한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벧전 2:9) 복음을 부끄러워 말아야 한다.

 4)고백하지 않는 죄

 죄는 하나님의 능력의 생명선을 끊어버린다(시 66:18). 그리스도인의 심중에 아직도 곱개하지 않은 육체적, 인격적, 정신적, 영적인 죄악이 한가지라도 도사리고 있다면 결코 성령충만은 있을 수 없다.

 5)세속적 쾌락에 물든 마음

 물질을 사랑하고 세속사회의 풍습에 젖어서 살려는 욕망 때문에 방해 받는다.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는 비결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마 6:2433)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충만하다고 말한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있으면 그것이 내 마음을 채웠다고 말한다. "가득차"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끼치는 절대적인 영향을 그렇게 표현한다.

엡 5:18에 철저히 인격적인 차원에서 거론된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할 때에 이는 "술기운으로 살지말라. 성령의 기운으로 살아라"는의미이다. 성령의 기운(감화)로 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전체 인격이 다른 영향과 다른 세력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성령이 우리를 조종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케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1) 첫째 성령으로 충만하라, 계속 충만하라, 계속 성령의 통제를 받으라이다. 강압적인 명령이다. 이는 경험이 아니며 계속적인 상태이다. 하나의 축복으로 구할 것이 못된다. 특출난 체험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늘 영구적으로 처해 있어야 하는 상태와 조건이다. 항상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된다고 명령을 했다. 외부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조종하고 결정할 문제인 것이다.

 끊임없이 말씀을 통하여 명령과 훈계와 권면을 받는다. 결코 그것을 "한 체험을 갖는다"는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순절날 제자들에게 있었던 일은 체험이다. 고넬료와 가족들도 하나님의 체험을 알았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그들을 위해 안수하여 기도할 때도 체험이 일어낫다. 성령의 "인침"을 받는 것이나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일정한 체험입니다. 그것은 조정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받는 것이요, 주님의 역사에 속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우리가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령과 권면의 형식으로 진술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입니다. 중생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의 계속 충만함을 받고 있을까 받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입니다.

 * 어떻게 생활상의 충만을 받을 것인가?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앞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께 반대되는 것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성령의 통제아래 있지 않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탐욕과 정욕에 나를 맡긴다면 성령은 나를 조종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갈 5:17-육체의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들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죄를 짓는 생활을 산다면 성령을 근심케 해 드린 것입니다. 그가 근심하게 될때 그는 나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뒤로 물러 앉습니다. 성령을 소멸해서도 안됩니다. 성령은 내 속에서 나를 개우치시고 아이디어를 제고하시고 생각들을 유발하시고 암시해 줍니다. 이것을 거절하거나 무시할 때마다 성령을 소 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서 술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벧리알이 어찌 조화되며.."(고후 6:14-15)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을 멈추고 마귀를 대적하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또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잔재와 습관들에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1)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계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못하느냐?"(고전 6:19). 성령께서 '영광스럽고 반가운 분'으로 늘 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때 성령의 통제를 받게 된다.

 예) 손님이 묵게 될 때에 자녀들에게 조심할 것을 주의시킨다. 우리가 정말 성령의 통제를 계속 받으려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가 계신 것을 기억하라 교제하며 교통하기르 간절히 바라야 한다. 고후 3:13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 3:13)

 복종하자! 기도하자!

 성령께서 하라는 것을 하라. 지시에 예민하라. 이것이 성령에 더욱 더 충만해 지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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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이란 말을 들으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제일 먼저 “방언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각종 질병과 불치의 병들을 고치고”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또는 사도행전의 마가 다락방과 같이 오순절의 불과 같은 역사나 안수 받고 쓰러지는 것 혹은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현상에만 집중하면 성령 충만함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께 사로잡혀 있는 상태, 성령의 온전한 통치와 인도하심 안에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현상이 본질인 줄 알고 착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쓰임 받는 중간에 사역에 실패하고 그만두게 되는 많은 일들이 나타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현상이 아니라 상태
성령 충만이란 초능력이 아니라 인도하심
성령 충만이란 철저한 통치를 받는 것

성령은 능력이나 힘, 에너지가 아니라 예수님과 똑 같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이, 예수의 이름으로 마치 왕과 같이 내 모든 인격(지정의)뿐 아니라 육신까지라도 다스리고 지배하셔서 하나님의 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나타나게 하는 일을 위해, 그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열매 맺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케 하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단 한번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성령에 의해 다스림 받는 것, 인도함을 받는 것, 통치를 받고 이끌림을 받는 것,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첫째, 지혜로운 삶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의 지혜로 우주와 만물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그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혜는 인간의 어떤 지혜나 지식보다 앞서 있으며 최첨단의 길입니다.

그 지혜롭고 능력있으신 성령이 나를 다스리시고 이끄시면 이 세상 사람들이 당장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인다 할지라도 가장 현명한 순간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유산을 나눠달라 부탁하는 한 부자 (눅 12:13-21)

        -    세월을 아끼라(16) = 기회를 놓치지 말라

        -    눅 16장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뤼지프스 동상 이야기

둘째,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인생 사명을 깨닫게 합니다(17-18).

-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판 형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하셨다고 했다(창45:5-8).

- 어리석은 자(17) – 기본적 지혜의 부족함을 넘어 도덕적으로 우둔함

- 사업에 실패하고 뒤 늦게 예수 믿은 어느 집사님의 고백

-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11:24-26).

진정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방탕한 삶, 세월을 낭비하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지금까지 헛되이 살아왔던 시간들…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고, 영혼의 때에 전혀 도움도 유익도 없는 삶을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도 후회스럽고 안타깝게 느껴지기에 전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달려들고, 조금이라도 더 영적인 일들(말씀, 기도, 전도, 섬김…)에 마음을 쏟고 싶어 집니다.

셋째, 삶이 감격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예배가 됩니다.

-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가장 좋은 것을 받았는지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현재 처한 형편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마음에서 나오는 찬송을 하게 되며, 감사의 눈물이, 감격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좋은 것은 나누고 싶습니다. 서로서로 충만해지면 더 풍성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의 기쁨이 있을 때 진정한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자원하여 드리고픈 마음의 열정이 생깁니다.

그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신령한 예배를 향한 꿈이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그 열정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던지는 사랑을 보이셨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시고 감동하시고 계십니다.

넷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순종)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겸손해 집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고귀하고 가치 있게 보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서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가정을 통해 계시하신 천국의 맛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 영광스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   내 삶의 주권을 성령께 맡기면 됩니다. 그 분을 환영하고 영접하면 됩니다. 그 감동하심에 순종하고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그 분의 사랑과 열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열정을 알고 경험한 사람은 그 열정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에 눈멀게 됩니다. 그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참 만족과 유익 주는 것이 없음을 알기에 전 존재를 드려 열정의 사랑을 돌려 드리기를 원하게 됩니다.

-  그런 사람들은 열렬히 기도합니다. 열정적으로 사모합니다. 뜨거움으로 반응합니다. 간절히 기다리며 간구하며 기대합니다. 그 성령의 충만함에 사로 잡히기를… 그 영광 가운데 거하기를… 그것이 참된 교회의 영광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5. 학습 및 적용

 1) ‘성령충만’의 의미를 말해보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떤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해 보세요.

     (엡 5:15-21, 요16:13, 행1:8).

 2)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의 결단을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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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했으며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4:8~12

8.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9.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입니다.

12.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무엇을 합니까?
구원에 대해 설명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합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곳으로 가보지요.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역시 이곳에서도 성령 충만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6:3~4,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일곱 집사들의 자격 조건이 ‘성령 충만‘입니다.

 

사도행전 7:54~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고 그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17~18,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사울 형제, 형제가 오는 도중에 형제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형제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니,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행13:8~11)

8 그런데 이름을 엘루마라고 번역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 마법사가, 그들에게 훼방을 놓아서,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9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은 성령이 충만해서, 마법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10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길을 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여기서도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당당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행11:24)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도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일을 수행 할 수 있었습니다.

(행13:49-52)

49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이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50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읍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

51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경우를 주목하여 보세요. 개인이나 무리나 할 것 없이 성령이 충만하니 무엇을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산헤드린 앞에서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과 바나바, 스데반 등

모든 제자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제일 되고 가장 특징적인 표지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삶으로 예수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성령이 충만하여 기적을 경험한다든지, 방언을 했다든지,

자기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오직 예수만을 이야기합니다.

 

(요16:12-14)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게 하시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성령 충만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로부터 받은 선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입으로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딤전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병이 들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가 더 있음).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라는 목회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말씀을 바르게 전하라고 목회 서신을 보냈습니다.

디모데서와 디도서지요. 거기에서 바르게 가르치라는 ““교훈””이라는 말을 열네 번을 쓰는데

3절의 ““다른 교훈””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헤테로 디다스 칼레오””입니다.

 

* 헬라어 ““헤테로 디다스 칼레오ἑτεροδιδασκαλέωG2085””입니다.

                                   -- 다르게 가르치다,다른 교리를 가르치다.

                      헤테로스ἕτεροςG2087:다른+디다스칼로스διδάσκαλοςG1320;교사,선생에서 유래

 

그 뜻은 false doctrine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교리를 모르고 여러분은 절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이라 하나요? 왜 베뢰아 파를 이단이라 합니까? 왜 문선명씨의 통일교를 이단이라 하나요?

그들도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이단이라 합니까?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교리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아시겠어요?

체험과 경험으로 믿다보면 언젠가 자기가 믿는 게 하나님인지 부처님인지 알라인지 헛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렇게 처음부터 교리 부분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녹취 정리 추가)………

신앙은 지정의로 받아야 합니다

머리로 이해를 해야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에게 축복권 저주권 이런거 없습니다.주어진 몫이 다른 것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공부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안에서 어느 것 하나 중하고 경한게 없습니다.

모두 똑같습니다.

교리를 충실히 공부하고 말씀을 보십시요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아셔야 합니다.

………………………………

(갈1:6-8)

6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8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받고 잘 먹고 잘살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성령이 오셔서 걸린 병 다 낳게 해 주십니다.

예수 믿으면 내게 능력이 임해서 내가 손을 언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됩니다.

성경에 없는 그런 애기들 체험적인 애기들 자기가 경험한 애기들

이러한 것을 복음이라고 전하는 이들은 성경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만약에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한다면

여러분은 저주 받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 나가서 무당종교 퍼트리지 말고 알고 나가자는 말입니다.

전도를 하더라도 알고 하셔야 합니다.

교리를 모르고 엉뚱한 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바른 교훈을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올바른 예수를,

올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자를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대적하여 싸울 때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무엇이라 했나요? 바로 말씀 아닙니까?

 

(엡6:17)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되며 말씀이 궁금하게 됩니다.

그 말씀이 우리안에 충만히 흘러 넘치지 않으면 세상과 싸워 이길 수도 없고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가 오셨는데 이땅에서 아무도 못알아 "R는데 귀신은 알아"R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하늘에서 함께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우리도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돠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성령 충만은 이렇게 올바른 교리의 숙지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전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마라. 종들아상전에게 순종하라. 상전들아 종들에게 공갈치지 마라.'고

성령 충만의 내용을 열거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바로 일상생활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의 삶속에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설명하셨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러면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가 드러나야 되지 않습니까

이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자에게서 나오게 되는 성품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나오고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러한 용서와 사랑과 인내와 자비가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남을 멸시하고

죽이고 있습니까?

이 에베소서의 성령 충만의 내용은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갈5:22-23)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시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을 향해 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라는 줄기에 붙어있는 자들은

당연히 열매가 맺히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경 공부나 설교와 같은 학습이 방법으로 개입되는 것이고

그러한 학습과 훈련 속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성도의 모습을

우리는 성령 충만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12-1.술취함과 방탕,성령충만...

     -에베소서68 “세월을 아껴 우리가 해야 할 일1”본문기록...

 

(엡5:16-21)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아소티아άσωτίαG810-무절제,허랑방탕,unsavedness)

                                                     - 1(부정적 불변사)+소조σώζωG4982-구원하다,완전하게 만들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플레로오πληρόςG4137-가득차게 하다,확증,성취,완성하다)

                                             - 플레도πλήθωG4130-채우다,영향을 주다,완수하다...에서 유래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지혜 있는 자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라는 성경의 권고가 어떤 뜻인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성령 충만 이라는 것은 입에 거품이나 물고 쓰러지거나 전기가 오른 것처럼 몸을 떨거나 병이나 고치고

안수나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 속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실 때, 그 뜻에 열심히 순종해 나가는 우리의 선택과 몸짓을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그 성령 충만한 삶을살아 내기 위해, 우리의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분투해야 함도 아울러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경주 하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기억도 안 나는 나의 배를 위한 분주한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공부한 17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언행을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일까”” 하고

매번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데살로니가 4장 3절 ““거룩””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거룩에 유익이 되는가, 아닌가를 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보시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강조하면서

그 성령의 충만을 술 취함과 대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엡5:18)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왜 성령의 충만과 술 취함과를 대조할까요?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술 취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셔서 감당할 수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롬13:13)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경을 잘 보면 거의 술 취함과 함께 “방탕”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방탕한 것이니”라고 기술이 되어있지요?

이 “방탕”“아소티아άσωτία”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말과 정확하게 동일한 단어입니다.

 

(눅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여기에서 “허랑 방탕”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아소티아άσωτία”입니다.

이 “방탕”이라는 말은 단순히 “문란하고 지저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낭비하다, 허비하다”라는 말입니다.

“아소티아”에서 부정 접두어를 떼면 “절약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방탕”이라는 단어는 “절약하다”의 반대말인 것입니다. 뭡니까?

“낭비하다, 허비하다”입니다.

이렇게 “술 취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술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술 취함은 규모 있고 단정한 삶을 무질서하고 혼돈 된 상태로 헝클어 버립니다.

여러분, 술은 각성제가 아닙니다. 술은 의학적으로 억제제입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알콜이 중추 신경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인간의 중추 신경이라는 것은 자율과 지혜력, 이해력, 판별력, 판단력, 균형을 관장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알콜은 그 중추 신경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왜 용감해 지는지 아세요? 판단력과 판별력,이해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술이 취하면 아무 데서나 강아지처럼 소변을 보거나, 평소에는 겁 많고 얌전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이 옆자리에

있는 사람하고 째려 봤다고 다투고 하는 것입니다.

(중간생략...)

신문의 사건 사고 난에 나오는 수많은 살인 사건, 폭력 사건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에 기인합니까?

거의 술 때문입니다.

이런 게 다 왜 일어난다고요?

술이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판단력과 판별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조정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이 뭡니까? 짐승은 자기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싸고 싶을 때 싸고, 교접하고 싶을 때 누가 보던 말던 교접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해력과 판단력과 판별력을 가지고 절제하고 누르고 인내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은 바로 그 이성을 마비시켜 버림으로 사람을 일순간 짐승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 시간들은 전부 허비되어지는 낭비되어지는 짐승의 시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술을 마시지 않고도 이렇게 술 취한 사람들과 방불하게 여러분의 시간을 허랑 방탕하게 낭비하고

사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술을 마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시간을 엉뚱한 곳에 쓰게 되면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술 취한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그 모든 상실의 시간들을 가리켜 “술 취함”“방탕”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대조되고 있는 성령 충만의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비록 가난해도,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 주어진 환경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는 “술 취하지 말라,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하지 말라”“아소티아”라고 소극적인 절제의 권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라.”라는 권고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은 그 것을 하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하라는 적극적인 권고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중간생략)

술이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판단력과 판별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조정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이 뭡니까?

짐승은 자기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싸고 싶을 때 싸고,

교접하고 싶을 때 누가 보던 말던 교접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해력과 판단력과 판별력을 가지고 절제하고 누르고 인내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은 바로 그 이성을 마비시켜 버림으로 사람을 일순간 짐승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 시간들은 전부 허비되어지는 낭비되어지는 짐승의 시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술을 마시지 않고도 이렇게 술 취한 사람들과 방불하게 여러분의 시간을 허랑 방탕하게 낭비하고

사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술을 마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시간을

엉뚱한 곳에 쓰게 되면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술 취한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그 모든 상실의 시간들을 가리켜 “술 취함”“방탕”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대조되고 있는 성령 충만의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술이 중추신경 억제제라면 성령은 중추신경 각성제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제가 제발 멍하니 살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멍하니 살려면 차라리 죄라도 지으세요.

그러면 나중에 회개라도 하지요. 이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여전히 눈곱도 안 떼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그런 사람들 얼마나 많아요.

정신들을 안 차려서 그래요.

멍하니 게으르게 사는 것은 술 취한 것과 똑같이 위험하고 무서운 해악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시간을 허비하는 삶“아소티아”를 술 취함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간생략)

예를 들어 어떤 녀석이 매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만 하다가 부모님한테 들켰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넌 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만 하고 있어, 당장 헤어져”

그렇게 야단 칠 때 옆에서 역시 똑같이 공부 못하는 동생이 ““난 연애 안 했는데””

그러면 그 아이가 칭찬 받나요? ““차라리 연애나 하지, 넌 연애도 안 하면서 어떻게 공부도 못 하냐?””

그럴 거 아닙니까?

““연애 하지마.””라는 말이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인 것처럼

““술 취하지 마라““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라.””라는 적극 적인 명령을 위한

발판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시간을 허랑 방탕하게 쓰는 대신에 “성령 충만”한 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과

자기 부인의 삶과 섬김의 삶과 그 분의 성품을 내 삶 속에서 구현해 내는

그 성령 충만한 삶을 열심을 내서 사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시간을 아끼고 아껴서 그 삶을 열심히 살아내셔야 합니다. 정말 복음을 안 사람들은 절대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중간생략)

사도행전2장에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시자

사람들이 그 성령 받은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 술 취했나보다”” 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140. “ 세례(밥티조βαπτίζω)와 성령충만(플레로오πληρόω)”

          “헬라어의 현재시제와 과거시제” ....

           - 그런기독교는 없습니다..성령충만(3) ...본문기록

 

성령세례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 사역이

완성됨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을 성령 세례라 하며

그 눈을 뜬 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예수에 대하여 구원과

은혜에 대하여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임을 성경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라는 것은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수동적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중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사모하며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시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아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면서 그 성령 세례를 사모하면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도 어처구니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요구나 명령이 한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비로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니까요.

 

(고전12: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밥티조βαπτίζωG907) 한 몸이 되었고,

                                             밥토βάπτωG911에서 유래:

                                       물에 잠그다,흐르는 물에 완전히 덮다..신약에서 한정된 혹은 특별한

                                      의미로만 사용,즉 문자적으로 (신체의 일부)물에‘적시다’‘(염색처럼)착색하다,잠그다..등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아’는 헬라어 ‘밥티조’‘세례를 받다’라는 단어의 과거시제입니다.

헬라어의 과거 시제는 한순간에 일어나고 그친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세례는 과거에 우리가 거듭 날 때에 한번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후에 성령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것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단번에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성령은 그렇게 하여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몸으로 붙여버리는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엡4:1-6)

1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5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또는 '천지 만물')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이렇게 세례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순간 우리와 예수님을 연합시키시는 성령세례,

그것 한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엡5:18)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플레로오πληρόωG4137;가득차게하다,(문자적으로;그물에)

꽉 채우다,주다,만족하다,수행하다,확증,성취하다,공급하다등..).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현재시제입니다.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현재 진행의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반복적이고 계속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고 또 받고, 받고 또 받는 것이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는 positional한 것이며 ‘성령 충만’은 experiential, 경험적인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경험적인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입니다. 어느 날 보니까 나의 신분이 그렇게 바뀌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고 체험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00. 서원(네데르נךר)과 제물(뛰시아θυσία),성령충만...

- 사사기(22)‘입다의 서원’본문기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제사의 종류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번제와 소제, 속죄제와 속건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펴 볼 화목제입니다.

이 제사들은 각각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소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야기를,

속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이야기를, 화목제는 완료, 승천의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화목제에는 감사제와 서원제, 그리고 낙헌제라고도 하는 자원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화목제의 제물은 다른 제사와는 달리 제사를 드린 자와 제사장,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화목제의 현실을 그림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 출애굽기 24장입니다.

다른제사는 못먹게 되어있습니다.화목제만 먹음..

 

(출24:5-11)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피를 단에 뿌린 모세와 70장로들이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게 바로 화목제라는 제사가 담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화목제는 속죄의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닙니다. 화목제는 죄인들의 속죄가 완료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화목이 성취된 것을 선포하며,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성도들의

천국 혼인잔치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에 감사제와 자원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자원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원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 드릴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거래용으로 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하나인 서원이라는 것은 죽어야 할 나를 위해 흠 없는 제물을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완료된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

다른 말로 자원하여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서원입니다.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측에서 완료시켜 놓으신 어떠한 사건에 대해 감사와 찬송으로

화답을 하는 것이 화목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 특히 서원제의 제물은 첫 새끼로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레27:26)  

26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그렇지요?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물은 단순히 대속의 대가가 아닙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대속의 대가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정하고 더러워서 차마 받을 수 없는 것들 대신에 그 제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드린 자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과 동일시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하고 은혜라 합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해 보자고요.

제물이 하나님에게 바쳐져서 하나님의 철장에 맞아 죽는다는 것은 형벌의 의미보다는 피조물의 육적 자아가

파기되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력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존재일 수 있고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나님께 바쳐져서 육적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조물의 대표로 육신을 입으시고 그 피조물의 구원의 과정을 먼저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금도 그 부활의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영원히 육신을 입으시기로 결정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요.

그러한 구원의 역사적 과정을 성경의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처음 것들은 전부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음 것이 바쳐짐으로 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난 창세전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출13:12-16)

12 너는 무릇 초 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 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 지니라

14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15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 고로 초 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16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

 

신명기에도 똑같은 명령이 나옵니다.

(신15:19)

19 너의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이렇게 이스라엘의 처음 것은 식물이건 가축이건 전부 하나님께 갖다 바쳐야 합니다.

그건 출애굽기 13장의 말씀처럼 첫 새끼가,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자체로는 너무나 더러워서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더러운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장자들로 편입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것들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은 오직 하나님의 장자만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동생들,

즉 성도들이 하나님에게 거룩한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신분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은혜의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첫 새끼가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다른 제물들이 그 첫 새끼 안에서 제물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첫 새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사에서는 꼭 첫 새끼가 아니더라도

제물로 쓰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하게도 화목제의 제물은 절대로 첫 새끼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나 셋째는 괜찮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화목제는 속죄 제물로 오신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완료된 속죄와 그로 말미암아 완성되게 되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즐기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또 제물이 필요한가요?

그리고 그 제물을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왜 그런 번거로운 제사가 또 있어야 하지요?

여러분, 예수라는 맏아들 다음에 줄줄이 살아나는 자들이 있지요? 그들이 교회입니다.

 

(고전15:20~23)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맏아들의 동생들에게 똑같은 제물로서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롬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제사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뛰시아θυσίαG2378-희생,제물..’가 제물이라는 단어입니다.

                                                    뒤오θύωG2380에서 유래-‘달려들다’(거친 숨을 쉬다,불다,연기내다)

                                                    함축적으로 제사드리다,제물을 드리다,살해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의 동생들에게 제물의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맏아들처럼 당신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 앞에 자격 있는 제물이 되라는 권면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우리를 거저

하나님의 제물로 받으셨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됨’이라는

방향성과 지향성을 갖고 살아가게 될 것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육적자아가 부인되고 그 안에 사시는 예수만이 드러나게 되는

자기부인의 과정이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에 의해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즐기는 화목제의 현장에 맏아들이신 예수의 동생으로

입적이 된 ‘나’라는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림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맏아들이신 예수가 가신 길을 좇아 자기를 부인당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져서 다른 이들을 위해 ‘나’를 양식으로 주는 하늘 백성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입니다. ‘나’가 비워져서 상대방의 배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것이 아닌 제물, 즉

구원받은 ‘나’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지고 그들이 나를 먹고 배가 부르게 되는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롬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게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육적 자아가 부인되어져 가는, 역사 속에서의 구원의 현재 시제를 살게 되는

성도이기에 세상 속에서의 고난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밟히고 빼앗기고 비워지고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처음 것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저

하나님의 제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우리를 첫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처음 것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여 살게 되고 결국에는 처음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성도라는 말입니다.

 

(약1:18)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맏아들이 가신 그 자기부인의 길, 십자가의 길을 실제 화하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를 장자들의 총회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장자이신 예수 안에서 거저 구원을 얻은 입양된 장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진짜 장자가 가신 그 길로 좇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화목제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서원은 하나님에

의해 내가 부인당해 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게 내 것을 빼앗기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것으로 보상을 받는 종류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화목제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서원은 하나님에

의해 내가 부인당해 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게 내 것을 빼앗기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것으로 보상을 받는 종류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하나님에게 엉터리 서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볼까요?

사사기 11:29-32,

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그렇지요? 입다는 제사를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원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입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서원을 한 시점이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한 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여 입다가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엉터리 서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꼭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어떤 존재가 대단하게 훌륭한 삶을 보여줄 때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처음 자리를 폭로하시며 그러한 추악한 자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밝히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을 성령 충만의 상태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이 뭡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창세전 언약의 성취에 대한 교훈을 다시 떠오르게 하시고,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가르치시는 역할로 성령이 오신 거잖아요?

따라서 역사 속에서의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서 인생과 역사에게 행하신 일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일에 동원이 되는 피조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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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20-04-19

성령 훼방 죄(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ref : 마태복음 12:22∼32
      마가복음 3:22∼30

훼방(毁謗) - 헐 훼(毁), 헐뜯을 방(謗)
1. 남의 일을 잘못되게 하거나 못하게 함
2. 남을 헐뜯어 비방함

 
βλασφημήσῃ - βλασφημέω(blasphémeó)
Definition : to slander, to speak lightly or profanely of sacred things

Usage : I speak evil against, blaspheme, use abusive or scurrilous language about (God or men).       

정의 : 중상하고, 경건하거나 비속 적으로 신성한 것들을 말하다

사용법 : (신 또는 남성)에 대해 악을 말하고 신성 모독하거나 모욕적 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훼방이란 단어의 뜻은 “헐뜯어 비방함” 또는 “잘못되게 하거나 못하게 함”
그러나 성경에서의 훼방이란 “신성 모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신성 모독 죄” 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부활주일 다음으로 맞이하는 주일을 “성 도마 주일” 또는 “신생아주일” 이라고 합니다. ‘성 도마 주일’ ‘신생아 주일’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손으로 만져본 후에야 믿겠다고 의심했던 제자 도마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최경일 장로의 경우)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경영
십일조가 상당한 금액으로 헌금
교회에서 집사 임명을 하려고 한다.
유아세례 후 입교문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자
집사 임명을 취소

(김경애 권사의 경우)
여전도회 회장으로 봉사할 때 우연한 기회에 유아 세례 후 입교문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령 훼방 죄를 지었다고 교회에서 정죄하므로 결국에는 부산 구포에서 김해로 건너갈 수 있는 낙동강 하류에 있는 다리에서 투신자살.

성령 훼방 죄를 바르게 해석하려면 배경을 관찰해야 합니다.
성령 훼방 죄에 대한 배경은 마가복음 3장 22∼30절과 마태복음 12장 22∼32절에 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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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성령모독 죄 / 성령 훼방 죄란 무엇인가?


답변 : “성령 모독”은 마가복음 3장 22∼30절과 마태복음 12장 22∼3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신 들린 남자를 예수님께 데려왔고, 주님은 눈멀고 말 못하는 그 남자를 치유하면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장면을 본 목격자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구세주인지 궁금했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이 군중 속에 싹트기 시작하는 믿음을 재빠르게 진정시켰습니다. 그들은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마 12:24).

예수께서는 본인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몇 가지 논증을 들어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반박하십니다(마 12:25∼29). 그리고 성령 모독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절).


신성 모독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거역하는 불경함”으로 정의됩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고의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비하하는 그러한 죄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성 모독은 어떠한 악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거나 또는 우리가 그분에게 돌려야 할 어떠한 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2장 31절의 특별한 신성 모독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불립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반박할 수 없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오히려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마 12:24).

마가복음 3장 30절을 보면, 성령을 모독하는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행하였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성령 훼방 죄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성령이 아니라 악령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별한 유형의 신성 모독은 오늘날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역사 가운데 유일한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선지자가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는 성령이 계셨으며, 그들의 바로 앞에 친히 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셨고, 그리고 그들은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역사상 이 때만큼 이렇게 많은 신성한 빛이 사람에게 비추어진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역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알고 또한 그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성령의 일을 마귀의 일로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맹목적인 완고함에 대해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그들의 신성 모독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최종적으로 거부한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정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멸망으로 향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바리새인들의 성령 모독 죄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죄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 모독죄는 지금도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마가복음 3장 29절에 쓰여 진 것 같이, 그들은 “영원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공개적인 거부는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는) 그 다음 장에서 즉각적인 결과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씨 뿌리는 비유. 마 13:3, 막 4:2).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 방법이 바뀐 것 때문에 당황하였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1, 13).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그를 거부한 후부터 비유와 은유를 들어 진리를 가리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 모독죄는 어떤 이들이 시도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반복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안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아무도 개인적으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목격하거나 그 능력을 성령이 아닌 사탄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계속되는 불신의 상태입니다. 성령은 현재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 책망에 반항하고 의도적으로 회개치 않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촉구하시는 성령을 거절하다가 불신 가운데 죽은 자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죄 사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리고 선택도 분명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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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훼방 죄의 배경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예수님께서 “성령 훼방 죄”에 대한 두려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보게 하고 말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 이 광경을 지켜본 바리새인들이 즉각적으로 하는 말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아니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마귀와 귀신의 역사로 일축해 버리며 불경하게 신성모독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성령 훼방 죄란 성령의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고, 심지어 인자(예수님)를 거역하더라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으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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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몇 가지 구절들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16, 사망에 이르는 죄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히브리서 6:4∼6, 타락한 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세 구절을 통해 볼 때 이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이 모두 “믿는 자들” 이라는 점입니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욕하고 성령을 훼방한다면, 몰라서 그런 것이니 회개의 기회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자신을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훼방 죄는 결코 어느 날 갑자기 믿음 생활 잘 하던 사람이 돌변하여 성령을 등지고 욕하며 훼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는 자가 이 지경까지 갈 수 있는지 단계적으로 말씀을 통해 고찰해 봅니다.

우리 몸의 여러 장기들 중에서 노폐물을 걸러내고 하수처리 역할을 하는 정화조와 같은 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입니다. 간은 소위 “침묵의 장기”라고도 일컬으며, 우리 몸에 가장 큰 장기입니다.

묵묵히 듬직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며 재생능력도 탁월하여 정상크기의 1/6만 남아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이 망가지고 제 기능을 잃어버리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독소와 노폐물들이 걸러지지 않아 바로 생명과 직결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영혼 속의 성령의 역할이 바로 이 간 기능과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단계

1단계 :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에베소서 4:30) - 지방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우리 주변에는 늘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의 문이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에 쥐어져 있고, 터치 한 번에 걷잡을 수 없는 죄악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마음에 모신 자들에게도 이러한 죄의 유혹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때에 마음이 미혹되어 흔들리거나 떠다니는 죄의 유혹을 마음으로 붙잡는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잡은 거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거 잡으면 죽는다고 이러한 성령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건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나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2단계 :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데살로니가전서 5:19) - 간염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성령을 소멸하는 단계는 “성령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보고 기도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 시시때때로 주를 의지하여 마음을 토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이끄시는 그 음성 또는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성령의 탄식소리를 무시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성령께서 내미시는 손길을 잡지 않고 뿌리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우리의 유익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성령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3단계 : 성령을 거스림(사도행전 7:51) - 간경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You stiff-necked people, with uncircumcised hearts and ears! You are just like your fathers: You always resist the Holy Spirit! 

이제 성령을 거스리는 심각한 단계로 접어듭니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의지를 동원하여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반복하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져갑니다. 육신의 원하는 대로 반복적으로 거스려 행하다보면 처음엔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거스리지만 이제는 탐욕과 죄에 연단된 담력을 가지고 담대히 죄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4단계 : 성령을 훼방함(마가복음 3:29) - 간암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간암 말기 상태가 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배에 물이 가득차서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배가 부풀어 오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종교적 아성과 기득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교만함의 극치를 달리며 성령을 적극 훼방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의 주목을 받으며 인기를 끌지 못하도록 오로지 자신들의 권위를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사탄 마귀의 역사라고 치부해 버리면서 율법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사악한 마귀의 본성을 따라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손가락질 합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선언은 “독사의 자식, 마귀의 자식, 회칠한 무덤, 지옥자식”이었습니다.

로마서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
성령을 소멸하는 죄
성령을 거역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
이러한 죄가 단계적으로 거듭 반복되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고 성령님과 하나 되어 연합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곧 “옛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소멸하고, 거역하며, 훼방하던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이 지나가고 새 것은 곧 “새 사람, 성령의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내 육체에 선포하며 내가 죽고 그리스도(성령)로 사는 것입니다. 이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날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죄와 사망권세를 이길 방도가 전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마귀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이 복음의 핵심이 수면위로 드러나는 것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듯이 이 마지막 때에 성령으로 충만한 이기는 자들, 다시 오실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주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성령을 등지고 사는 영적인 간질환 환자들이 회복되어져 진정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주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성령을 무시하고 내가 주인 되어 마음에 원하는 자리를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우리며 순종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제 자신이 이전에 얼마나 심각한 영적 상태였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심을 감사합니다. 영적인 간질환 환자로서 간암까지는 아니더라도 간경변까지는 갔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제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연합된 삶을 살아감으로 새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옛사람은 이제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새로 지어주신 새사람이 접니다. 옛사람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사람(성령의 본질)이 되었도다! 이 참 복음을 날마다 외칩니다. 지금껏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사탄마귀의 정죄와 참소를 갑절로 되갚아 주기 위해 이제는 귀가 따갑도록(갈 2:20)의 참 복음을 내 영혼에게 선포하며 들려줄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내주하심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확실히 이 삶을 붙들고 날마다 이기는 자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이기는 자들을 세우고 또 세우겠습니다.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이 고귀한 사명에 제 남은 생을 걸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령 훼방 죄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을 초래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고 있다. 그것을 소위 "성령훼방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있느니라"(막 3:28-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

    

혹간 몇 명의 청년들이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상담을 해온 적이 자주 있다. 자신은 전에 성령을 모욕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 "성령훼방죄"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과 번민을 하게 되었고, 자주 필자에게 상담을 해왔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아야할 것 같았고, 전에도 성령휘방죄에 대해서 올렸던 글이 있는데 더욱 정리하고 보완하여 다시 올리게 되었다 

 

필자는 그 청년들에게 아래와 같이 답변을 하였다

   

“이미 자신이 성령훼방죄가 아닐까 걱정하는 분이라면 그 자체로 벌써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훼방죄는 성령의 뜻을 알면서도 고의나 악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훼방죄에 해당되는 죄는 회개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근심을 한다거나 양심에 찔림을 받아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거나, 고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즉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훼방"이란 말은 헬라어 "블라스습헤미아"로써 성경에서는 주로 "참람, 훼방"으로 번역하였다. 그 원래의 의미는 중상(특히 하나님에 대항하는), 참람(신적위엄을 손상시키는)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딤전1장 13절에서 자신을 "훼방자"였다고 말하는데, 그 단어는 "블라습헤모스"라는 형용사로서 같은 어원을 갖는다.  만일 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사도바울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블리습헤모스)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3)

      

바울은 자신이 훼방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지금 자신은 긍휼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여 잡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잡혀간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즉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딤전 1:13의 기록처럼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성령훼방죄"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잡아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블라스헵메오)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행 26:11)

      

윗 본문은 바울이 다메섹을 가기 이전, 즉 예수를 만나기 직전의 기록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형벌하였으며 잡아 가두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그 "모독하다"는 단어는 "블라스헵메오"로서 앞에서 언급한 단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동사이다.

즉 결론적으로, 성령훼방죄는 그리스도인이면서 고의와 악의로 성령을 참람하게 모욕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한때 이단이나 사이비집단에 속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철저하게 뉘우치고 회개한 사람은 더 이상 성령훼방죄에 속하지 않는다. 진실로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죄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바울도 성령훼방과 모독죄를 범하던 때에는 유대교에 속하여 있었다.

     

즉 성령훼방죄는 단지 진리를 의심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자체를 말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회개를 거절하고, 양심과 성령의 조명을 고의와 악의로 거절하며 모독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러한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하며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기도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성령훼방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기독교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현재의 상태인 믿음으로 구원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성령을 훼방했던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가 기독교인이었다가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했다면 그는 과연 구원을 받느냐?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아다.

성경에 의하면, 자신이 현재에 믿음을 갖고 있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도 성령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하는 자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6장4-6절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지만, 사도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과연 무엇일까?

요한일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거짓그리스도,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 것을 사도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일 3:10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타남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고, 4장 1-6절에서는 배교, 적그리스도, 거짓 교사에 대한 미혹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배교에 대한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과거에 믿음을 갖고 기독교에 몸을 담았다가 이단 혹은 사이비집단에 미혹된 사람은 배교이고 적그리스도, 거짓교사에 미혹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회개하여 주님에게 돌아온 사람은 성령훼방죄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과거에 교회를 다녔지만, 그 당시의 신앙이 확실한 성령의 조명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가 이단에 미혹된 것은 "알지 못하고 한 죄"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단교회에 빠져서 예수를 모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고의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면(예를 들어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였거나, 제대로 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올바른 믿음을 갖고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성경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극단적인 예를 들면 돈이나 여자등 다른 목적을 위하여) 고의적인 목적을 갖고 이단으로 갔다면, 그리고 다시 회개하지 않았다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사실 성령훼방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벧전 4:3)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행락과 심지어 우상숭배를 한 것도 과거의 행한 것을 돌이킨다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현재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신자(信者)와 거듭난 자는 다르다.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그 구원이 끝까지 보증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信者)에게 있어서 믿음이 떨어지는 가능성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을지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 위에 굳게 서야만 한다.

   

히브리서 6장4-6절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간주되는데, 그 난해성에 대한 중요한 요점은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 배교를 함으로서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으로 인 치심에 의하여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실수로 이단집단에 미혹되었다가 다시 회개하여 돌아왔을 경우에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은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수를 두 번 못 박을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먼저 두 번째의 답변은 어렵지 않다.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를 한다는 자체가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뜻이 되어진다. 

히브리서10:26-29에는 유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1) 하나님 아들을 밟고,
(2)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3)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경우로서, 고의적인 훼방죄를 말한다. 
즉 회개를 거부하며 고의적으로 욕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히브리서 본문이 말하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1) 성령체험을 한 그리스도인이 배교를 한 경우인가?

(2) 진실로 성령체험을 하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가?

  

어찌 되었든 히브리서 본문은 어떤 행위로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보편적인 경우가 아닌 매우 드문 특별한 경우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 자들이라면, 왜 성경은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애매한 표현을 하였을까? 이러한 단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는 완전히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에게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침을 얻었다”는 단어에 대해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세례를 받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던 적도 있었는데, 현재도 Barclay, F.F.Bluce 같은 학자들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헬라어 “포티스텐타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서 10:32에서 사용되는데, 기독교의 입교 혹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다고 해석이 되어지므로 정확한 해석이 어렵다.

  

어쨌든 “한번 비침을 얻었다”는 표현에서 “한번”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하팍스”인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우가 아니라 “한번(once)”이라는 의미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한번 받아들였다거나, 예수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라는 조명을 한번 비침으로 국한시킨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맛보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규오마이”인데, 이 단어는 “먹다”(to eat)는 뜻도 있지만, “맛보다”(to taste)라는 뜻도 갖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상징적으로 선이나 악을 경험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즉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먹지는 않았지만 맛만 보는 그러한 개념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 “웨인그루뎀”은 그의 조직신학 중권에서 이러한 성경적인 예를 들고 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마태복음 27:34)

  

예수님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맛만 보고 마시지 않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규오마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실제로 먹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맛만을 보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맛보았다”라는 단어는 “경험을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로 해석이 된다면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라는 구절은 해석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참예한 바 되고”라는 단어는 어떠한가? 헬라어 “메토코스”는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히 3:14), 아주 밀접한 관계가 아닌 단순한 경우를 의미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참여하다(partake)는 의미는 “나누다, 분담하다, 함께 하다”는 의미이지만, “동참자, 동료”라는 단순적인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웨인그루뎀”은 눅 5:7의 예를 들고 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7)

  

다른 배에 있는 “동무”가 “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개념은 다른 고깃배를 타는 어부 동료를 뜻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배를 타는 밀접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단순적인 의미의 동반 혹은 참여를 뜻한다는 것이다.

웨인그루뎀은 그 증거로서 엡 5:7-8을 예로 든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엡 5:7-8)

  

이 단어는 메토코스라는 단어에 syn(with)이 합성된 “쉼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에베소서의 교인들이 불신자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더욱이 불신자가 되라는 뜻도 아니며, 단지 불신자에게 악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단순한 교류나 타협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메토코스”라는 단어는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동반의 개념을 갖는 참여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참예한 바 된다는 의미는 그들도 성령체험을 깊이 누렸다는 뜻보다는 성령체험을 하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혹은 “보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교회의 일에 함께 동참하였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예한 바 되고”라는 의미는 그 배교자가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과 함께 그 현장을 체험하고 누리고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성령의 체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결론이 되어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구원의 경계선이 있다면, 그는 그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아니며, 그 선을 밟고 있는 사람 또는 구원의 선에 막 미치지 못한 사람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사도로서 함께 참여하였던 가롯 유다와 같은 경우를 뜻한다고 보여진다. 그는 예수와 함께 생활을 하며 기적과 표적을 보고, 성령의 역사와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였지만, 성경에는 가롯 유다가 온전히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났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즉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고 해석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며 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령체험에 대한 시점의 다양한 해석문제일 뿐이다. 

즉 온전하게 구원을 받기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성령을 보내주신 사람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이러한 애매한 단어들의 선택은 그가 확실하고 완전하게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성령으로 거듭난 온전한 그리스도인에게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반면에 불신자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새롭게 할 수 없고,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적용시킬 수도 없음에 우리는 동의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 밖에 있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뿌리와 연결되지 않는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며 말라 죽게 되므로 결국 꺾임을 당한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딤전 5:12)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2:18)


분명히 성경은 믿음을 버리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 간혹 미혹을 당하거나 믿음이 무너져서 이단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과거에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을 버리고 적그리스도와 거짓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고의적으로 배교를 하는 자가 곧 성령 훼방 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0-22)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믿음을 잃고 배교함으로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 다만 위 베드로후서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라는 구절과 “의의 도를 안 후에”라는 구절의 의미가 어느 정도의 기독교인에게 해당되는가는 의문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며, 그 성령께서 구원을 보증하고 인도하는 사람의 경우는 구원의 취소가 있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7-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결론적으로 성령 훼방 죄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싶다.

  

1. 성령의 보증과 인도를 받는 확실히 구원받은 성도의 죄라고 말할 수 없다

2. 믿지 않을 때의 과거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한 죄가 아니다

3. 고의적인 배교를 뜻한다.

4.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이다

5.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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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염 → 간경화 → 간암

간질환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하다. 따라서 별 관심 없이 지내다가 날벼락을 맞는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 질환은 알고 나면 예방과 관리가 쉽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국민병이자 중년 남성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간질환에 대하여 알아본다.

1. 간질환 현주소

우리나라는 만성 바이러스성 간염, 간경변, 간암과 같은 만성 간질환이 많아 전 국민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이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도 막대하다. 한국인의 만성 간질환 중 B형 간염 감염자의 비율은 60~70%로 3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C형 간염 감염자는 10%인 20만 명, 알코올성 간질환이 16%, 자가 면역성 간염이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만성 간질환의 주범인 B형 간염 바이러스의 경우 국가적인 예방 접종으로 감염율이 저하되고는 있으나 아직도 국민의 5~6%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특히, 한국인의 간암발생률이 세계 1위라는 부끄러운 통계도 나와 있을 만큼 연간 10만 명당 28명의 남성과 8명의 여성에서 간암이 발병되며, 40~65세에 해당하는 중장년기에는 5배나 많은 10만 명당 75명의 남성과 16명의 여성에서 간암이 발생하고 있다.

2. 간염의 중요성

먼저 간염이 중요한 이유는, 급성 간염에서 시작하여 만성 간염, 간경화, 그리고 간암으로 전이가 잘 되기 때문이다. 또한 복수, 부종, 신부전, 식도 정맥류, 울혈성 위장 질환, 비장 비대, 간성 혼수, 간암 등의 무서운 합병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간염에 대한 진단과 치료는 간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원인 질환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다. 간염은 바이러스, 약물과 알코올 등의 독성물질, 선천성 대사장애 등 여러 원인이 있으나, 크게 알코올성 간염과 바이러스성 간염(A형, B형, C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알코올성 간 질환은 술의 종류와 무관하고, 총 알코올 섭취량과 섭취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하루 음주량은 80g 이하가 안전하다. 즉, 맥주 2,000cc, 막걸리 1,000cc, 소주 한 병, 위스키 200cc(5잔) 정도이다. 그러나 매일 마시는 것은 피해야 하고, 음주 후에는 최소 2~3일은 금주해야 한다.

증상은 심한 급성 바이러스성 간염의 증상과 비슷하다. 즉 식욕이 없고 피로감, 구토, 설사, 우상복부(오른쪽 윗배) 통증, 간혹 미열이 있고, 심한 황달이 나타나기도 한다. 알코올성 간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금주를 지키고 정맥주사나 경구투여로 단백질을 투여하며 비타민을 보충해 주어야 하고 그밖에 필요한 약물을 투여한다.

바이러스 간염을 일으키는 간염바이러스는 A, B, C, D, E, G 등 6가지가 현재 알려져 있다. 이 중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만성화되는 B형과 C형이다.

A형 간염은 최근 우리나라 일부지역에서 10~30대의 젊은 연령층에서 골고루 급성 간염으로 발생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A형 간염은 주로 환자의 배설물에 오염된 식수와 음식물을 통하여 전염되며, 급성 간염 발병 2주전과 발병 후, 1주 사이가 가장 전염력이 강하다. 따라서 이 기간에 철저한 개인 위생관리가 요구된다. 대부분이 2달 후에는 완치되며, 만성 간염이나 간경화증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국민병으로 불리는 B형 간염 바이러스는 혈액 및 여러 가지 체액(정액, 질 분비불, 모유, 눈물, 침 혹은 상처의 진물 등)을 통하여 전염될 수 있다. 악수, 가벼운 입맞춤, 보유자가 요리한 음식, 감염자와의 대화, 재채기 혹은 기침 등 일상적인 접촉만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급성 B형 간염은 환자 중 약 10% 이하 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가지만, 아기 때 감염되면 약 90% 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산모가 B형 간염 백신을 주사해야 한다. 그리고 B형 간염 표면항체가 없는 아이는 사회적 활동이 시작되는 학동기 전에는 B형 간염 백신을 접종하여 면역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C형 간염은 1989년 처음 발견된 C형 간염 바이러스가 병을 일으키며, 급성 간염의 약 80%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간다. 진단은 B형 간염과 같이 혈액에서 바이러스와 항체 검사를 한다. 주로 수혈을 통하여 감염되어 왔으나, 요즘은 수혈용 피를 미리 검사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과거에 수혈을 받은 경력이나 침, 문신, 피어싱, 마약 주사제 등을 통하여 전염될 수 있으므로 자신이 이러한 과거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이 좋다. 예방 접종 백신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B형 만성 간염 다음으로 환자 수가 많으며, 간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3. 만성 간염→간경화증→간암

간염은 간염 바이러스가 번식하는 간세포를 내 몸의 파수꾼인 면역세포가 공격함으로써 일어나는 하나의 전쟁으로 비유할 수 있다. 전쟁터인 간장에는 심한 흉터가 남는데, 이 흉터는 간 전체에 남기 때문에 간이 단단하게 굳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간경화증이라고 말한다.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상인에 비해 약 100배 정도 간암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흡연이 폐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3배 전후라는 사실을 비교해 볼 때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간염 예방접종의 효과로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보균율은 다행히 감소추세에 있다. B형 만성간염의 진단은 혈액에서 간기능 검사나 간염 바이러스를 하고, 초음파 촬영을 통하여 간의 영상을 검사하여 진단을 내리게 된다.

C형 만성 간염에서도 간경화증이 서서히 진행된다. 20-30년이 지나서야 C형 만성간염환자의 약 30% 이상에서 간경변증이 발생한다. 앞으로는 예방접종으로 인해 B형 간염 환자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C형 간염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되어 있지 않으므로 간경화증으로 인한 간암 발생률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B형 간염 바이러스로 인한 간암은 ▶B형 만성 간염으로 인한 간경변증 환자 에서 가장 잘 생기며 ▶B형 만성 간염 환자 ▶드물지만 B형 간염 바이러스 건강 보균자에서도 생긴다. 우리나라는 간암의 발생에서 B형간염 바이러스가 연관된 경우가 약 70%, C형간염 바이러스와의 연관이 약 10-20% 정도이다. 만성 간염이 20년 내에 48%에서 간경화로 되고, 35%에서 간암으로 될 수 있다. B형 간염환자에서 간암 발생률이 서구에 비해 높은데, 이는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수직 감염되어 B형 바이러스 보유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즉 오랜 기간의 간세포의 파괴와 재생, 유전자 변이 등이 간암 발생을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이런 환자들은 정기적인 검사로 간암을 조기 발견(간암의 크기가 3cm 이하일 때)해야 한다.

따라서 간암의 예방은 곧 이러한 바이러스의 감염을 예방하는 것이다. B형과 C형 간염 환자들을 비롯한 만성 간질환자는 전문의와 상의하여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간암을 조기 발견해야 한다. 간암을 조기에 발견한다는 것은 간암의 크기가 3cm 이하일 때를 말한다. 간암의 조기발견을 위해서는 혈액검사 뿐 아니라 간초음파검사, 필요하면 CT검사까지 해보아야 한다.

※ 간염 환자들이 지켜야 할 10대 건강수칙
1. 건강보조식품, 한약, 생약을 포함한 모든 약물은 의사와 상의 후 복용한다.
2. 술은 하루 80g이하로 마시되, 음주 후는 최소한 2-3일은 금주한다.
3. 음주 시에는 저지방, 고단백 안주와 함께 먹는다.
4. 여성들은 남성 보다 알코올성 간 질환이 잘 오므로 절주해야 한다.
5. 간에 좋은 것을 찾기보다는 해로운 것을 피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6. 저지방, 고단백 식사를 고집하기보다는 골고루 섭취한다.
7. 무조건 휴식보다 일상적인 신체활동은 유지한다.
8. 면도기, 칫솔, 손톱깍기 등 위생용구는 따로 쓴다.
9. 간 질환 환자들은 최소 3개월에 한번 감염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바이러스성 간질환 환자 가족들도 혈액검사를 받는다.
10. 한 명의 주치의를 정해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는다.

간은 침묵의 장기이다. 술이나 스트레스로 간을 혹사해도 참을 수 있는 한 묵묵히 견뎌낸다. 그러다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나빠져 그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잘 회복되지 않는다. 간암 또한 초기에는 증상이 별로 없어 몸이 피곤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며, 헛배가 부르고 복부 오른쪽 윗 부분에 불쾌감이 느껴지는 등 막연한 증상이 대부분이다. 증상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아 본인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간암을 예방 또는 조기 발견하기 위해선 정기적으로 혈액검사와 초음파검사 등을 받아야 한다. 또한 알콜과 무분별한 약물 복용은 간경변증과 간암으로의 진행을 빠르게 하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간암으로 판정 받으면 6개월을 못 넘긴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검사방법의 발달로 조기 발견율이 높아졌고 첨단치료법들이 개발돼 "간암도 고칠 수 있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간암의 조기 발견만큼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절제된 생활과 투병 의지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건양대병원 소화기내과 강영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