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테오와 에로타오



아이테오와 에로타오

♦ 5월 22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6: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구하라(24절)
♦ 성구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헬라어에서 “구하다”라는 동사가 두 가지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아이테오(αἰτέω, aiteó)
둘째는 에로타오(ἐρωτάω, erótaó)
“아이테오”는 낮은 위치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하가 왕에게, 종이 주인에게, 사람이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본문에 사용된 단어는 ᾐτήσατε you have asked / αἰτεῖτε ask)

“에로타오”는 특별한 위치 즉 동등한 자리에서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아이테오”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αἰτεῖτε. aiteite).
기도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여 창조주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떠나 방탕한 자리에서 방황할 때 어머니 “모니카”는 항상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아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싶었지만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부탁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을 보여 주십시오.

나도 믿고는 싶지만, 이해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 진절머리 나는 삶에서 당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위로 걷고 있었을 때 한 소녀가 모래구덩이를 파놓고 하얀 조개로 바닷물을 떠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소녀에게 “얘야, 거기서 혼자 뭘 하고 있니?”
“예, 아저씨, 바닷물을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고 있는 거예요.”

“바닷물을? 그래 그 바닷물을 얼마나 퍼 담으려고?”

“저 바닷물을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을 거예요.”'

“얘야, 바다가 안 보이니? 바다가 얼마나 넓고, 바닷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작은 조개로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다 퍼 담을 수 있겠니?”

“그렇지만, 계속 퍼 담다 보면 언젠가는 바닷물이 다 마를 것 아니예요?”

“얘야, 그렇지 않단다. 저 큰 바다를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담기란 불가능하단다. 네가 종일 퍼 담았어도 바닷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잖니?”'

“그렇지만 아침부터 계속 물을 떠서 담았으니까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 아니예요?”

“아니란다. 네가 퍼 담는 바닷물보다 강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오는 물이 훨씬 더 많은 걸. 또 네가 모래구덩이에 바닷물을 떠 담아도 바닷물은 모래 속으로 스며들고 말지 않니? 해가 저무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모님이 걱정하신단다.”


그 때 그 소녀가 “어거스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바다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를 조개껍데기보다 작은 아저씨의 생각으로 모래 구덩이만한 아저씨의 머리속에 담는 일이 훨씬 더 어렵지 않을까요? 아저씨의 인생이 저물고 있어요. 아저씨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는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예사롭지 않은 꿈을 통해 자기의 보잘것없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기도의 첫 단계는 낮은 위치에서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이 될 때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동일한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찬양 /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https://www.youtube.com/watch?v=Vk1oouyZkF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문제 제기 : 요한복음 17장은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잘 보면 예수님의 신성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문장들이 보입니다.

9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비옵나니 - ἐρωτῶ, am praying.
* 내가 비옵는 것 - ἐρωτῶ, do I pray,

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내가 비옵는 것 - ἐρωτῶ, I do ask 

20절,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 내가 비옵는 것 - ἐρωτῶ, do I ask  

“빌다(ask)”라는 의미는 “손아래 사람이 손윗사람에게 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단어가 성부 하나님께 구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절을 놓칠 수 없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이슬람교도들,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도들은 “예수는 하나님보다는 낮은 영적 존재” 라고 반박합니다.

“예수는 인간일 뿐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이 구절들을 근거로 제기합니다. 이러한 논증을 접한 기독교인들은 “그러게 말이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왜 성부께 비셨지?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성부 하나님께 비실 수 없잖아? 에이 그냥 믿자!”는 식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뒤로 물러나기 전에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여러 번 사용된 “빌다”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 단어가 우리가 사용하는 “빌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예수는 낮은 영적 존재”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빌다”는 단어를 헬라어 성경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였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다”라는 헬라어 단어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아이테오(αἰτέω)”와 둘째는 “에로타오(ἐρωτάω)” 라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두 단어를 “빌다”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두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테오”라는 동사는 “빌다”의 개념으로 “손아래 사람이 손위 사람에게 구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구하다” “종이 주인에게 구하다”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구하다” “힘이 없는 자가 힘이 있는 자에게 빌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에로타오”는 “동등한 자격을 지닌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요구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 단어는 “한 왕이 다른 왕에게 요구하다” “이 집 주인이 저 집 주인에게 요구하다” “한 랍비가 다른 랍비에게 요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로타오”에는 “빌다”"의 개념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단어의 개념을 이해한 후에 요한복음 17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9, 15, 20에는 예수님께서 성부께 비는 모습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빌다”로 번역된 헬라어가 “에로타오” 입니다. 손아래 사람이 손위 사람에게 구걸하는 ‘아이테오’가 아니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하는 ‘에로타오’를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 하나님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에로타오와 아이타오의 차이를 구별하여 사용했습니다. 몇 개의 중요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 αἰτήσεσθε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 ἐρωτήσω

“구하다”는 단어가 두 번 나타납니다.
한 번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였고,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시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같은 단어가 두 개의 다른 상황에 쓰인 것이지요.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두 단어가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ἐν ἐκείνῃ τῇ ἡμέρᾳ ἐν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αἰτήσεσθε, καὶ οὐ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ἐγὼ ἐρωτήσω τὸν πατέρα περὶ ὑμῶν·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빌 것이요(아이테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게 요구하겠다(에로타오).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은 “아이테오”로 쓰였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모습은 “에로타오”로 쓰였습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은 창조자와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아이테오”를 사용하였으며,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와 동등하고 대등하신 하나님이신지라 “에로타오”를 상용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κἀγὼ ἐρωτήσω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ἄλλον παράκλητον δώσει ὑμῖν, ἵνα μεθʼ ὑμῶν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ᾖ.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에로타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 구절에 있는 “구하다”도 “에로타오”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계신지라 당당히 요구하신 것입니다.

특히 9절의 문장구조를 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더 확연히 들어납니다. 9절은 헬라어의 에고(ἐγὼ)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는 1인칭 주격 대명사로써 “내가” 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는 주격 대명사를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사에 인칭 대명사가 이미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동사로만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격 대명사가 쓰이는 경우는 주어를 강조할 때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알고 9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일인칭 동사인 “에로타오” 앞에 일인칭 주격 대명사 “에고”를 사용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내가 당신과 동일한 위치에서 요구합니다.” 라는 사실을 계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아이테오”와 “에로타오”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예수님과 인간의 차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7장에 “빌다”로 잘못 번역된 구절을 갖고 예수님의 신성을 강등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하고 동등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에로타오”의 자세에서 요구할 수 없고 오직 “아이테오”의 입장에서 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에로타오”로 표현하지 않고 “아이테오”로만 표현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계신 하나님이신지라 그 분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아이테오”로 표현하지 않고 “에로타오”로만 표현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했던 “워렌 위어스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9, 15, 20절에서 “기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쓰신 단어 “비옵나니”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기도하다”라는 단어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께서 쓰신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요구” 라는 뜻이다.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께 이 단어를 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단어를 수 없이 사용하셨다. 왜인지 아는가? 그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손아래 사람이 손위 사람에게 구하는 것처럼 빌지 않으셨습니다.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구하는 것처럼 빌지도 않으셨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구하는 것처럼 빌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같은 하나님으로써 대등하고 동등하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과 18장의 성령 간구

시간이 되면 역사적 성경 해석론과 랍비들의 유대적 성경 해석 방법과 더불어 추천 도서를 몇 권 올리겠습니다. 아쉬운 것은 유대적 해석 연구서는 한글 번역 서적이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단지 몇 권의 유대 배경사와  성경 해석서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령의 임재”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또한 현실에서, 성령의 온전한 의지로 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찬송가에도 “불 길 같은 주 성령 간구하는 우리에게 불로 불로 임하소서” 하고 부흥회 기간 동안 목 높여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에서, 신약에서 성령은 그 분의 계시에 따라 그 분의 의지로 임재 하셨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교회에서 성령의 간구에 대한 말씀으로 누가복음 18:1∼8에서 “사악한 재판관에 의한 억울한 과부의 간청” 그리고 같은 누가복음 11:5∼13에서 벗이 떡 세 덩이를 밤에 와서 간구하는 것이고 이 말씀 마지막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고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부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이 말씀을 유대인에게 하실 때는 (예수님의 청중은 유대인)청중은 그들은 유대 풍습에 익숙하여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당시 자신들의 문화 습관에서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 11장과 18장의 도입 부분에서 공통적인 도입의 말씀이 있습니다.

11장은 “밤중에 친구의 방문으로 친구를 대접하기 위한 떡 덩이 세 개였고” 18장은 그릇된 재판장의 재판 결과였습니다.

11장의 말씀은 유대인들은 친구의 (나그네)방문의 경우 구약의 말씀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이 전통은 매우 중요 했습니다.

바울에게 예루살렘 교회는 이 전통을 계속 지킬 것을 (할례나 음식에 대한 정결 의식을 행하지 못하여도)요구하였고 바울도 이는 자신도 행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디다케란 초기 문서와 초대 교부들의 많은 글에 이 전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18장의 불의한 재판관의 재판에 대한 하소연은 특히 구약의 선지서와 율법에서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장로들과 (당시 재판관) 제사장들이 자신 등의 이익만을 위해 거짓 증인을 세우고 잘못된 판결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강력하게 경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과부는 생존의 문제에 놓여 있는 자로 (지금의 과부 개념과 달리) 더 이상 어디에 의존할 수 없는 자를 대변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두 말씀의 사건 배경은 단순히 “나의 바람”을 “요구”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의 본문에 대한 실제 의미는 말씀에서 가르치는 올바른 행위를 함에 있어서 악한 세력이나 환경의 제약으로 그 일을 행하지 못할 때 (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 간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의 기도문에서와 같이 주의 일이기에 주께서 직접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주께서 명하신 일을 할 때 어려운 장애나 사악한 영의 공격에 물러나지 말고 아버지께 간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부분을 가지고 성령의 간구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관찰하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구하다“란 이 부분의 원어 헬라어는 아이테오”aiteo”란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한국어에도 상황에 따라 의미가 비슷하나 다르게 사용되는 단어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도 같은 헬라어를 상황에 맞게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대 부분의 많은 경우에 이 헬라어를 모르고 영어나 한글로 번역된 글을 보고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왜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 잘 알았을 것입니다.

이 아이테오란 단어를 조금 살펴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긴구란 의미와 많이 다름을 알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간청하다란 헬라어는

이 밖에 에로타오란 단어가 있는데 이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령을 주옵소서 할 때 생각하는 경우에 이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흥미있는 헬라 문자로 적혀 있는 고문서중에 (성경이 아닌 당시의 문서)많은 기도문에서

신에 대한 간구는 주로 이”에로타우“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때 (우리의 어려움을 벗어나게 )는 에로타우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누가 복음 11장 13절에서는 특별하게 “에로타우“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이테오“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아이테오“는 일반적으로 가족이나 동등의 개념에서 ” 주기로 약속된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성탄절 선물을 줄 것을 미리 약속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성탄절이 다가 오면서 아버지가 약속한 선물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바라는 이 마음이 바로 “아이테오“입니다.

이 누가 복음 11장에서도 예수께서 “받는 자와 주는 자”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으로 정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간구보다 “그 분의 자식”에게 약속된 것이고 단지 아버지 때에 아버지 방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성령이 임한 구약에서도, 신약의 사도행전, 예수님의 말씀, 바울이나 베드로등 사도들의 글에서도 “인간의 노력이나 간구로 성령을 받는 귀절“은 없습니다.

성령은 약속된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고 성령의 의지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작금의 부흥 운동의 문제는 미국식 선교 방법의 문제였습니다.

이안 머레이가 쓴 “부흥과 부흥주의(Revival &Revivalism)”란 책은 이 문제에 대해 잘 분석합니다.(이 책을 권합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것으로 압니다.)

이란 머레이는 부흥 운동가 피니의 인위적 부흥(피니는 하나님의 간섭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 부흥의 기저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을 비판하면서 이로 인한 빌리 그레함의 대중성 인위적 집회에 대한 성령의 역사에 문제 제기를 합니다.

미국의 부흥 운동이 1차, 2차 운동이 있었습니다.

1차 운동은 에드워즈의 증언에 의하면 그 자신도 놀았고 인간의 어떤 간섭없이 성령의 역사가 일어 났다고 고백합니다.

에드워즈의 보고서에 의하면 엄청난 회개의 역사가 인간의 노력이 없이 일어 났고 또 한 영의 역사에 대한 악한 영의 공경이 일어 났다고 하였습니다.( 악한 영의 공격중 몇몇 사람이 자신의 목을 칼로 베고 죽는 사건이 여기 저기서 성령의 역사 지역에 방해하는 목적으로 나타났다고 보고 했습니다.(이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약간의 정신적 문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에 반한 2차 대 각성 운동은 인간의 준비와 노력이 많이 가미되었고 이에 대해 피니는 성령의 역사를 인간의 노력에 중점에 두었습니다.

머레이는 당시의 여러 문헌과 각 사역자의 말씀을 분석하여 2차 대 각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이에 현재의 미국 복음주의의 전도의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의 많은 교회와 단체가 이런 인위적인 부흥이 성령의 부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나 전도의 방식이 너무 나 인간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역사마저 심리적이나 인간적인 효과로 바꾸었습니다.

1964년 인도네시아 티모르에 진정 성령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모르는 사실인데..(우린 서구 부흥운동에 너무 귀가 열려 있습니다. 지금 중국 대륙이나(몽고등) 구 소련지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티모르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서구의 언론들도 조사하면서 미스테리 사건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미션 저널등 많은 연구지에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티모르 성령 사건에 대한 보고서는 영문으로 많이 작성 되었고

한국어로 하늘기획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티모르 사건은 현대의 과학자와 언론인들이 본격적으로 참여한 성령 역사 현장의 사건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사도 행전 사건이 후 가장 엄청난 영적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요구가 아닌 그 분의 뜻에 따라 그 분의 방식으로 그 분의 자식에게 임합니다.”

이는 성경과 많은 영적 지도자 진정 부흥의 분석 결과 입니다.

너무 조급하지 마시고

우리가 할 일은 그 분의 약속을 믿고

하루 하루에 그 분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면

놀라운 약속의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그 분은 살아게신 야훼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주의 말씀을 그리워 한 백성에게

주의 온전한 능이 임하소서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회개와 주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우선 주소서…

때가 이르면

주의 능이 임하는 줄 우린 주님의 역사에서 보고 ..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주의 자비를…..


“유사 그리스도인” 저자 매튜 미드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아니 한 귀한 고전입니다. 죤 오웬과 더불어 17세기 청교도의 영적 거성입니다. 아마 이 책을 읽으시면 현재 자신의 신앙의 모습에 누구나 고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는 귀한 영의 서적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래 글은 지체와의 나눔의 댓글을 편집한 글입니다.

지체1: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에서 헬라어 원문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이해를 도우신 작은자님의 섬김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섬김이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어감이 많이 느껴져 한말씀 올립니다.

아이타오와 에로타오의 구별을 통해 님의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결국 성령은 그분의 주권으로 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구함으로 얻게 되는 건 아니란 것을 강조하고자 함인거 같은데요

이 문장의 앞뒤를 통해 일반적인 해석을 통해봐도(굳이 그런 어려운 단어 구별 함이 없어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은 그분의 주권적인 의지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하는 이유는 그냥 그게 신앙생활에 필요하고 중요한 걸 아니까의 측면이 아니지요

주님이 분명 구하라고 내가 주고싶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엡5:18의 “~성령충만을 받으라”와 요일5:13~14절을 통해서도 그분의 주권적 의지를 알 수 있고, 그 분이 그러한 의지로 주시겠다고 구하라 하셔서 성도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성령을 구하는 것은 에로타오로 구하는게 아닌 아이타오로 구하는 것이 됨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일상생활속에서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뜻에 따라 구하는 것은 아이타오아닌가요?

그걸 굳이 단어를 구별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성령을 구하는 저급한 수준으로 평가 절하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만..(물론 그런 의도까지 가지신 건 아니겠지만)

작은자: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에서 충만함을 받는다란 단어 플레로란 의미는 완전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이는 마태 5장 38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의 의미입니다.

너희가 성령의 주권으로 충만하게 된다란 의미가 아닌 앞 구절에 있는 소위 성령파라 하며 엣날의 생각과 행동으로 사는 에베소 교인에게” 너희가 성령의 순종함에 온전하라”란 권고의 글입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진정 성령이 임재한 자로 자발적 순종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 분의 주권으로 오신 성령에 온전히 복종하여 온전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에배소 교회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훈계를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칭 성령파라 하며 전에 있는 모습 그대로 사는 교인에게

성령이 너희 안에 역사하시면 너희의 삶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안에 순종한다 하면서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함이 사실입니다.

많은 분들이 성령의 역사를 자신의 영감이라 많이 말하지만

우리의 생각 부분 부분이 성경에 비추어 같은 영임을 느끼어

말씀이 두렵고 또한 기쁘고 우리의 양식으로 충만함을 얻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필요에 따라 구하는 모습이 현실이 아닌지요?

우리안에 자칭,타칭 성령이 계신다 하면서 성령이 우리를 깨닫게 한다하지만 그 열매는 그렇지 아니 한 경우가 현실인 것 같습니다.

물론 말씀을 어원적으로 꼭 분석해야 하는가 질문하시지만

당시의 정확한 말씀의 의도를 알아야 우리가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말씀을 자기 입맛에 생각하시는 분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이런 문제로 이단이 생기고 해서 함부로 성경을 해석 못하게 했습니다. ( 그 방법은 문제가 있지만 그 만큼 말씀의 묵상이 깊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더 본질적 문제는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죠.)

성령에 주권에 의한 그 분의 가다림..

쉽게 말하지만..

그렇게 말 같이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온전한 자기의 십자가 앞에서 죽지 아니하면

그 분의 주권을 실제 인정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그 실체속에 자신도 숨기고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아니 한

욕심이나 영적 욕망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대표자가 솔로몬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성령의 영적 능력에 관심을 가지지만 성령의 그 분의 인격의 가르침에 관심이 없는 경우도 또한 한국 교회의 현실적 모습입니다.

성령의 주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면(마치 초대 이방인 중 성령을 받은 백부장 고넬료경우, 성경에서 고넬료의 성령 받음에 앞서 그를 “경건하며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고넬료의 이런 말씀에 순종한 모습에 그에게 온전한 성령이 그도 모르게 베드로를 통해 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온전함에 대해 강하게 요구하지 성령 그 자체의 받음에 대해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우린 그 분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만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제 자신도 이 문제가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에 말씀에서 찔림을 받습니다.

초대 교회도 그러한 문제로 바울이 고린도, 에베서, 거의 모든 교회에

온전함을 요구 하였습니다.

그 분의 주권으로 오심으로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하셔 한 성전이 되고

그 분이 가르침에 옛날의 내가 죽고 새로운 아담의 창조의 모습으로 그 분의 영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성령의 인도의 삶이라 성경에서는 말합니다.

지체2:

성령님은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지요.

이는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체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머리로 하는 각각의 지체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활동은 모든 지체가 하나가 되는 곳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위해서 요구되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기본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겸손과 온유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풍성하게 나타났지만

하나되게하는 은혜는 전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형제안에 있는 성령의 사역(은사)을 깊이 살펴보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믿음의 형제들이나 다른 교리등을 대하며 우리의 관점을 지나치게 주장하고 심하게는 판단까지 하는 것은 진정 은혜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분리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항상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요구되는 일입니다.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심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우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명령이고

그것이 사랑이겠지요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님을 주시하십시다.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님을 방해하지 마십시다.

형제 자매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정하는데에

인색하지 마십시다.

우리 모든 지체들의 연합이 좀 더 실재적인 것이 되도록

조금 씩 더 애쓰고, 조금씩만 더 불친절한 말들을 참으십시다.

우리 조금 더 겸손해 지고

조금 더 많이 온유해집니다.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1-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지체 3:

찰스 피니 부흥운동의 오류와 알미니안 흐름으로 빠져가면서 죽기 전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회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그 그의 영향을 빌리 그래함목사님이 입었다는 것도 신학계에서는 알려진 사실이고요.

우리가 이러한 역사들을 고찰하고 검토하는 것은 교훈과 경계를 삼아 진리에서 벗어나는 자가 없는지 돌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지금 새 부흥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유익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가지, 신학계에서 참된 부흥이라고 주장하는 시기에는 부흥의 고조가 있기 전에, 성경 말씀이 제대로 증거 되어 기본을 마련한 상태에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임하였고, 또한 부흥의 핵심 시기 안에서는 설교의 대부분이 회심과 구원 성결에 대한 매우 딱딱한 신학적인 교리들이 강력하게 선포되었다고들 합니다.

감정과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지만, 감정과 현상에는 반드시 분별이 병행해 주어야하는데, 무조건 수용하면서 인위적인 방법론 까지 들어 가게 되면서 본류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었음을 경계 삼는 일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지체 4:

참조하세요. 퍼온 글 입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영화에 미쳐있던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학교 다닐 때부터 미국 영화의 제목과 감독, 주연 배우들 이름은 물론 영화의 스타일이나 기타 세세한 내용까지도 외우고 다닐 정도다. 종국에 그 친구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 장면을 짜깁기해 놓은 것으로 밝혀지는 내용이다.

패스트푸드처럼 길들여진 미국식 복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나는 미국 문화에 너무나 깊게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그 즈음에야 처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피자헛’에서 이태리식이 아닌 미국식 피자를 시켜먹고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와퍼’나 ‘빅맥’ 같은 햄버거에 <터미네이터>와 <프렌즈>를 즐기며 보며 자라온 나에게서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 문화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Praise & Worship’이란 용어는 한국에서 특정한 찬양 집회의 형태를 의미한다. 또 한국에서 일어나는 찬양집회의 스타일은 정확하게 ‘Hosanna Integrity’나 ‘Vineyard Church’에서 행하는 스타일과 일치한다. 결국 한국 교회의 찬양집회는 그 스타일 그대로를 한국말로 번역하여 따라한다는 의미다. 소그룹 운동, 극장식 교회, 내적 치유와 같은 용어들은 미국 교회에서부터 발생되어 한국으로 넘어온 개념들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좋건 싫건 세속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미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론으로 넘어가자. 마이클 호튼의 저서인 “복음이란 무엇인가?”(Putting back into amazing grace)는 책에 쓰인 대로 기독교의 기본 진리, 즉 교리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세계로 초대한다. 마이클 호튼은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접한 대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만인제사장주의, 종교개혁의 보편성, 실재성, 예배중심성에 대한 주의 환기로 우리를 교리의 중심으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복음은 24시간 편의점처럼

이 책의 흐름은 정확하게 기독교의 기본진리와 일치한다. 도예빌트가 완성한 창조, 타락, 구속의 흐름을 따르면서 예정론과 성육신, 소명과 중생, 칭의, 교회와 성례, 그리고 종말까지 우리가 명쾌히 정리하고 내적 확신을 가져야 하는 중심 교리들을 모두 건드리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집중한 교리적인 측면을 서술하기보다는 그간 기독교 현대적 이슈들을 건드렸던, 웨스트민스터의 신학 교수로 하여금 왜 또다시 복음주의적 정통 교리에 집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어쩌면 그러한 컨텍스트가 우리에게 더 큰 시사점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호튼의 전작인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이 책과 함께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 사회로부터 신앙의 근본적인 ‘수혜를 입는’ 우리에게 이 책은 시사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마이클 호튼은 이 책을 통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이야말로 미국 사회와 시민 생활과 문화 생활에서 기독교 몰락의 주범이며 기독교적 활력의 침체의 책임은 세속 인본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속화된 기독교인에게 있다고 서술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입교인 자격에 회심의 체험을 요구한 지 불과 30년이 지난 1662년에 와서 성찬이 “중생의 여부와 관계없이 품행이 단정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는 점과 당시 기독교가 점점 타협을 통하여 한 사회를 통합 유지시켜주는 ‘시민종교’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주의적 정통신앙을 포기할 때, 그들은 가족과 교회와 지역 사회 및 학교와 직장에서 그들에게 성경적 원리대로 행동하며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지적 사고의 체계 또한 함께 버렸으며 홉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교회들은 세속 사회와의 지적 접촉을 회피하였고 신앙이 지적 경험의 총체적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호튼은 제2차 대각성 운동 기간(1775~1825)에 대중적인 부흥 운동을 통하여 신앙의 객관적 내용이 신앙의 실존적 행동으로 대체되어 버렸음을 강하게 비판한다.

“죠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끌었던 제1차 대각성 운동을 제2차 대각성 운동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초기의 대각성 운동시 신학적, 철학적, 학문적 천재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로 전도자였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초대했는데, 다름 아닌 교리에 대한 명료한 선포를 통해 그 일을 수행했다…(이하 중략)…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시에는 메시지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전환되었다.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는 강조점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었다면 두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리하여 구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듣는 사람들이 해야만 할 일을 할 수 있게 하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테크닉과 방법의 큰 체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나 휫필드에게는 부흥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였다. 그에 반하여 나다나엘 테일러와 찰스 피니에게서 부흥은 “수단을 올바로 사용한 것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특히 피니는 ‘부흥은 기적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에 의지하지 않는다. 부흥은 순전히 수단을 올바르게 사용한 철학적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소비자 중심이 최고의 복음?

이러한 신앙의 실용주의적인 잣대가 개입되었던 부분뿐만 아니라 미국 복음주의는 소비자 중심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19세기 말의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무디가 세일즈의 접근법을 그의 복음 전도 사업에 이용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복음 전도자이지만 복음을 전할 때 여전히 세일즈맨이라고 주장했던 점을 지적한다. 즉 그는 단지 파는 상품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세기가 바뀐 후에 빌리 선데이는 강단을 무대로 바꾸기가 일쑤였으며 자기가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자이며 한 영혼당 단 2달러로 결과를 확실히 보장한다”고 자랑하곤 했던 점을 인용하며 현대 복음주의의 세일즈 마인드를 비판한다.

또한 그는 크리스탈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지 인간 중심적이 아니라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에 루터와 칼빈이 신본주의적으로 생각한 것은 적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형세가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나 자아 존중이라는 새로운 종교개혁에서 “죄는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에게서 신적인 존엄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무엇이나 죄”라고 주장했던 점을 지적했고, 이렇게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현대 교회의 문제들을 토저의 말을 인용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신식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지 않는다. 그 새 십자가는 죄인에게 더 즐겁고 깨끗한 삶의 길을 보여 줌으로써 죄인의 방향을 고쳐 준다. 주장이 강한 사람들에게 새 십자가는 ‘자! 어서 주님을 향하여 너희 권리를 주장하라’고 말한다.”

미국제 복음주의의 부정적 영향은 한국 교회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경영자 예수”, “자아 회복을 위한 효율적 기독교”라는 문구들이 여전히 즐비하며 인간의 편의를 위해 예배당을 공연장처럼 혹은 수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크리스털 교회에 버금가는 교회를 짓고자 애쓰는 교회도 보인다. 인간의 죄는 상처로 대체되었고, 전 지구적 구원은 개인의 내적 치유로 변질되고 있으며 사상의 중심에 서있던 복음주의자들은 도리어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위안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생각을 품는다.

하나님 중심의 신학은 인간 중심, 인간 편의를 위한 시민종교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쓴 호튼의 비판이었고, <복음이란 무엇인가>는 진정한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되짚어 보고자 하는 그의 충정 어린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할리우드 키드로 대변되는 우리도 그의 메시지에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겠다.

지체1:

작은자님의 댓글을 보며 역시 제가 그러리란 기대대로 답변을 해주셨군요

작은자님!

대화나 토론에 있어 기본은 상대방의 대화요지 또는 진의를 잘 파악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토론하자는 건 아닙니다.)

저는 작은자님의 글을 보며 우리가 최근 성령(방언을 포함한)을 구하는 모습에 대해 성령님은 우리의 사모함이나 요구가 주체가 되어 간구하는(에로타우)게 아니라 주님의 주권적 약속에 따른 간구(아이타오)인바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신게 주님이시고 구하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게 주님의 의지인바 그것에 따라 구하는 것은 에로타우가 아니라 아이타오의 간구가 아니냐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가 하나 더 지적한 것은

작은자님은 작금의 교인들이 성령을 구하는 것을 자신의 삶에 있어 기능적 도구로 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는바(그게 아니면 굳이 에로타우와 아이타오을 구별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겠지요?) 그것은 너무 평가절하하는 교만한 모습으로 비춰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작은자님의 지적처럼 성령님을 그렇게 기능적으로 보고 구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싸이트에 들어오는 많은 이들과 그사연들을 보거나 간증을 보면 주님을 더 알고 싶고 갈망하기에 구하는 맘의 중심을 볼 수 있는데요 작은자님의 그러한 지적은 적어도 이싸이트에서는 너무 형제자매들을 본의아닌 평가절하를 하는게 아니냐는 거지요

이 싸이트에 작은자님이 글을 올리셔서 하는 말입니다.

엡5:18절을 올릴때 작은자님이 이 부분에 대해 헬라어 원문을 통해 그건 이런말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 예상을 했었는데 역시군요

작은자님!

제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에 대한 인용이 딱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상대방의 논지에 맞춰서 반응하는 것이 각자가 동문서답을 하지 않는게 아닐까요?

작은자님의 구절해석과 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심 그 자체는 참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논지에는 맞지 않는 그 대화 속에 어떤 허술함을 끄집어내서 장황하고도 탁월하게 설명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작은자님의 에로타우와 아이타오의 차이에 대한 설명과 성령을 구하시는 자들에 대한 지적이 어느순간 당신의 장황하고도 현란한 말씀으로 성령에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논지가 바껴져 버렸어요

저는 당신의 전자에 대한 차이설명과 지적이 적절하지 않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말씀을 더 보충하시려면 그것에 대해 하셔야죠

제가 느끼기에는 이런 사람들이 대체로 다른 이들의 얘기를 적극적으로 또는 세히 경청하려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꼬투리 잡으면서 자신의 높은 수준의 지식을 풀어놓기에 바쁜 자기중심적 사람들이 많은거 같던데요

작은자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작은자:

우선 저의 글 내용이 지체 1님의 마음에 불편함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글을 윗글을 작성한 것은 이곳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보이시는 분들을 무시함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구별을 위함입니다.

제가 작성한 말씀 연구는 특별한 영적 해석이 아닙니다.

영적 해석은 주관적이므로 조심해야 하지만 윗 글은 일반 강해식 말씀 분석입니다.

현학적인 문체가 아닌 성경해석에 대한 명확한 배경과 의미를 적은 내용입니다.

성경 해석에는 역사적이고 신학적, 그리고 영적인 배경이 함께 해석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저의 성경 해석의 논지입니다. 이는 많은 영적인 선배들도 그렇게 해 오신 방법입니다. 만일 말씀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너무 나 많은 경우에 말씀에 대한 올바른 고민과 순종 없이 행하여 문제를 만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

그렇기에 지적인 나열이 아닌 말씀에 해석에서는 저의 모든 것을 다해 생각합니다.

단순히 떠오른 영감을 가지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배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의 글을 통하여 고민하며 글을 작성합니다.

이 모든 것의 주체는 물론 성령의 인도 하심을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에 대한 열망 없이 많은 사람이 추구하지 아니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잘못된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린 역사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교훈을 발견하고 올바른 주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렇게 해온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받아들임과 구별은 다른 의미 의미였습니다.

우린 감상적이고 따뜻한 글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모두 타협할 수 있는 온화한 글을 좋아합니다.

저도 그런 글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주의 말씀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저의 독선적인 면이기보다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 그리고 영적인 선배들의 모습에서, 또한 저의 성령이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어느 때는 제가 받아들이기 싫을 정도로 딱딱하고 아픔이 있어도 무엇이 주의 뜻인지 깊게 고민합니다.

죄는 회개하면 받아들이지만 잘못된 가르침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의 글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올린 글들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글입니다. (저의 독자적인 영적 해석의 주장보다 많은 영적 선배들이 하신 말씀에서 점검된 글 내용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은 항상 그분의 온전한 의지로 일하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욕심, 주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린 많은 성령에 거슬리는 일을 많이 해 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울 왕이 사무엘을 기다리다 사무엘이 제시간에 오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흩어져 급한 마음으로 자신이 제사를 드리다가 저주를 받습니다. 또한, 아말렉성을 칠 때 하나님께 좋은 제물을 남기고자 가장 좋은 양과 소를 남겼지만 오히려 저주를 받습니다.
그의 주님께 좋은 것을 드리고자 하는 간절함은 오히려 저주로 내려왔습니다. 모세 또한 단순한 행위에 의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부정함에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윤리적은 죄와 영적인 죄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 말씀 전반에 잘못 말씀을 나누는 자(가르치는 자)에 대한 경고가 많았습니다. 그만큼 주의 말씀을 이야기할 때 우린 모든 주의(영과 육의 지혜)와 우리의 중심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열정과 간절함이 전부 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온전한 주의 능력이 임하시는 것을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고 그리고 올바르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올바로 구별을 못 하여 무너진 경우가 기독교 역사에 너무 많습니다. 모든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이 알려 주신 말씀은 혼합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주신 능력을 사용하여 무엇이 잘못되고 옳은가를 구별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식 영성 문제는 제가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몇 분이 언급했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알려진 사실이고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단지 많은 지체가 이 사실을 모르셔서 윗글에 포함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에 대한 강구가 없던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이 열정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나 역사적 교훈에서는 늘 먼저, 주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강조됨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주님 뜻의 순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순종할 수 없는 괴수죠.)

에로타우와 아이타오의 해석 또한 이런 순종의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부흥의 역사에서 인간의 욕구로 강구되었던 것이 적지 아니했습니다.

기독교 역사가나 많은 영의 선배들이 이 문제를 반성하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말씀과 같이 언급한 것입니다.

제 글에 모든 분이 동의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각자 주신 은사대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